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시대에서 침묵을 바라보는 시선.

영화 <침묵의 친구> 리뷰

by 민드레


식물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다면 나무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할까. 2026년 4월 15일 개봉한 영화 <침묵의 친구>는 일반적인 영화의 문법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는다. 카메라는 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비추면서도, 인간의 내면을 비추지는 않는다. 2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은행나무의 뿌리와 잎에 새겨진 식물의 시간을 비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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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신경과학자 토니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아기들을 통해 뇌를 연구한다. 수업과 연구를 오가며 일을 몰입하던 토니에게 코로나 19로 인한 팬데믹이 닥쳐왔다. 토니는 텅 빈 캠퍼스에 고립되고 하고 있던 연구도 중단된다. 그러던 중 그는 식물 커뮤니케이션 과학자 앨리스의 이야기를 듣고 캠퍼스 안에 오래된 은행나무와 소통을 할 수 있는 실험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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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카메라의 시선이 닿은 곳은 1908년의 마르부르크다. 이 시대의 주인공은 대학 최초의 여학생이 되고자 하는 그레테다. 그녀에게 세상은 넘어야 할 벽이자,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해야했다. 그레테의 의식은 철저하게 '스포트라이트' 아래 있다. 남성 중심적인 학계의 냉대, 여성학원 입학 시험이라는 높은 장벽, 그리고 "여성은 학문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회적 편견에 부딫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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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60년 뒤의 1972년 하네스로 시선이 옮겨간다. 하네스는 식물에 대한 고결한 사명감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농장일을 끊임없이 해야했던 그에게 식물은 지긋지긋한 노동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무딘 일상에 균열을 낸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여학생의 연구를 도우면서 식물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관심있는 여자아이가 관심있어하는 연구를 했을뿐인데,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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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의 실험은 의미가 있었다. 아이는 어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지하고 반응한다는 사실이었는데, 아기들의 뇌를 연구하며 주목하는 지점은 랜턴 의식이었다. 어른의 의식이 특정 목적을 위해 관련 없는 정보를 차단하고 집중하는 것이 스포트라이트인데, 아기의 의식은 주변의 모든 자극을 차단 없이 수용하는 랜턴과 같다는 것이다. 어른들이 평생을 수행해야 도달할 수 있는 '명상'이나 '찰나의 통찰'이 아기들에게는 매일의 일상인 셈이다. 이 설정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은유로 작용한다. 토니를 비롯한 세 시대의 사람들은 각자의 목표와 고독이라는 스포트라이트 아래 갇혀 있다. 차별을 견디거나, 혁명을 꿈꾸거나, 과학적 정답을 찾으려 애쓰는 과정에서 그들은 주변의 거대한 흐름을 필연적으로 차단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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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스포트라이트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레테가 차별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나무 아래서 숨을 고를 때 영화는 그녀의 내면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그녀가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지 않고 학문과 존재의 증명을 통해 발전해 나간다. 그 스포트라이트가 그녀를 고립시키더라도 그레테는 사진이라는 기록의 도구로 식물의 생명력을 담아낸다.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타인의 시선을 차단하고 나무가 가진 랜턴의 의식으로 식물과 진정으로 맞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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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는 학생 운동과 사회 변혁을 외치는 ‘혁명’의 열기로 뜨겁다. 시대의 스포트라이트는 광장에 모여 미래를 논하는 청년들을 비추지만, 주인공 하네스는 대열에 참여하지 않는다. 농장 일을 하며 흙을 만지는 그에게 친구들이 외치는 거창한 구호는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하네스는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는 대신, 당장 내 손에 쥐어진 노동의 무게와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를 견디는 인물이다. 그런 그를 움직인 것은 혁명의 깃발이 아니라, 호감을 느낀 여학생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식물은 지긋지긋한 노동의 대상에서, 사랑하는 이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통로가 된다. 친구들이 세상을 바꾸려 할 때, 그는 단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식물의 언어에 접속한다. 사랑이라는 사적인 욕망을 통해 '스포트라이트 의식'에 잠겨있었지만 식물과의 소통 실험을 통해 '랜턴의식'으로 번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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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0년을 산 은행나무는 거대한 '랜턴'이나 마찬가지다. 주변의 어떻게 흘러가든 선별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있다. 인간이 명상을 통해 도달하려는 그 경지에 나무는 이미 물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팬데믹으로 연구가 중단된 토니의 무력감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는 아이들의 뇌를 통해 '랜턴 의식'을 연구하는 학자였으나, 현실에서는 팬데믹이라는 '스포트라이트'에 갇혀버린다. 그가 나무와 소통을 시도한 이유는 뇌과학적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독에 의해 한없이 좁아진 의식을 나무의 거대함과 연결함으로써, 침묵하지 않았던 예전의 시대로 되돌아가고픈 회귀의 욕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소란하고 생동감 넘치던 인간의 세계가 언제쯤 돌아올지 알 수 없기에 나무의 침묵에 기대어 끊어진 시대의 맥박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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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혁명적 함성도, 하네스의 풋풋한 연정도 은행나무의 관점에서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진동에 불과하다. 인간 중심의 시선을 과감히 걷어낸 곳에 남은 침묵 앞에 우리가 수백년 간 고민해왔던 고독과 사랑은 흩어지는 먼지보다 더 가벼웠다. 영화는 다른 시대를 살았던 토니와 그레테, 하네스. 이 세명의 이야기를 그리며 각자의 시대를 충실히 재현해낸다. 하지만 이 흩어진 서사가 '은행나무'라는 하나의 맥락으로 착 달라붙지는 않는다. 긴 상영시간에 비해 감독이 설정한 나무와 인간 사이의 균형감은 다소 어정쩡하다. 인간의 서사는 충분히 깊지 않고, 그렇다고 나무의 관점을 파고들지도 않는다. 이렇게 사유를 위한 사유를 안겨주는 영화는 그리 좋은 영화라고 할수는 없다. 무엇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무기력함이 잔뜩 느껴진다. 식물의 고고함을 위해 인간의 치열한 삶이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확인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이 비정한 관찰기록에는 두 가지가 빠져있다. 나무에게는 필요치 않을지 몰라도 인간에게는 필요한 사랑과 온기. 지극히 인간적인 가치가 침묵의 친구 앞에서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는 존재가 된 것 같아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