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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인정 욕망의 심리학: 존재를 확인받고 싶은 마음

존재를 확인받고 싶은 마음의 철학

by 심리한스푼

1. ‘읽씹’에서 시작되는 존재 불안

친구에게 톡을 보냈다.

“야, 그 얘기 어떻게 됐어?”

읽음 표시가 떴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10분 후, 그 친구가 다른 사람의 스토리에 ‘좋아요’를 눌렀다는 걸 봤다.

나는 잠시 내려놓았던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혹시 알림이 늦게 왔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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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답장이 늦는 상황에서

내 존재가 잠깐 투명해진 느낌을 받았다.

그건 단순히 ‘나를 무시했어?’가 아니라

‘나는 지금 그 친구의 세계 안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까?’ 하는 감정이었다.


누군가 내 메시지를 읽고도 답하지 않았을 때,
나는 아주 잠깐, 내 존재가 투명해진 듯한 불안을 느낀다.
그건 단지 ‘답장이 늦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나의 존재가 타인의 세계에서 지워진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니체는 말한다.

“인간은 사랑받기보다 미움받기를 택한다.
미움조차, 존재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 말이 그토록 와닿을 줄이야.

인간은 ‘좋아요’ 하나에도 존재를 확인받고,

‘읽씹’ 하나에도 존재를 잃는다.

결국 인정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 방식이다.



2. 인정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생존의 언어

니체는 인간의 근원을 “쾌락”이나 “안전”이 아닌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로 보았다.
그건 남을 이기려는 의지가 아니라
‘내 가능성을 현실로 확장하려는 욕망’이었다.


우리가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이유도 같다.
그건 ‘사람들이 날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허영이 아니라,
“나, 지금 살아 있지?”라는 존재 확인의 욕망이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그건 리비도의 사회적 변형이다.
즉, “성적관계(순화된 표현) 대신 SNS에 에너지를 쓰는 현대적 본능”쯤 된다.


좋아요, 칭찬, 박수 소리에 우리가 기분이 좋아지는 건
그 순간 “세계가 나를 본다”는 감각 때문이다.
인정의 쾌감은 결국,
존재가 세상에 ‘등록되었다’는 심리적 쾌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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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질투와 인정의 관계 — 관계의 불안, 존재의 불안

질투는 “그 사람이 내 자리를 뺏을까 봐” 느끼는 감정이고,

인정 욕망은 “나는 여전히 의미 있는 사람일까?”라는 질문이다.

둘 다 불안에서 시작되지만, 스케일이 다르다.


친구가 승진했을 때 느껴지는 질투,
연인이 다른 사람의 사진에 하트를 눌렀을 때의 미묘한 감정 —
그건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질투는 좌절된 인정 욕망의 그림자다.
인정받고 싶은데,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을 때
뇌는 자동으로 “경보음”을 울린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힘의 흐름이 끊겼을 때,
인간은 고통을 느낀다.”

또한,

“질투는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신호다.
죽은 사람은 질투하지 않는다.”



4. 타인의 거울 속에서 나를 찾다

인간은 거울 없이는 자신을 볼 수 없다.
그리고 현대의 거울은 SNS다.


사진 한 장 올려두고 ‘좋아요’를 기다리는 마음은,
그냥 심심해서가 아니라
“나는 아직 존재하나요?”라는 무의식적 물음이다.


조지 허버트 미드는 이를 “거울 자아(the looking-glass self)”라 불렀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라,
타인이 나를 바라본다고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다.”


이 정의를 보고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라
남이 생각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내가 나?’
순간 뇌가 프리즈됐다.


하지만 웃기게도, 그 문장이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모두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인식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확인한다.
문제는 그 거울에 너무 오래 비칠 때 생긴다.


그때부터 우리는
“내가 나로서 존재한다”는 감각을 잃고,
‘좋아요’ 개수로 자존감을 측정하기 시작한다.
니체가 말한 노예 도덕
이 시점에서 재현된다.

“그들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거울에 비친 그림자를 사랑한다.”



5. 아들러: 인정 욕망은 ‘성장의 언어’

아들러는 인간의 행동을 지탱하는 힘을

‘우월 욕구(striving for superiority)’라 불렀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우월’은 남보다 높아지는 게 아니다.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
그게 진짜 우월 욕구의 핵심이다.


문제는 이 욕망이 사회적 경쟁의 회로에 얹히는 순간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성장 대신 비교를 시작한다.
“나는 저 사람만큼 인정받고 있나?”,
“왜 내 이름은 회의 때 안 불릴까?”


이런 질문이 마음속을 점령하면,

욕망은 발전이 아니라 피로가 된다.


아들러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타인보다 위’가 아니라 ‘타인과 연결된 채로 의미 있는 나’라고 봤다.

즉,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은
‘잘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소속되고 싶은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이다.


istockphoto-1218490893-612x612.jpg 아들러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남보다 우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제의 자신보다 성장하기 위해 산다.”


이 말을 곱씹어보면, 인정 욕망은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니다.

그건 단지, 아직 나아지고 싶은 성장의 언어일 뿐이다.





6. 카를 융: 억눌린 인정 욕망은 그림자가 되어 돌아온다

융은 인정 욕망을 인간 내면의 ‘그림자(shadow)’와 연결시켰다.
우리가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감정일수록,
그건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으로 숨어든다.


“나는 남의 시선 따윈 신경 안 써.”

이 말을 자주 하는 사람,

사실은 타인의 시선에 목숨을 건다.

(뜨끔하는 당신을 보고 말하는 것이다.)
그 욕망이 억눌릴수록, 그림자는 점점 커진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질투, 냉소, 자기혐오의 형태로 다시 떠오른다.


융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부정한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얼굴로 다시 나타날 뿐이다.”


즉, 부정된 인정 욕망은

‘나는 그런 거 신경 안 써’라는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의 성공에 날카롭게 반응하는 형태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이 욕망을 솔직히 마주하는 순간,
인정은 더 이상 나를 휘두르는 힘이 아니라

나를 확장시키는 에너지가 된다.
융이 말한 ‘자기(Self)의 통합’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일어난다.

“나는 인정받고 싶다”라는 욕망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욕망의 주인이 된다.



7. 나아가며: 존재의 욕망에서 비교의 욕망으로

인정 욕망은 나쁜 게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비교의 회로로 바뀔 때다.


우리는 본래 “나는 살아 있다”를 느끼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나는 저 사람보다 살아 있나?”로 바뀌었다.
욕망은 그대로인데, 방향이 틀어진 것이다.


그래서 진짜 필요한 건 “비교하지 않기”가 아니라
“비교의 방향을 바꾸기”다.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로 기준을 옮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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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인정 욕망은 불안이 아니라 성장의 연료가 된다.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은 결핍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확장하려는 존재의 본능이다.”


그리고 이제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비교를 완전히 멈출 수는 없다면,
그 비교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다음 장에서 우리는 그 이야기를 이어간다.
〈9장. 비교하지 않는 법은 없다 — 내 기준으로 사는 법〉


비교를 멈출 수 없다면,
그 비교의 방향은 내가 정해야 한다.




✍️ 한줄요약

“인정은 사치가 아니라,
‘나, 아직 살아 있구나’를 확인받고 싶은 인간의 오래된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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