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함에서 오는 희열.
얼마 전 아는 동생이 흑백요리사 2편 나왔다고, 봤냐고 물었다. 너무 재미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어제 저녁, 나도 2편을 틀었다. 넷플릭스에서 쿠킹쇼를 꽤 보는 편이고, 몇 달 전 1편도 재미있게 봤던 터라 자연스럽게 이어서 보게 됐다. 그런데 보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미쉐린 스타 쿠킹쇼들도 많은데, 왜 나는 흑백요리사를 볼 때 유난히 더 재미있고 더 몰입될까?
미쉐린 스타 셰프들이 나오는 쇼를 볼 때의 나는 대체로 제3자였다. 와, 저런 기술이 있구나. 와, 저런 플레이팅이 가능하구나. 감탄은 하지만 마음이 깊이 들어가진 않았다. 화면 밖에서 ‘완성도’를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흑백요리사를 볼 때의 나는 이상하게 ‘참가자’에 가까웠다. 셰프들의 독백, 서로 주고받는 말들, 대화 사이사이에 튀어나오는 표현들을 들을 때마다 자꾸만 감정이 걸렸다. 영어로는 직접 표현하지 않던, 아니 어쩌면 영어로는 애초에 잘 옮겨지지 않는 단어들을 들을 때마다 “아 맞아, 그랬었지”라는 감각이 올라왔다. 우리가 그렇게 느끼곤 했지. 그런 말을 쓰면서 살았지. 단어 하나가 기억을 끌어올리고, 그 기억이 나의 잊혀졌던 한 부분을 다시 꺼내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몰입됐다. 나는 요리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내 안의 언어와 정서를 다시 듣고 있었다.
메뉴 자체가 한국적이어서였을까. 1편에서 ‘아기맹수’가 산나물을 술상처럼 풀어내는 장면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오, 저 나물… 먹어본 지 정말 오래됐다. 기억이 선명하진 않은데도 향이 은은하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백종원 셰프가 한 입 먹고 나서 놀라며 “와, 이거 진짜 잘 만들었네” 하는 얼굴을 봤을 때, 나도 같이 궁금해졌다. 어떤 조합의 맛이길래 저렇게 놀라지? 그러면서 동시에 아주 오래 전에 신선하게 무친 나물을 먹던 기억이 났다. 한국 사람들만 만들 수 있는 그 맛. 외국에서 먹고 자라거나 오래 살면 ‘알 것 같다가도 정확히는 잡히지 않는’ 그 감각. 그걸 화면이 건드렸다.
또 하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친근함과 매너리즘, 그리고 그 안에 섞인 진심. 최강록 셰프가 조림을 하며 독백하던 장면이 있었다. “아 난 조려야 돼. 승부수는 거기에 있어. 오직 하나. 난 무조건 조려야 돼.” 그 말을 듣는데 웃음이 났다. 조림을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혼자 머릿속으로 “난 조려야 돼, 무조건 조려야 돼”를 반복하는 그 모습이 재미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조리다’라는 말이 정말 오랜만에 내 귀에 들어왔다. 그 단어 하나로 할머니가 해주던 장조림이 떠올랐다. 음식이 아니라 장면이 떠올랐다. 부엌의 온도, 냄새, 그때의 공기 같은 것들.
그리고 어느 순간, 또 다른 감정이 따라왔다. 우리나라 진짜 치열하다.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또 그 안에서 도전하고, 새로 만들고, 이기지 않아도 끝까지 해보는 사람들. 심지어 그 도전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 그들을 보면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저런 느낌을 받아봤지?
해외에 나와 살면서, 솔직히 한국보다 인생은 덜 치열해졌다. 한국이 너무 치열해서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도 없지 않았다. 다람쥐가 챗바퀴를 도는 것처럼 매일 들려오던 이야기들 - 돈, 성공, 투자, 부동산, 명예 - 그것들에서 벗어나 인생을 다시 보고 싶었다.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내가 기준을 만들고 사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떨어져서, 화면으로 치열함을 보니 이상하게도 그 치열함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 열정이. 조림 하나에 승부수를 거는 사람, 나물에 승부수를 걸어보는 사람, 소주를 한 방울 한 방울 내리는 사람. 그런 셰프들을 보며 느꼈다. 도전은 인생을 더 즐겁게 만드는 것 같다고. 치열하게 살면 스트레스는 엄청나지만, 치열함 속에서도 희열을 느낄 수 있는 문화가 분명 존재한다고. 그게 한국이 가진 하나의 문화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문화, 음식, 사람들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10년 전과는 다르게. 한국이 다시 보였다. 아니, 어쩌면 “한국이 다시 보인다”기보다는, 내 안의 한국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아, 우리나라 이런 나라였지”라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한국의 어떤 부분이… 어쩌면 자랑스럽고 좋아 보였는지도 모른다.
#흑백요리사 #한국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