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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국 엄마달팽이 Jan 28. 2021

[04일 미션 중] 공감필법: 감정 <코스모스>

글쓰기 책(유시민의 공감필법)을 읽으며 글쓰기

글쓰기 책을 읽으며 글쓰기 04일째.

유시민의 공감필법 중 [감정: 칼 쎄이건의 코스모스] 편.




“지식을 배우고 정보를 얻는 것만 공부가 아닙니다. 타인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공감하는 것도 공부입니다.”


타인의 감정을 보고, 느껴보는 것, 인간학, 생명존중학이라 마음 붙이며 내가 하는 것, 나는 공부를 하고 있구나.



“칼 세이건은 브루클린에 살던 젊고 가난한 부부의 첫 아이였습니다. 아이한테 책을 사주기 어려운 형편이었겠죠. 도서관 카드를 받아들기 전 칼은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을 껴안고 있었는데, 난생처음 간 도서관의 사서가 건네준 책에서 답을 얻었습니다.”

“칼 쎄이건의 생애는 공부와 삶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를 천체물리학자로 만든 것은 아주 어린 시절 품었던 의문이었습니다.”


밤 하늘의 별에 궁금증을 가진 소년. 별에 대한 과학책을 읽고 자신이 살고 있는 브루클린, 지구, 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으로 연결 지어 ‘사고’를 하기 시작한 소년. 그때부터 천문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 소년 칼 쎄이건.

‘나의 소녀기는 어떠했나. 나는 어떤 의문을 품고 살았었나.’
나는, 사람들의 행동에 의문과 생각이 많았던 소녀였다. 어른들의 행동을 보며, 학교의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대하는 행동을 보며, 친구들의 행동을 보며 생각이 많았다. 청소년 드라마를 보아도 캐릭터들 간의 행동의 시작과 결론에 관심이 많았던 나를 떠올렸다. 캐릭터 1이 이렇게 행동하면 캐릭터 2는 이렇게 반응하고, 그런데 캐릭터 3은 이렇게 반응하고. 캐릭터들이 오해를 하고 사이가 멀어지고, 어떤 말과 행동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어떤 말과 행동은 서로를 밀어내는지, 서로가 닿지 못하는 이해의 사각지대는 무엇이길래 그것이 멀어지는 행동을 낳는 지. 캐릭터들의 말과 행동과 그들의 심리적-물리적 거리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궁금해하던 내가 있었다.

심리학.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사고, 생각과 행동의 관계도를 밝혀내는 분야. 어린 소녀기 나의 의문들, 나의 관심들이 나를 이곳으로 결국엔 데리고 왔구나. 첫 공부로 상경계열 15년, 이제 새 공부로 8년째. 궁금해진다, 세 번째의 새로운 공부는 있을까? 있을거라면 그것은 또 지금 내가 가지는 의문들이 결정하겠구나.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감정을 가지고 사는지 인식하는 것, 정말 중요하고 재밌는 일인 것을 확인한다.

어떤 것을 공부하게 만드는 것, 바로 사람의 감정이다. 그것에 대한 강렬한 궁금증, 관심, 재미. 그것을 넘어서지 않고 시작되는 공부는 없는 것이다. 어떤 정보와 지식을 알고 싶은지를 결정해 주는 것은 결국 감정인 것이다. 칼 쎄이건의 책이 많은 이의 사랑을 받은 이유도 바로 그가 느낀 그 감정이 글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책이 다른 과학교양서들의 정보 나열과 다른 이유는 그의 책 곳곳, 아직 과학자가 되기 전 소년 시절 칼 쎄이 건이 느꼈던 감정을 심어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 이제 나는, 나의 소녀시절 감정을, 청년시절 감정을, 지금의 감정을 어떻게 심어서 적을 것인가.




“과학책을 읽을 때는 과학적 사실과 정보를 습득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글쓴이가 그 정보를 손에 넣었을 때 느꼈을, 그것을 해석하고 활용하고 서술하면서 문자 텍스트에 담으려고 했던 감정을 함께 읽어내야 공부가 재미있습니다. 그런 재미를 느껴야 남이 읽으면서 재미를 느끼도록 글을 쓸 수 있어요.”


재미. 나는 인간의 가장 궁극의 목적을 재미로 둔다. 즐겁게 살다 가는 삶. 사명도 있고, 행복도 있다. 그러나 조르바를 지향하는 나는 언제나 ‘즐거움’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행복은 쇼윈도 솜사탕 같았고 사명은 너무 무거웠다. 늘 ‘즐겁게 살자’로 헤어지는 나였다.

그런데, 나는 요즘 무겁다. 내가 지키고픈 나 자신이 있고 내 주변의 타인들이 있다. 우리 누구든 약자가 될 수 있다. 약자를 함께 인식하며 살아가는 문화를 만들고픈 마음은 사명감으로 이어지는 모양새를 풍기고 있다. 관심이, 사랑이 넘치자 안타까움도 커지고, 걱정이 늘면서 내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다. 무거워서 가라앉아 재미는 두 팔 멀리 밀려났다. 내 삶은 가벼운데 사회 속으로 가면 무겁다. 나 개인의 삶과 사회 속에서 이어가는 삶 사이에 구분이 생긴다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 결국 타인들에게 원하는 나의 종착 물도 그들의 ‘즐거운 하루들’인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이 자꾸 무거운 철문이다. 무거워서 재미가 깔려버린다.

나의 어떤 감정을 문자 텍스트에 담아야 읽는 이들이 재미를 느끼고, 움직이기 시작할까. 어떻게 즐거운 하루들을 만드는 데 움직여보자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의 이 무거운 감정을 어떻게 담아야 할까. 무거운 대로 담아내면 재밌게 읽힐 수 있을까. 무거움을 그대로, 그것으로 공감을 얻어내려면, 어떤 텍스트로 담아내야 할까. 무거움 대신 다른 감정을 찾아내야 하는 걸까.



“비평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감정에만 빠져서 남의 텍스트를 멋대로 난도질하는 비평은 흔하지만요. 어떤 사람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주장을 하는 경우에도 텍스트를 쓴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그 사람의 눈으로 그 텍스트를 담았는지 살펴본 다음
자기 자신의 눈으로 그 텍스트를 비평해야 하는 겁니다.”


나의 감정에 빠져서 타인의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읽지 못하는 순간. 나도 그러했을 것이다. 주관적으로 말하고 있으면서 자꾸 객관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밀어붙인 무지함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가 바로, 나의 감정으로 타인의 텍스트를 이해한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감정을 잘 읽어내는 훈련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나의 판단에 동의를 얻은 저자의 글이었다. 나의 기분이 흐뭇함을 알아차리고 있다(나의 감정 확인!).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판단을 한 순간에도 글쓴이의 입장에서 이입해서 살펴본 다음 자신의 눈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말. 공감을 한 후 자기 입장은 유지하라는 것으로 들렸다. 사회적 기술, 심리치료적 기술로 대세인 공감. 또 공감이다. 타인의 입장에 이입해서 살펴보는 행위.

20대부터 늘 생각했었다, ‘역지사지’의 자세면 세상 뭐가 문제일거냐고. 각자 가는 방향이 다른 게 불편한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들리는 잡음들이 싫었던 나였다. 그러면서 생각해본다, 나는 역지사지를 잊지 않고 생활해 왔는가. 감정에 휩쓸리면 나 또한 6을 9라고 우기고 첨예하게 대립해 왔을게 분명하다.

역지사지: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여 봄

그대가 옳다고 상대방이 틀린 건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았을 뿐이다.



“[코스모스]를 읽을 때 오류를 찾아내겠다는 태도로 읽지 마십시오. 칼 쎄이건이라는 지식인에게 온전히 감정을 이입해서 읽으십시오. 그래야 공부가 됩니다.”

“타인의 글을 읽으면서 공감을 느낄 능력이 없다면, 타인이 공감을 느낄 수 있는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지요.”


상대방의 눈을 보고 말로 하면 잘 되는 공감이, 글을 쓸 때에는 사라지는 것일까. 나는 시각적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인 걸까.

아하, 그렇다면!!!
책을 읽을 때, 저자를 만난다는 생각으로 책에 손을 얹고 첫 장을 펼치는 의식을 하듯, 이제 나는 글을 쓸 때, 내 앞에 인형을 두고 글을 써야겠다. 말로 설명할 때 하던  방법을 글을 쓸 때도 해보아야겠다. 인형을 두고, 글을 쓰면서, 글을 읽어줘 가며 써봐야겠다.

“포뇨야, 이제 니 자리는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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