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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국 엄마달팽이 Jan 27. 2021

[03일 미션 중] 공감필법: 정체성 <사피엔스>

글쓰기 책(유시민의 공감필법)을 읽으며 글쓰기


글쓰기 책을 읽으며 글쓰기 03일째.


유시민의 공감필법 중 [정체성: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편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것보다는 글쓴이의 생각과 감정을 텍스트에 담긴 그대로 이해하는 데 초점을 두고 책을 읽는다.”


나는 늘 정보였다. 읽는 것도 정보요, 내가 주고픈 것도 정보였다. 나보고 글을 제공하라면 그것 또한 정보제공이 목적일 것이다. 글쓴이의 생각과 감정도 정보로써 받아들이는 나라는 것을, 오늘 처음 안 것은 아니지만 이 생각을 쓰는 이유는 공감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좋은 정보를 얻은 때, 우리는 ‘공감받았다’라고 하나...?


공감을 제공하는 일을 하는 나의 직업에 생각이 미치자 재밌어진다. 나의 일 중 일부는 ‘공감하는 방법’에 대한 정보 제공도 포함된다. 기술 제공, 정보 제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기술을 왜 배워야 하는지를 움직이는 소개는 언제나 공감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공감받지 않으면 그 정보를 제공받을 이유가 없다. 세상에 배워야 할, 배우고픈 기술은 차고 넘치고 우리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정보제공에 더 시간을 쏟았던 듯하다.



“글쓴이와 심리적 거리를 두지 말아야 한다.”


내가 꿈꾸는 그 문화 활동에, 제발 모두들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굳이 ‘사람’이 아니라 ‘사피엔스’라는 단어를 쓴 것은 하라리 자신도 그 사피엔스라는 종의 한 개체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자아 정체성을 ‘호모 사피엔스’로 규정한 것. 피부색, 인종, 민족, 국적을 불문하고 지구에 사는 70억 호모 사피엔스, 시간을 거슬러 추적하면 모두가 같은 조상에게서 갈라져나온 형제자매라는 뜻.”


국적 불문, 세계시민정신이 교육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환경에 대한 관심에서부터였다. 경제적 문화적 장벽을 허무는 기술의 발전이 내게 가져온 것은 지구라는 하나의 행성으로 확대되는 나의 시각이었다. 국가적 경계는 달라도 ‘하늘’과 ‘바다’는 경계없이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뉴스 기사들 덕분이었다. 비록 아름다운 기사들로 확대된 시각은 아니었지만.



“텍스트는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비판하려면 먼저 정확하게 독해해야 한다. 비판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면 텍스트에 몰입하지 못한다.”


비판해야 한다는 강박. 강박은 감정을 일으킨다. 감정이 앞서거나 감정이 넘치면 해석과 판단의 공간은 줄어든다(뇌과학이 여기에). 비판해야 한다는 강박은 모르겠지만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 건지 불안이 먼저 들곤 했다. 글쓴이의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읽고 있는가.


‘내 앞에 앉은 이의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읽고 있는가.’

글 읽는 이와 상담하는 이의 접점이라니. 내 몸에 베인 직무성향을 글 읽기에 그대로 옮겨가자는 생각 한 줄기 발견.



“우리가 탐하고 갈망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객관적으로 의미있는 건 아니다. 돈, 지식, 권력, 명예, 다른 모든 것들도 내가 의미를 부여해야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해석의 방향에 대한 공부는 마인드풀니스에서 시작되었다. 아니, 그 전 심리학에서 먼저 맛을 보긴 했다. 아니, 더 이전에 불교학이라 해야 하겠다. 심리학과 불교학에서 논리를 맛보고 마인드풀니스로 훈련을 씨이게(세게) 받았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불안도 후회도 원래는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갈망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은 ‘진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사람. 언제나 평화. 누가 봐도 이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며 살아오진 않았나? ‘누가 봐도’는 없는 것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있을 뿐. ‘어느 사피엔스가 다른 사피엔스에게’. 유발 하라리.



“세상과 사람과 인생을 대하는 관점과 태도가 조금 또는 크게 달라지는 순간을 체험할 때, 공부가 참 좋다는 걸 실감한다”


동의.
나의 관점과 나의 태도가 나를 자유롭게 하는 순간들을 자주 경험했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되어 자유로워지거나, 알던 것이 방향성을 제대로 가진 듯 느껴질 때 자유로워지거나. 대체로 철학자의 수학공식 같은 언어의 흐름에 탄식하곤 했다. 퍼즐의 마지막 조각처럼 골라진 그 어휘들이 내 안의 호르몬을 폭발시켰다. 자유와 환희였다. 비록 기억되는 문장은 없어도 퍼즐이 풀리는 순간의 전율은 내 몸이 기억한다.


공부가 좋다는 걸 실감한 것은 언제나 철학자의 한 문장, 스님들의 한 문장이었다. 그 이유 또한 같다. 생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나의 말과 나의 글.

나의 생각과 마음을 읽는 이와 심리적으로 거리가 생기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적어야 하나. 난 여전히 과학적 정보로 설득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철학자의 한 문장처럼 마음으로 들어가려고도 하고 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는 없다. 정보는 요약하면 되는데, 마음으로 들어가는 문장, 그 문장을 찾는 데 언제나 고심인 듯도 하다.

나의 마음과 나의 말로 내 앞의 사람이 자신의 세상을 살아내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달라졌음 하는 마음으로 현재의 직업을 선택했다.


이제는 글이다. 나의 몸이 닿지 않는 곳에 나를 보낼 수 있는 것은 글이다. 나의 글이 나의 생각과 감정을 잘 담도록, 잘 해석되도록 적혀야 한다.

역시 어렵다.




그래도 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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