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라이드!> 리뷰
어떤 이야기로 운을 띄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복잡하고도 잔인한 모습의 영화를 철학적으로 분석하기엔 너무나 입체적이고도 처연하다. 우선, 영화의 단골 소재인 '프랑켄슈타인'은 수많은 리메이크 작품들을 통해서 피조물에 대한 실존적 고뇌를 거듭 고민해 왔다.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에 의해 태어난 '프랑켄슈타인의 신부'의 이야기는 어떤 모습일까. 2026년 3월 4일, 메기 질렌할 감독의 카메라는 프랑켄슈타인을 위해 필요한 '도구적 존재'를 소환시키며 거칠고도 뜨거운 맥박을 불어넣는다.
영화 속 프랑켄슈타인의 원작자 메리 셸리의 정신은 못다 한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 아이다의 몸에 침투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다. 하지만 그 시작은 상당히 허무하다. 메리에 의해 투영된 아이다는 자신의 자유를 노래하지만 그로 인해 목숨을 잃고 만다. 그녀가 꿈꿨던 '해방'은 차가운 길 위에서 미완의 문장으로 남아버렸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프랑켄슈타인에 의해 '신부'로 재탄생한 것이다. 죽음마저도 온전한 안식이 되지 못한 채, 타인의 욕망에 의해 강제로 '부활'당한 것이다. 부활한 그녀에게는 이전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몸에 새겨진 폭력의 흔적과 못다 쓴 문장에 대한 갈망은 그녀를 백지상태의 순종적인 인형으로 두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가라는 물음은 '진정한 나'를 찾아가기 위한 길목에 놓이게 했다.
영화가 보여주는 브라이드의 파괴적인 몸짓은 정신분열처럼 보이지만, 괴물에 의해 새로운 모습을 찾아가는 모습은 수없이 잃어버린 수없이 이용당하고 잃어버렸던 자신의 '주체성'을 복원하는 과정이었다. 영화는 '대상화된 육체'가 어떻게 '주체적인 자아'로 탈바꿈하는지를 보여준다. 여성을 주제로 한 영화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매끄러운 동화적 해석이 아닌 생존의 투쟁을 보여준다. 실질적으로는 정신분열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는 것이 영화의 핵심 포인트다. 당시의 시대상은 여성들이 자기 검열과 사회적 차별로 인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뱉지 못하는 억압의 시대였다.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지만 소음에 가까운 그녀의 목소리는 미국 전역의 '여성 혁명'에 불을 일으킨다. 정작 자신은 기만한 프랭크를 포용하고, '브라이드'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수식어 뒤의 자신만의 이름 위에 서려는 의지를 잃지 않는다.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를 연상케 하는 제시 버클리의 '브라이드'는 또 다른 결의 광기를 자아낸다. 조커의 광기가 사회적 소외에 대한 신경질적인 응답이었다면, 브라이드의 광기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가 자각한 생의 경이'에 가깝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기괴한 봉합 자국을 비집고 나오는 생존의 비명이다. 이 광기는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창조주(남성)가 부여한 질서'를 거부하는 순간 터져 나오는 해방감이다. 메기 질렌할은 브라이드의 일그러진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그로테스크한 외형 속에 감춰진 숭고한 영혼의 떨림을 감각적으로 포착한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흉측한 피조물을 보는 공포를 넘어, 억압된 자아가 폭발할 때 느껴지는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한다.
이 파격적인 이야기의 끝에는 미적지근한 '해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메리도 아이다도 아닌 자신의 이름이 '브라이드'라니. '나'라는 실존보다 타인의 욕망에 의해 생성된 누군가의 수식어가 앞서는 현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영화적 언어로는 다소 낯선 현실과의 타협이 그려진다. 항상 옳다 말할 수 없는 정의 혹은 목소리를 인정하면서도 그 해방의 방식이 스스로를 파괴함으로써 증명되는 '자유'라는 점은 다소 아쉽다. 제시 버클리의 열연은 압도적이나, 그 몸짓이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가 구축한 '신경질적인 광기'의 문법을 성실히 복제하는 데 그치는 모습에 그 아쉬움은 더 커진다.
그럼에도 '브라이드'가 우리에게 남긴 자유는 달콤하지 않다. 그것은 피비린내 나고, 거칠며, 때로는 스스로를 파괴해야만 얻을 수 있는 고통스러운 전리품이다. 메기 질렌할은 이 잔혹한 동화를 통해 묻는다. 당신은 타인이 설계한 완벽한 '신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서라도 당신 자신의 '광기'를 사랑할 것인가. 제시 버클리의 압도적인 열연 끝에 남겨진 침묵은 한참을 영화관에서 발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안에도 숨겨져 있을,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브라이드'의 영혼이 떨고 있어서가 아닐까.
단순하게 괴물의 짝을 찾아주는 로맨스가 아니라 죽음에서 건져 올린 한 영혼이 자신의 '몸'을 자각하며 벌이는 투쟁이다. 물론 프랑켄슈타인의 손에 의해 다시 기워진 그녀의 몸은, 타인의 욕망이 투사된 결핍의 집합체에 가까웠으나 메기 질렌할의 카메라는 그녀를 가련한 피조물로 박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억이 소거된 '백지상태'는 역설적으로 창조주가 주입하려 했던 '신부'라는 이데올로기를 밀어내는 강력한 진공 상태가 된다. 지난 이름을 모두 벗어던졌으나 누군가의 신부라는 수식어에서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현실. 아이다도, 메리도 아닌 오직 '브라이드'라는 기표로만 남겨진 그녀의 고립은 우리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기억을 잃은 육체에 남겨진 것은 영혼인가, 아니면 사회적 배역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