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피티에서 만난 그 흉가를 보면서
그간의 여행을 통틀어 이 여관( Green Creek Inn-RV Park)에서의 잠이 가장 달콤했던 것 같다. 소박한 일층짜리 나무 자재를 많이 쓴 모텔이었다. 우리가 들어섰을 때는 우리외에 한곳만 방이 나간 것으로 보였는데, 아침에 보니 밤 11시 이후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는듯, 대여섯 개의 방앞에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우리처럼 옐로스톤에서 나온 차들임에 분명해보인다.
이곳은 지은 지가 오래되지 않은 듯 모든 가구와 시설물이 깨끗했다. 가구는 메노나이트 사람들의 작품 같았다. 침대, 사이드 테이블, 옷장, 책상, 의자, 모두 한 군데에서 맞춰서 구비해놨는데, 통나무 제품이었다. 나무가 많은 지방이라, 통나무집도 많이 보였는데, 가구까지 모두 그러하였다. 의자를 한번 옮겨봤는데, 정말 무거웠다.
새우 한 봉지 샀던 것을 이날 집어넣고 라면을 끓여먹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날 필요 없다고, 충분히 자자고 했는데, 옆에서 부스럭거려서 무거운 눈꺼풀을 올렸더니 새벽부터 일어났던 막내는 벌써 한 바퀴 훑고 돌아왔다.
새벽에 일어나, 떠오르는 태양을 봤고, 그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저녁에 보이지 않았던 그 "건물"을 발견했다며, 흥분했다. 그 건물이란 우리가 옐로스톤으로 갈 때, 지나쳤던 그것이었다. 왜 저런 흉물스러운 건물이 저곳에 있을까, 우리가 함께보고 상상의 날개를 폈었는데, 우리의 잠자리가 바로 그 건물 밑이었던 것이다.
그 건물은 분명히 어떤 스토리를 가졌을 것이라는 게 우리의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지역의 명물인듯했다. 이름하여 "Mr. Smith의 멘션"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건물을 짓던 스미쓰씨가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고, 그때부터 바람에 흔들리며, 그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 자료가 여관 바인더에 스크랩되어 있었다.
미스터 스미쓰는 엔지니어로 코디(Cody)에서 일했는데, 일하는 시간을 빼고는 주중 저녁, 주말을 이용해서 건물을 지었다. 건물이 지어지면서 그의 온가족이 함께 살았는데, 그는 건축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딸의 증언에 의하면, 제너레이터에 의지한 전기만 조금 사용했을뿐, 추위와 더위를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없었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떠났다. 아내를 잃고난 그는 집에 더욱 매달리게 되었는데 결국 그의 생명까지 앗아가게 되었다. 12년에 걸쳐서, 그는 마무리 없이 계속 이어서 올려서 총 5층 높이의 나무집을 짓다가 발코니에서 떨어져 사망한 것이 1992년이었다. 딸에 의하면 아버지는 설계도가 없이 떠오르는 대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바람이 숭숭 들어가는 괴기스럽기까지 한 건물이 되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강탈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기는 했다.
그의 스토리를 다시금 검색하면서 찾아봤는데 그가 그렇게 일찍 48세란 나이로 세상을 떠난지는 몰랐다. 어쩌면 그의 마지막 작업이 머리 안에 들어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동네 사람들은 "크레이지 하우스"라고 그 집을 불렀고, 그는 산불로 상처를 입은 나무를 싣고 오기도 하고, 철거되는 곳의 자재를 마차로 운반하는 등, 대부분의 작업을 혼자 했다고 한다.
그의 딸은 아버지의 사랑은 단지 엄마뿐이었는데, 그렇게 이혼하고 그는 집에 집착했다고 했다. 불행했던 한 남자가 떠나고 남은 그 흉가가 이제는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걸음을 멈추게 한다. 딸은 기부금을 모아, 집을 보수하고, 기념관을 만들고자 하나 여의치 않다는 소식이다.
이곳은 옐로스톤과 Cody 중간 마을인 Wapity란 곳이다. 우리들의 고단한 마음과 몸을 녹여준, 와피티 여관에서의 아침에 가족에 열심이었던 미스터 스미쓰를 만났다. 그러고보면, 아내를 위해 집을 짓다가 아내가 죽던지, 본인이 사고를 당하든지 하는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린다. 토론토의 카사로마도 그렇고,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곳의 성도 그런 스토리를 갖고 있다. 마음으로 다 전하지 못해서 무언가를 더 보여주고 싶었던 남자들의 그 넘치는 열정들은 현실적인 문제들에서 주저앉게 되는 것같기도 하다. 아내들이여 너무 많은 것을 원하지는 말자.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남편은 올때는 미국 미시간주와 일리노이주를 거쳐 90번을 타고 싸우쓰 다코타와 와이오밍주까지 미 중부를 가로질러 갔으니, 집에 갈때는 트랜스 캐나다(1번 하이웨이)를 타고 캐나다 중부를 가로지르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보이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되면, 러시모어 산맥 근처에 있는 파충류 가든을 올때 가자고 했던 것과, 월 드럭도 돌아갈때 가본다고 했는데, 그것이 "나가리"가 되겠지만, 사실 같은 길로 가는 것보다 더 나을 것 같았다. 시카고 동생과 언니 스케줄을 묻지 않아도 되고 말이다.(난 하루 정도 그곳에서 머물까 했었다)
그렇게 해서 사스카치완주와 매니토바주를 거쳐 온타리오로 가는 긴 여정의 시작이 미스터 스미쓰 멘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첫번째 난관은 국경에서 벌어졌다. Regway라는 곳이었는데, 사스카치완주 리자이나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어떤 마을인지도 모르고 들르게 된 곳이다. 차례를 기다려 이민관에게 갔더니, 우선 어디 사느냐 묻더니, 왜 이곳으로 왔느냐고 했다. 우리는 사실대로 여차 저차 하다고 했더니,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그런 다음에 Arrive Canada App을 다운로드하고 기입했느냐고 했다.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백신증명서와 패스포트를 확인하더니, 캐나다 들어오는 모든 사람은 이 앱을 다운로드하여 작성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14일간의 격리나 5,000달러의 벌금을 물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나는 한국 갔다 온 둘째에게 잠시 들은 듯도 했는데, 육로를 통해서 미국 여행하는 캐나다인들에게 그것이 필요한지는 몰랐다. 너무 천진한 얼굴(?)을 한 우리들에게 이민관은 서류 한 장을 주었다. 이번반 봐줄테니, 그 앱을 깔기전에는 다시 캐나다 입국할 생각을 하지말라고 하였다.
그 서류에는 "단한번 제외시켜준다"은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 앱에 관한 내용은 나중에 리자이나에서 만난 한국분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다. 리자이나에 도착해서 한 모텔에 들었는데, 그곳에서 부부를 만났다. 그분들은 온타리오 토론토에 사는데, 밴쿠버까지 차로 이동 중이라고 했다. 이틀째인데 사스카치완에 도착해서 여관에 들르신 분들이셨다. 아주머니는 자신들은 라스베이거스에 갔다가 앱이 다운이 안되어 설치를 못했는데, 많이 고생했다고 하셨다. 어떻게 고생했는지 잘 듣지못했지만, 우리에게 행운이라고 해주셨다.
나중에 신문을 통해서도 보게 됐는데, 우리처럼 이 앱을 설치하지 않은 많은 여행자들이 이민관들과 티각태각하는 뉴스들이었다. 필요없는 앱 때문에 일처리가 더 늦어진다는 비판이 많았다. 또 연세가 지긋한 여행자들은 앱을 다운받고 사용하는 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하냐고, 언론에 호소하는 자식들도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아직도 불편하기만 하다.
그렇게 해서 사스카치완주의 주도인 리자이나에 도착했다. 이곳은 참으로 황량했다. 첫번째 들렀던 모텔은 스모킹을 할수 있는 방 하나가 남았다고 했는데, 모텔안에서 스모킹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이상하고, 그 건물이 하도 우중충해서 그냥 나왔다. 그리고 몇군데 더 들렀는데 방이 없었다. 위에서 말한 한인부부를 만난 그 모텔 역시 그다지 쾌적하지 않았다.
사무실의 여성은 접수를 하면서 200달러를 일단 더 받겠고, 기물을 파손하거나 하면 그것에서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 본 가격에다 더 지불해야 했다. 우리 옆에 혼자 있던 아저씨가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누구와 싸울 준비가 되어보이는, 막가파 아저씨같은 느낌을 줬다. 우리가 예약을 하고 나온지 몇분 후에 이 아저씨 울그락불그락 험상궂게 나오면서 자신의 트럭을 몰고, 거의 100km로 휭 돌려서 나가버린다. 무언가 잘못되었나 보다. 우리가 한인 부부와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100km 아저씨 다시 들어오더니, 씩씩대면서(욕을 하면서) "내게 너희보다 더 많이 내라고 했다. 너희는 3명이고 나는 1명인데 그럴수 있느냐? 그 여자 조심해라"하면서 우리한테 하소연인지, 협박인지 알쏭달쏭하게 소리치면서 또 100km로 떠나버린다. 어디가다 사고라도 낼것 같았다. 모텔 그 여인은 그 남자를 재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같아 보였다. 모텔은 차 몇대 없었는데, 자리가 없다면서 스위트룸 하나가 남았다고 그 남자에게 말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들었는데, 꽤 많은 돈을 요구했던 것 같다.
그날,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토네이도 경고도 뜨고, 뭔가 싱숭생숭한 밤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방에 들어가니, 방은 넓었는데 막내가 이것좀봐, 이것좀봐, 하더니 몇가지를 찾아냈다. 천장에 알람시스템이 망가져있었고, 텔레비전 코드넣는데도 망가졌고, 화장실 욕조 마개가 부서진 것은 내가 발견했다.
막내는 사진을 찍어서 그 레이디에게 보여준다고 나갔다. 우리가 하지않은 것을 나중에 망가뜨렸다고 할 것 같다면서. 그 모텔은 거의 비지니스가 망해가는 것처럼 보였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서, 머물기에 불안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당할까, 걱정하면서 갔는데 그런 일은 없었고, 우리나라(?) 캐나다에서 씩씩거리는 (백인)아저씨와 그 아저씨와 입씨름하는 인도사람 접수자와, 관리안된 모텔방에서 낯섦을 경험했다. 미국에서는 내가 운영했던 컨비니언스와 같은 이름을 가진 컨비니언스들이 그 규모가 너무 달라서 깜짝 놀랐다. 미국의 컨비니언스는 주유소, 기념품, 간이음식 등 거의 모든 것을 다 취급하고 있었고, 어떤 곳은 카지노까지 경영해서, 손님들에게 한자리에서 쇼핑하고 쉼을 쉬게 해줬다.
막내는 리자이나에서 잠시 살았던 친구와 실시간으로 리자이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가려고 했던 그 모텔(스모킹방만 있다고 하는)은 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마약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말해줬다고 한다. 한번도 가보지 않아서 보고싶었던 리자이나는 이렇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여, 나를 용서하시라. 더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숨어있을텐데, 이번엔 볼 기회를 찾지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