연기나 교육이나 힘을 빼야 한다.
『나는 그날, 주오에게도 나에게도 배웠다』
아이들은 자라며 수많은 감정을 배운다. 그리고 나는, 교실에서 그 감정의 무게를 마주하는 사람이다.
어제 미술 시간, 주오는 평소보다 더 감정의 파도를 크게 일으켰다. 수채화 수업 중 뭔가 잘하려고 했던 게 어그러지면서 물의 양을 조절하지 못해 물감을 지나치게 희석했고, 접시에 물을 왕창 부으며 장난처럼 내 휴지를 가져가 ‘휴지떡’을 만들었다. 휴지를 뭉쳐 애들에게 던지려고 하던 차에, 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파란 물감이 지오의 색연필 케이스에 흘러들었고, 그것은 곧 ‘폭발’로 이어졌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다반사이지만 피해받는 포인트에서는 지나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 제일 억울한 1인.
“(분노를 담아)) 당신이 치우라고요오! “
“당신이!?”
그 말 뒤로 주오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고 짜증이 밀려왔다.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 망가졌다는 상실감, 그걸 멈추려 했던 교사의 손길. 말보다 빠르게 감정이 앞선 순간이었다. 내 긴 머리에 퍼런 물감이 뭍은 것도 잊은 채, 상황을 수습했다.
점심시간, 나는 식사도 잊은 채 지오가 쉬고 있는(분을 삭이고 있는) 상담실로 올라갔다. 아이의 마음에 다가가려는 한 사람으로서, 그저 가만히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지오는 던진 쿠션과 함께 “x발 꺼지세요”라는 날 선 말을 내게 내던졌다. 잠시 숨이 막혔다. 스물일곱 해의 교직 생활 중, 그 어떤 말보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단단해져야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아이의 무례함이 나를 흔들었다.
주오에게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소중한 물건이 망가졌고(케이스에 푸른 얼룩), 표현할 방법을 몰라 몸이 먼저 움직였고, 말이 감정에 눌려 거칠게 쏟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표현의 방식은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배움은, 지금이 가장 절실한 때라는 걸 나는 안다. 하지만 지금은 나도 더 이상 지도나 훈육을 할 에너지가 바닥을 쳐서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시간이 되시면 데려가시라고. 다행히 부탁에 따라주셨고 아버지에게 주오의 분노포인트만 전달하고 막돼먹은 무례함까지는 전달하지 않았다. 기록만 남기고 다음 날 교감님께 이 사실을 전달했다. 당일에는 나도 너무 기력이 바닥 쳤나 보다.
다음날 아침 교장님은 주오를 교장실로 데려가 지도하셨고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의 한 시간 넘는 지도를 받은 뒤 주오는 내게 와서 조용히, 교육받은 대로 사과를 건넸다. 전체 학급 친구들에게도 “미안했다”라고, “불편하게 해서 죄송하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순간을 오래 기억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다.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아이의 사과는 필요한 과정이었고 조금 위로는 되었다. 교장님의 훈육 노하우가 궁금해진다.
주오에게 그날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생겼다. 한 아이의 오빠가 된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가족의 변화가 아니라 책임감의 시작이다. 나는 바란다. 주오가 오늘의 경험을 통해 ‘감정’이라는 깊은 바다에서 어떻게 숨을 고르고, 어떻게 자신을 건너갈 수 있는지 조금씩 배워가길.
가정의 사랑은 아이에게 가장 깊은 교과서가 된다. 감정을 조절하는 법, 말의 무게를 아는 법, 사회 속에서의 태도를 익히는 법. 그 모든 것을 가장 먼저 가르쳐 줄 수 있는 곳이, 바로 ‘집’이다.
부디 가정에서도 이번 일을 함께 되새겨 주시고, 따뜻하지만 엄정한 기준으로 아이가 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부탁드리는 말씀을 학부모님께 전했다
학교는 언제나, 그 곁을 지킬 것이다.
나는 오늘도 배운다. 주오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이번 일을 겪으며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된 것은, 교육과 훈육에 힘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단순하지만 어려운 진리였다. 아이가 뭔가를 잘 따라오고 있는 것 같을 때, 교사의 마음에는 ‘이 아이가 드디어 자리를 잡았구나’, ‘이제 좀 더 기대해도 되겠구나’ 하는 바람이 자연스레 피어난다. 그리고 그 바람은 종종 ‘더 바른 길로 이끌어야지’, ‘좀 더 성장시키고 싶다’는 욕심 어린 힘으로 번지곤 한다.
하지만 그 순간, 어긋남이 시작된다.
아이에게는 아이만의 리듬이 있고, 우리는 그 흐름을 섣불리 앞서가려 할 뿐이다. 주오가 만든 ‘휴지떡’ 하나로 교실이 엉망이 되어도, 미리 마음에 힘을 주지 않았다면 상황을 조금은 다르게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조금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물감으로 교실을 엉망으로 만든다 해도 그저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주오 같은 학생을 지도할 때는 아이 앞에 앞서지 말고 늘 뒤에서 지켜보는 인내가 필요하다.
교사는 언제나 한 발 늦게 걷는 사람이어야 한다.
아이가 던진 것에 함께 던져지지 않고, 잠시 서서 바라보고,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 이번 일을 통해 나는 배웠다. 기다림은 가르침의 시작이 아니라, 가르침 그 자체라는 것을.
감정은 다듬어질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