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생명과문학 겨울호 기고
어릴 적 엄마랑 자주 다녔던 목욕탕에 갔다. 추억 가득한 탕에 들어가니 지금은 어린아이도, 젊은 사람도 없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만 몇 분 계셨다. 오랜만에 갔는데도 세신사 아주머니가 나를 알아보셨다.
“어째 어릴 때 그대로인 것 같아, 아줌마 기억나?” 하시길래 “네 그럼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신데요?”라며 인사를 했다. 엄마와 함께 목욕탕 의자에 앉아 씻는데 나는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몸을 씻고 뜨끈한 탕에 들어가니 이전보다 더 작아 보이는 공간이 그저 반갑고 아련했다.
목욕을 하다가 엄마가 어디 있나 찾았는데 엄마의 배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의 배는 늘 하얗게 물결무늬 주름이 져 있다. 어릴 땐 엄마에게 왜 그런 물결무늬가 있는지를 몰랐다. 엄마의 배 속엔 나와 내 동생이 있었다는 것을 늦게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엄마 아빠 두 분이 결혼하신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손주로 태어났다. 할머니는 첫 손주가 딸이라는 소식에 고개를 돌리셨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한동네 살던 육촌은 한 달 먼저 아들로 태어났는데 딸 손주가 태어나니 할머니 딴에는 속상하셨던 모양이다. 그래도 얼마지 않아 얼른 ‘귀한 내 새끼’ 하며 나를 품에 안고 엄마에게 미역국을 끓여주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백일 지난 나를 포대기로 업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니셨다. 당시 남성이 아이를 돌보는 일은 적었던 만큼 두 분의 이야기가 아이러니하게도 뭉클하다. 아직도 내 초등학교 소풍지에 따라오셨던 할아버지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물론 내가 이렇게 자라는 동안 첫 임신과 결혼, 출산, 시댁살이까지 모든 걸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했던 엄마의 그림자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결혼을 앞두고 덜컥 생긴 나로 인해 20대의 엄마는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을지, 어쩌면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도시에서 살다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시골로 내려가 시댁에서 지냈던 그 당시 엄마는 또 얼마나 막막하고 외로웠을까.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 외할머니께서 ‘아이고, 아기가 아기를 낳았다’며 쓰다듬어 주셨다는데 그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하다.
그렇게 자란 나는 코로나 시국에 내 아이를 낳았다. 당시 중국에서 근무하던 남편이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었고 엄마가 내 옆을 지켜주셨다. 그리고 당신 손으로 외손녀의 탯줄을 자르셨다. 엄마는 울먹이며 “우리 아기도 아기를 낳았어.” 하며 외할머니랑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아기를 무사히 잘 낳았다고 남편에게 전화 통화를 하고 병실에서 기운을 차렸을 때 문득 느껴졌던 배의 허전함, ‘아기가 어디 있지’ 하는 순간적인 두려움과 아기를 얼른 보러 가고 싶은 설렘이 교차했다. 배 속에서 아기가 통통거리며 발을 차는 것 같은,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면 나는 웃으며 아기를 안아주듯 배를 어루만져왔다. ‘콩이(태명)야’를 부르며 다정하게 말을 건네던, 남편이 손을 얹어 말을 걸어주던 온기가 그 순간 참 사무치게 그리웠다.
몸에 묻은 물기는 금세 사라지는데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태어난 아기를 처음 만난 그 순간과 감격이 마음에 새겨져 있다. 기억은 몸에도 선명히 남는다. 엄마의 배도, 나의 배도, ‘엄마’라는 이름을 가지며 흔적이 남았다. 임신 기간 동안 배 속 아기가 점점 커가며 덩달아 배도 늘어나야 했다. 생명의 무게를 감당하는 만큼이나 ‘엄마’의 배는 하얗게 부피를 넓히며 물결무늬를 남겼다.
나의 배에도 엄마와 똑같이 새겨진 물결무늬를 애정으로 쓰다듬는다. 물결무늬를 따라가다 보니 결국 나를 발견한다. 엄마의 배가 나였듯 아기를 품던 배는 결국 나였다. 아기를 품으며 나를 안고 더 나아가 세상을 품고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오늘도 온몸과 마음으로 새긴다.
목욕탕을 나서며 엄마의 야윈 손을 꼭 잡아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