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아버림, 치유, 의식에 관하여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그 두려움의 뿌리는 ‘끝’이라는 상상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은 분명한 사실 하나를 전한다.
어떠한 것도 파괴되지 않는다. 물질도, 에너지조차도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형태만을 바꿀 뿐이다.
나무가 불에 타면 사라진 듯 보이지만, 그 순간 나무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를 이어간다. 재가 되고, 연기가 되어 하늘로 흩어지며, 열이 되어 주위에 머문다. 물 또한 마찬가지다. 바닷물이 증발하면 사라진 듯 보이지만, 곧 구름이 되어 하늘에 걸리고, 다시 비가 되어 땅으로 돌아온다. 자연은 끊임없는 전환의 흐름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인다. “사라짐은 없다. 변형만 있을 뿐이다.”
이 법칙을 생명에도 그대로 적용해 본다면,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단순한 이동임을 알 수 있다. 몸이라는 그릇은 수명을 다하지만, 정체성의 감각, ‘나’라는 자아는 계속된다. 몸을 떠나도 ‘나’는 끊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해도, 그곳은 단절의 벽이 아니라 새로운 길목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천국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영혼의 세계라 하며, 또 누군가는 다시 환생의 문이라고 말한다. 표현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몸은 잠시 머물다 가는 집일 뿐, 그 안에서 빛나는 ‘존재’는 이동한다.
이러한 관점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생명과 죽음〉(Death and Life, 1910–1915)이다. 화면의 왼편에는 해골의 얼굴을 한 ‘죽음’이 차갑게 서 있다. 반대편에는 사랑과 평화로 연결된 인간 군상이 모여 있다. 언뜻 보면 두 세계가 대립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경계는 흐릿하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이어진 과정임을 상징한다. 죽음은 삶의 부정이 아니라, 삶이 완성되는 또 다른 모습이다.
또 하나의 그림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삶과 작별하기 싫어서 죽은 신체 위를 떠도는 영혼> 1805이다. 누워 있는 육체 위로 하얀 영혼이 부드럽게 떠오르는 몸은 멈추어도 존재는 계속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림 속 영혼은 두려움이 아니라 차분한 표정으로 위를 향한다. 이는 우리에게 말한다. “나는 단지 몸을 떠날 뿐, 사라지지 않는다.”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전환으로 이해하면, 살아가는 지금의 태도 또한 달라진다. 언젠가 반드시 맞이할 문을 공포의 대상으로만 여길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알고 살아가는 시간은 더 선명해진다. 오늘의 나를 충실히 살아내는 일이 곧 영원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은 남겨진 이들에게도 평안한 위로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 우리는 눈앞에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아픔에 압도되곤 한다. 하지만 그 존재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관점을 품는다면, 슬픔 속에서도 깊은 안도를 발견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은 두 개의 길이 아니라, 하나의 길 위에서 이어지는 서로 다른 장면이다. 낮이 밤으로 이어지고, 겨울이 봄으로 바뀌듯,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변환이다. 우리는 모두 이 순환의 일부로 존재한다.
나는 죽음을 지금까지 ‘끝’으로 바라보았는가, 아니면 ‘변화’로 바라보았는가?
만약 죽음이 단순한 이동이라면, 지금 살아가는 태도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몸을 떠나도 나는 계속된다’는 믿음이 내 삶에 어떤 평안을 줄 수 있을까?
내가 언젠가 떠날 때, 남겨진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은가?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곧 삶을 더 깊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몸을 내려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다. 몸을 떠난 나의 존재는 또 다른 세계에서, 혹은 다른 삶에서 계속 이어진다. 그러므로 지금의 순간을 충실히 살아내는 일이야말로 영원을 준비하는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생명 자체는 어떤 의견도 갖고 있지 않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