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푸른양 같은 존재
나는 늘 세상에 한계를 스스로 긋고 행복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도전이라 부를 일을 나는 경계라 불렀고, 누군가는 용기라 말할 순간에 나는 한발 물러섰다.
내가 세상에 내민 마음은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푸른 고원의 얇은 공기 속을 헤매는 티벳의 양처럼,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이토록 두렵고, 또 외로운 일이었다.
그때 만난 그림이 있었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절벽 끝에 선 한 남자가 안개로 덮인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등 뒤로 바람을 맞으며 서 있고,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안개 너머의 세상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단단한 뒷모습 하나로, 나는 묘한 떨림을 느꼈다.
그의 발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개의 바다다.
그 안에는,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미지의 세계가 함께 뒤섞여 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혹시 나처럼,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의 망설임 속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을 향한 한 걸음이 아니라, 두려움과 마주하기 위한 한 걸음 앞에서
그는 지금 숨을 고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 그림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안개는 흐릿하지만, 그 안에서 나 자신이 보였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스스로의 한계를 안개처럼 쌓아올리고 있었다.
“여기까지면 됐어.”
“이 정도면 충분해.”
스스로 위로하며, 동시에 나를 가두었다.
세상에 나아가기보다, 내 방의 서랍장 하나를 닫아두는 게 더 쉬웠다.
난 그것을 판도라의 상자라고 지칭해왔다.
그 서랍 안에는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 미뤄둔 꿈, 말하지 못한 문장들이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하지만 프리드리히의 남자는 달랐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고독과 두려움을 짊어진 채, 안개 위에 서 있었다.
그는 비겁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직했다.
세상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대신, 그 안개 속으로 눈을 뜨고자 했다.
그건 어쩌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가장 고요한 용기일지도 모른다.
그림 속 방랑자는 바다를 향해 서 있지만, 나는 안개 속 나 자신을 향해 서 있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있지만, 나는 나의 불안과 후회를 붙잡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물리적 자연이지만, 내가 바라보는 세계는 감정의 지형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바위 위에 서 있다.
운무...
각자의 안개와, 각자의 고요를 품고서.
이제는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그저 그 위에 서 있는 것,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음을 믿기로 했다.
두려움이 사라져야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서도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로 나는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그림 속 남자는 결국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무한한 세계가 열려 있다.
그의 고요한 뒷모습이 내게 말했다.
“세상은 너의 바깥이 아니라, 너의 안에도 있다.”
스무살이 아닌 나는 여전히 티벳의 푸른양처럼 서툴고 조심스럽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습이 부끄럽지 않다.
나를 억누르던 서랍을 조금씩 열어본다.
닫혀 있던 감정들이 바람처럼 흩날리고, 안개처럼 사라진다.
그 안에서 나는 조금씩 나아간다.
누군가의 눈에 그것은 미약한 변화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처음으로 세상과 나 자신이 맞닿는 순간이다.
절벽 끝에 선 남자가 그랬듯,
나 역시 바다와 안개,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나를 마주한다.
그 안개는 여전히 짙지만, 그 안을 바라보는 눈빛은 달라졌다.
이제 나는 묻는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 더 나아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