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 같은 구조 속, 우리에겐 그들이 있었다
TO. 여기까지 함께 온, 고마운 너에게
지난 글,
낡은 설계도의 진단서는
버텨 읽기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잠시,
앞으로 나아가기 전
숨을 고를 수 있는 자리를 남겨 두었어.
여기까지 온 자신이면
이미 충분한 자리.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그 말 하나면 되는 자리.
무언가를
더 보태지 않아도 되는,
여백에 머무는, 그저 자리야.
FROM. 같은 페이지를 넘겨온 사람
우리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전쟁터 같은 구조 속에서도
우리 곁에는 그들이 있었다
이 편지는
치열함의 빌딩 한가운데, 사람이 남아 있던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TO. 지금 이 자리에 선 너에게
이곳은 분명 전쟁터야.
성과표와 평가판이
쉼 없이 밀려오지.
그런데도 네가,
여길 모두 다
지옥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
나는 알아.
“같은 언어로 버티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밤늦게까지 함께 남아
수정본을 보던 사람들.
당선되지 않은 기획안에서
“그래도 여긴 좋았다”라고 말해주던 순간들.
오명의 순간,
과정을 알기에 묵묵히 뒤를 받쳐주던 선배들.
책임지는 자세를 먼저 기억하는 후배들의 목소리.
그리고
너.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네 이름을 걸 수 있는 기준으로
여기까지 온 네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퇴근길에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을 때
마음속에서
다른 문 하나가 열렸던 거야.
이 싸움은
인정을 위한 전쟁이면서도
동시에
네가 너를 지켜내기 위한
아주 사적인 승부였어.
퇴근길,
적어도 너 자신만은
데려 나올 수 있었으니까.
From. 끝까지 네 편인 나
이 편지는
사랑하지만 싸울 수밖에 없었던 부부가
각자의 집을 등에 지고 만났을 때의 이야기다
TO. 누구에게도 가벼이 마음을 건넨 적 없던 너에게
그 싸움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어.
서로를 너무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더 복잡해진 거야.
네가 짊어진,
집의 무게를 알기에
그는,
네가 덜어지길 바랐고,
그가 짊어진,
집의 무게를 알기에
너는,
조금이라도 대신 들고 싶었을 뿐이야.
다만
둘이 방식이 너무 달라서
서로를 향한 손길이 엇갈렸을 뿐.
같은 마음으로
말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이건
각자의 낡은 설계도를 안은 채
함께 버텨 보려 했던
두 사람의 과정이었어.
너는
참는 법을 배웠고
그는
책임지는 법을 배웠지.
누가 더 옳아서가 아니라
배운 방식이 달랐던 것뿐이야.
그래서 더 애썼고,
그래서 더 아팠어.
그래서
너희가 여기까지 온 건
우연이 아니야.
이기려 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게
서로를 끝까지 놓지 않았으니까.
균열이 남아 있어도 괜찮아.
그건 상처가 아니라
서로의 무게를 알아본 흔적이니까.
From. 네 싸움을 이해하는 나
이 편지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의 공간에 너무 많은 빛을 켰던
부모의 뒤늦은 고백이다.
TO. 사랑이 너무 많았던 날들, 너무 잘하려 했던 너에게
너는 아이들 방에
너무 많은 빛을 달았지.
어둡지 않게 하려고,
혼자 두지 않으려고.
무조건 공감하고
무조건 이해하고,
말하기 전에 챙겨주고
어려운 건 대신해 주고.
그걸, 사랑이라고 믿었으니까.
그건, 네가 사랑을 몰라서가 아니야.
“어릴 때”
네 마음을,
아무도 그리고 너도
물어봐 주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래서
묻지 못했던 아이는
묻는 어른이 되었고
기다림을 몰랐던 시간은
앞서 가는 관심이 되었지.
그땐, 그게 최선이었어.
하지만
이제 너는 알게 되었지.
모자람의 반대편으로만,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넘치게 된다는 걸.
그래서
등불을 조금 끄기로 한, 네 사랑이
용감해 보여.
네가 비춘 자리에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밝힌 자리에, 서도록
기다리려는
그 한 걸음의 물러남이.
From, 네 사랑을 믿는 나
이 편지는
한 사람이 오직 한 사람 앞에서만
아무 방어 없이 무너질 수 있었던 순간에 대한 기록이다.
TO. 단 한 사람 앞에서만 무너질 수 있었던 너에게
그날,
그는 약속 시간을 한 시간을 넘겼고
너는 눈으로 거리를 붙잡고 있었지.
‘그럴 사람이 아닌데.’
걱정이 밀려들던 순간,
그는 한 손에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보던 너의 그 눈빛,
1초가 10분처럼 늘어지던 그 긴장.
나는 알아.
너의 긴장은
오래 혼자 버텨온
시간의 두려움이라는 걸.
그래서 그가 나타났을 때
안도보다 먼저
울음 섞인 화가 터져 나온 거야.
그건 기다림의 분노가 아니었어.
삶에서 억지로 삼켜왔던 것들이
‘안전핀’을 만나
한꺼번에 풀려난 순간이었지.
그런데도 그는,
너를 설명으로 재우려 하지 않았고
변명으로 상황을 덮으려 하지 않았어.
그저 미안해하며
네 감정을 그대로 받아냈지.
그날 너는,
강해서 버틴 게 아니라
버텨야 하니까 버티던 너는,
무너져도 괜찮은 자리를
처음으로 만난 거야.
그러니 그 울음, 그 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마.
아주 오래 혼자 버텨온 사람만
그렇게 무너질 수 있어.
From. 네가 버텨온 시간을 아는 나
TO. 낡은 설계도를 내려놓은 너에게
그저
작은 방 하나를
가설처럼 그려 둔 거야.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아도 돼.
나는 이미 나니까.
그저
오래 들고 있던 것을
조심히 내려놓는 순간을
함께 머무는 거야.
아무것도
설계하지 않아도 되는 구간이야.
생각이 느려져도 좋고,
말이 줄어도 좋고,
방향이 없어 보여도 괜찮아.
이 공백은
멈춤이 아니라
균형을 다시 찾는 시간이니까.
너는 이미
충분히 성실했고,
충분히 책임졌고,
충분히 오래 견뎠어.
그러니
이 사이에서는
계획하지 않아도 돼.
지금의 너는
그저
숨을 쉬면 되는 거야.
새 설계는
이 침묵을 지나
자연스럽게 나타날 거야.
억지로 불러내지 않아도,
미리 결정하지 않아도.
오늘은 그저
여기까지 온 너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자.
“충분히, 잘 왔다”라고.
나는
이 공백의 곁에
함께 서 있을게.
From, 나
오늘 또 느닷없이 특편을 적어 보았습니다. 가끔 묻습니다. 특편이 뭐냐고. 특별한 편지이자 동시에 특별한 편성(자리)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번 주, BUILD 1〈내 마음의 도면을 펼치다〉의 10화 ‘나의 공간으로 ∙ 첫 번째 기획서’로 토요일에 다시 만나겠습니다.
오늘 특별한 자리, 마음건축소와 함께 머물러주셔서 고맙습니다.
SUN드림
지금
여백의 공간에서,
스스로에게 평안을 건네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