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단단하게 하는 시간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정현종 시인의 시 〈경청〉의 첫 구절입니다. 단호한 진술이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자주 서로를 오해할까요? 왜 그렇게 많은 다툼과 갈등이 생길까요? 시인은 그 이유를 단 하나, 경청하지 않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듣지 않으니 불행이 생기고, 듣지 않으니 비극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말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생각, 감정, 경험을 누군가 들어주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듣는 일은 말하는 일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기란 쉽지 않습니다. 말이 길어지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듣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결국 상대의 말은 공중에 흩어지고, 남는 건 오해와 답답함뿐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아, 오늘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이든, 어른이든 아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 어떤 사람이건, 어떤 말이건 — 그것이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귀 기울여 들을 줄 안다면, 그 순간 세상은 조금은 나아질 거라고. 듣는다는 건 단순히 귀를 여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여는 일입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일단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시인의 표현대로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환해질 수 있습니다.
시인은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것이라 말합니다. 바깥의 소리만이 아니라 내면의 소리까지도 들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안팎의 소리를 동시에 들을 때, 균형을 찾습니다. 내면의 소리는 양심과 성찰의 목소리이고, 바깥의 소리는 타인과 세상이 보내는 신호입니다. 한쪽만 듣는다면 금세 기울고 맙니다.
오쇼 라즈니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그대가 경청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그대는 명상의 가장 심오한 비밀을 배운 것이다.”
경청, 특히 공감적 경청은 단순히 상대의 목소리를 듣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상대의 숨결, 감정, 그 안에 흐르는 진심까지 포착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경청은 곧 명상이고, 깨어 있음이며, 사랑의 다른 이름일 것입니다.
그림책 《내 얘기를 들어주세요》는 경청의 힘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주인공 브루는 고양이를 잃고 깊은 슬픔에 잠긴 소년입니다. 그러나 길에서 만나는 어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상실만 이야기합니다. 재산을 잃은 카우보이, 발에 자갈이 박힌 까마귀, 마을이 물에 휩쓸려 집을 잃은 사람들…. 그들 모두는 자기 아픔에만 몰두합니다. 브루의 목소리를 들어줄 여유도, 마음도 없습니다.
브루의 슬픔은 아이의 사소한 일쯤으로 치부됩니다. 아무도 브루가 어떤 고양이를 잃었는지, 그 고양이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묻지 않습니다. 공감 없는 세상에서 브루는 점점 움츠러들고, 마침내는 자기 이야기를 꺼낼 용기조차 잃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 일상의 축소판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끝까지 듣기보다는 머릿속으로 ‘내 얘기를 언제 할까’ 준비하기 일쑤입니다. 듣는 듯하지만 사실은 자기 안의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지요.
브루가 끝내 북극에 다다랐을 때, 그는 말을 잃은 아이가 되어버립니다. 공감과 대화가 부재한 극한의 공간에서 그는 어깨만 움츠릴 뿐입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개 한 마리가 다가와 묻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니?” 그 한마디 질문이, 진심 어린 경청이 브루의 입을 열게 합니다. 브루는 마침내 자신의 슬픔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누군가 들어주기를 기다렸던 그 말들을요.
이 장면에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경청은 상대를 살려내는 힘이라는 것을. 그저 “그랬구나”라는 고개 끄덕임 하나가, 얼어붙은 가슴을 녹이는 불씨가 될 수 있다는 것을요.
화법학자 로스는 잘못된 듣기의 여섯 유형을 제시합니다. 끄덕 거리기형, 돼지형, 빈칸채우기형, 꿀벌형, 귀머거리형, 창던지기형이 그것입니다.
끄덕거리기형은 듣는 척하며 고개만 끄덕이는 경우,
돼지형은 자기 얘기만 하고 상대 얘기는 들을 의지가 없는 경우,
빈칸 채우기형은 일부만 듣고 나머지를 자기 멋대로 채우는 경우,
꿀벌형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골라 듣는 경우,
귀머거리형은 아예 듣지 않거나 금세 잊어버리는 경우,
창던지기형은 상대가 틀린 부분을 집어 즉시 반박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이야기를 이렇게 듣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현종 시인은 말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경청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태도이자 삶의 방식입니다.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열 때, 그리고 나 자신 안에서 올라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세상은 꽃처럼 피어납니다.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는 순간, 그 사람의 존재는 존중받고, 존중받는 순간 마음은 열리며, 마음이 열린 자리에서 비로소 관계가 자랍니다.
공자는 오십이 되어서야 듣는 법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경청은 어렵고도 오래 걸리는 배움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만큼 소중한 공부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경청이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아이가 들려주는 하찮아 보이는 이야기에도, 어르신이 반복해서 하는 옛날 얘기에도, 동료의 투덜거림에도 귀를 기울여 주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게 됩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삶을 버텨내는 힘이 됩니다.
경청은 세상과 우주와 공명하는 통로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우리 모두가 꽃을 피울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깊은 비밀이 경청입니다. 시인이 말한 대로, 경청은 불행과 비극을 줄이고 세상을 꽃피우는 힘이 되는 시대를 염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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