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국 엄마달팽이 Jan 30. 2021

[05일 미션 중] 공감필법: 공감. 신영복과 창신꼬마

글쓰기 책(유시민의 공감필법)을 읽으며 글쓰기

글쓰기 책(유시민의 공감필법)을 읽으며 글을 쓰기 05일째.


“신영복 선생은 교도소에서 ‘떡신자’였습니다. 떡이 탐나서 그랬던 건 물론 아니었죠.
교도소 재소자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에 동참해야 인간적 신뢰를 쌓을 수 있어서 그랬던 겁니다.”


떡신자.
드라마에서 설명을 들은 그 떡신자(교도소의 모든 종교 집회에 빠짐없이 나타나 위문품을 받는 사람).


“신영복 선생은 자기변화는 인간관계의 변화를 통해 완성된다고 보았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뀌어야 개인의 변화도 완성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글을 쓸 때 개별적 경험을 일반화하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꺼낸 신영복 선생의 ‘떡신자’와 ‘창신꼬마’의 이야기라고 했다. 재소자들과 맺고 있는 인간관계의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신뢰를 쌓아야 했고, 신뢰를 쌓기 위해 ‘쪽팔림’을 감수하면서 교도소 문화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떡신자’를 자처한 것이라 했다.

같은 처지가 된다는 것, 소속을 한다는 것, 그것부터가 시작이다, 나의 존재를 알리고 나의 이야기를 듣게 하려면. 소속이 되어도 내 말은 무시될 수 있다. 그러나 소속이 되지 않고는 내 말을 할 곳 조차 없을 것이다. 같은 처지가 된다 해서 모두가 같은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같은 처지가 되면 어떤 마음으로 나의 이야기를 해야 할지 방향을 잡는데 도움은 된다.

내가 만들고 싶은 문화와 내가 들어가 살고 싶은 문화가 있다.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 서로의 ‘삶’과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문화. 정확히는 ‘약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고 싶었다. 상담과 교육으로 어린아이들을 마주하면서 생긴 마음이었다. 나는 아이들의 현재를 만나고 아이들의 과거도 만난다. 자주 슬펐고, 무서웠고, 화도 났다. 이미 한 때 자신도 아이였었던 어른들의 무지와 무인식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이들을 슬프게 했다.


무지 때문이라면, 알려주고 싶었다. 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생을 존중하는 태도를 함께 생각해보고 싶었다. 생명을 지닌 모든 생명체의 시간을 존중했으면 했다. 현재들이 쌓여 과거가 되고 그 과거들이 쌓여 미래가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삶이 슬픔과 고통으로 채워지는 것은 비극이었다. 그런 비극적 삶을 살아가는 약자들이 있다. 나 혼자만 희극인 삶을 사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그런 비극을 목격하는 삶도 비극이다. 결국엔 나 자신을 위한 문화였다. 내 맘을 불편하게 하는 그들의 이야기의 무게를 견디기 어려웠다.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그 이야기들을 끝내고 편한 숨을 쉬고 싶은 나의 욕구였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 그중에서도 약자의 ‘존재’를 인식하는 문화, 나와 너도 약자가 되는 순간들이 있음을 인식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었다. 내가 아이를 갖기 전부터였다.

그런데 그런 문화를 만드는 출발이 더 쉬워진 것은, 내가 ‘엄마’라는 그룹에 소속되면서부터였다. 같은 처지에 가 닿자 몰랐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만 향해있던 마음이 어른들에게로도 향했다. 같은 처지가 되어보자 이야기의 내용이 달라졌다. 개별적 경험이 늘어나면서 그 이야기를 토대로 공감을 끌어내 행동의 권유로 이어지는 길목이 자연스럽고 강력해졌다. 개별 경험, 스토리가 귀를 열게 하는 것이었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나중의 일이라 치더라도.


“책 정리를 도와주다가 버리려고 모아놓은 책 더미에서 [제인 에어]를 발견했습니다.
옛날 생각이 나서 선 채로 책장을 넘겼죠. 그런데 마치 처음 읽는 책 같았어요.

제인이 영양실조를 겪던 끝에 병들어 숨을 거둔 헬렌을 껴안고 한 침대에서 잠드는 장면에 가서야 저는 비로소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중학생 시절 느꼈던 감정을 되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분노에 불타오르는 까까머리 중학생이 보였어요. 사십년 세월을 뛰어넘어 그때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떠올랐습니다. 소설 내용은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는데 사십년 전 나를 사로잡았던 감정은 선명하게 되살아난다니,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제인 에어]는 원래부터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감정을 전하려고 쓴 글입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의외로 논리보다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늘 정보의 부족, 무지가 차지하는 부분이 크다고 생각하며 정보성 글을 써왔던 것 같다. 모르기 때문에 약자에게 저런 행동을 하게 되는 부분이 클 것이라고, 그래서 늘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데 힘을 쏟았던 날들이진 않았을까.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영역은 감정이라는 설명을 하는 순간에도 나는 정보를 전달한 것이다.

나는, 어떤 이야기로 감정을 일으킬 수 있을까. 나는 어떤 개별 경험을 이야기로 녹여내야 할까. 나의 어떤 경험과 감정을 어떻게 전달해야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감정이 변하고, 잊혀진 것이 다시 상기되며, 몰랐던 것을 다시 알려줄 수 있을까. 어떤 이야기가, 어떤 글이 우리의 감정을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어떤 경험을 녹여야 할까. 어떤 경험.. 어떤 경험...


“공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을 읽는 데 들어가는 시간은 전혀 아깝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진화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공분을 느끼는 능력은 문명의 산물이 아니라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라고 하더군요. 사회적 공분을 느끼는 능력이 호모 사피엔스의 생물학적 본성.”


‘나도 공분을 느끼고 답답했다. 나의 공분 이후, 나는 무엇을 했는가.’


공분을 느끼는 것으로 시작. 그리고 답답해하자. 답답해하게 만들자. 답답하면 뭔가를 하게 되겠지 한다.

나의 개별적 경험을 잘 관찰하고, 나의 이야기에 감정이입이 잘 되도록 글을 쓰고, 그래서 그 글을 읽는 이들이 공분을 느끼도록, 저자의 글처럼 “인간으로서는 비천한 자들이 고귀한 인간적 감정을 지니고 자기 힘으로 힘껏 살아가는 사람들을 공공연하게 경멸하고 모욕하는 세태에 대한 공분을 느끼는 것”을 이끌어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어린아이들의 고귀한 생명, 존재성을 짓밟고 모욕하지 않는 세상, 주변을 만드는 문화를 위해 무엇을 적을 것인지, 노력하려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04일 미션 중] 공감필법: 감정 <코스모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