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이야기
크리스마스 위시 리스트중 한개, 이걸 오늘 시작한다.
글 한편 쓰기. 이렇게 적어놓았지만, 이 글을 완성할지 모르겠다.
하루하루 가는게 아까운 달이 있다면 12월인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일년을 잘 정리하고 싶고, 고마운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싶고, 싶고, 싶고.
그러다가 어느덧 날짜가 코앞에 닥쳐온 것을 깨닫는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고해성사부터 하자. 누군가에게 털어놓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몇몇에게만 말했지만, 브런치도 내마음을 드러내는 곳이니 나 편하고자, 독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야겠다.
선물을 사기위해 한번 나갔던 적이 있다. 오후에 일을 나가야해서 큰 성과없이 돌아오는데, 차가 빠져나오면서 주차된 옆차가 닿는 느낌을 받았다. 앗차 싶었다. 한바퀴 돌아서 차를 보러 갔다. SUV 빨간색이었는데, 차를 보호하는 검은 부위에 조금 닿은 것 같았다. 괜찮아보였다,고 세뇌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도망왔다. 그러고나서 얼마나 마음이 안좋았는지. 집에 왔더니 밥을 차리고 있다. 남편에게 말하고 일하기전에 다시한번 가보자고 했다. 급하게 몇술뜨고 쪽지를 써들고 범죄현장을 찾았다. 바로 그차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은색 차가 세워져 있다. 이번에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 차에 쪽지를 두고 오기도 뭣해서 또 그냥 왔다. 우리차는 작은 스크레치가 나있다.
그랬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도 내 잘못은 덮고싶다. 그런 본성을 지니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실수들이 발생할텐데, 책임을 져야 한다는 뼈아픈 반성으로 나아간다. 차주인에게 미안하다. 그에 더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의 생채기를 이리저리 주었을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도 나중에 들었다.
화제를 바꾸어 그다지 인사를 채리는 편은 아닌데, 그 일 때문에 조금 더 마음이 급해졌다. "자연이 숨쉬는 특별한 카드"가 내게 왔기 때문이다. 소나무, 바위, 물, 달 등을 소재로 한, 약간은 인디언 문화 내음이 나는 아름다운 그림 카드가 내게 온 사연은 이렇다.
그날도 손님들이 많았다. 앞 손님을 보내면서 줄을 선 손님의 물건을 스캔하는 중에, 찰나에 눈앞에 무엇인가 떨어지는 것을 본것 같았다. 손님들이 지갑을 꺼내면서 동전이 떨어진다거나, 장보기 목록을 적은 노트를 떨어뜨리거나 한다. 아니면 카드 같은 것이 떨어질 때도 있고. 그런 것들은 대부분 서로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번 것은 조금 달랐다. 그래도 손님에게 혹시 무엇인가 떨어진 것같은데, 잃은 물건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잠시 바닥을 둘러보면서, 아니 없는데 그랬다. 그녀 뒤에 섰던 사람도 함께 두리번거렸는데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고 거들었다. 나는 손님쪽 바닥을 볼수 없으니, 그러냐고 하면서, 아마도 내눈이 잘못되었나 보다며 웃어넘겼다. 몇손님을 보내고 났는데, 그 손님이 다시 왔다. 자신이 귀걸이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귀걸이였기에 낙화(?)하는 속도가 아주 빨랐고, 소리도 나지 않았던 것같았다. 나는 그러냐고 하면서, "Please use next line" 사인을 세워놓고 그녀와 함께 찾았다. 그러다가 내 앞쪽 라인의 캐쉬어가 자신의 발밑에 있는 그 귀걸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어쩌면 사람이 찬 발에 그쪽으로 밀려났을 수도 있을 것같았다. 발밑에 밟히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귀걸이는 꽤 큰편이었는데 그녀는 너무나 기뻐하면서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작은 도움을 주었다. 며칠후 매니저는 귀걸이를 찾아준 캐쉬어에 대해서 너무 감사하다는 리뷰가 달렸다며, 소개해줬다. 나는 그뒤에 한번 리뷰를 찾아봤는데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 어쨌든 그런 일이 있어서 작은 일에 그렇게 감사하는 사람이 있구나, 고마왔다.
그랬는데 며칠후에는 내게 온 사적인 선물이라며 매니저가 두툼한 노란봉투를 준다. 내가 일하지 않는 날에 와서 내게 전해주라며 그것을 놓고 간 것이다.
그안에는 내게 주는 카드가 들어있었고, 2 세트의 카드가 선물로 들어있었다. 그녀는 화가였고 자신의 그림으로 만든 수작업 카드였다. 카드 뒷쪽에 있는 웹사이트를 찾아봤다. 온타리오 북쪽에서 나고 자란 그는 심리치료사이기도 했고, 화가이기도 했다. 남편은 원주민으로 그와 함께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었다. 카누, 카약등을 좋아하고, 그런 야외활동을 통해 자연을 탐험하고 그 경험을 그림으로 표현한다고 나와있다.
올해에는 이 카드의 주인공처럼 나의 인생에 거친모래가 끼었을때 함께 털어주고, 매만져준 많은 사람들에게 그 고마움을 전하겠다.
그래서 첫번째로 선물을 준 그에게 감사편지를 보냈다. 한국 경복궁 기념품점에서 사온 볼펜세트 하나를 넣어서 작은 소포를 보냈다. 감사를 쉽게 잊어버리는 나같은 사람이 아닌, 당신은 특별한 사람, 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며칠전 토론토 극장에서 "서울의 봄"을 상영해서 극장나들이를 했다. 내딴에는 감사의 마음이 있었다. 자매들과 사촌오빠에게도 러브콜을 보냈는데, 오빠부부는 일정상 참여하지 못했다. 토론토 노스욕에 있는 극장에 갔을때, 표와 팝콘 세트까지 결제하고 났는데,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팝콘을 찾으러 갔더니, 지금은 만들어줄 수 없다 했다. 화재경보가 발령했다는 것이다. 조금 기다리라고 해서, 벤치에 앉아있는데 사이렌 소리가 더 커지기 시작했다. 모두 건물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스피커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진 않았지만, 직원들이 모두 나가야 한다고 재촉했다. 바람이 부는 건물밖으로 나왔다. 이번에 못보면 다시 와야하나? 한 동생은 며칠후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고, 3시간 운전해서 와야하는데 언제 이런 기회를 만들수 있겠나? 그러고저러고 큰일은 아니어야 할텐데, 마음이 심란했다. 그 건물 일층, 바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카페에 들어갔더니 음료를 만들어준다. 이러다가 재난영화를 보러왔다가 재난영화를 찍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나서 몇분 기다리자, 사이렌 소리가 줄어들더니 없어졌다. 다리 아픈 언니까지 있어서 움직이는 게 쉽지는 않았다. 어쨌든 다시 올라가서 팝콘과 음료수 등을 챙겨들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 코트를 벗고, 음료수를 컵 홀더에 꽂고, 부산스럽게 영화관람 준비를 마쳤는데, 직원들이 들어와서 밖으로 나가달라고 한다. 이건 또 무슨 일이람, 그들의 말로는 조명시설을 점검해야 하는데, 모두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드링크는 놔둬도 됩니까? 소리쳤는데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음료는 놔두고 다시 코트를 팔에 껴고 밖으로 나왔다. 관람자는 대부분 한인들이었다. 왜 그런데요, 몇몇이 물어본다. 마침 앞쪽에 앉아서 직원들의 말을 들을수 있었기에 대답해줄 수 있었다.
결국 다시 들어가서 예비 선전이 없는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그 시절 아픔의 역사를 토론토에서 가족과 함께 상영했다. 사건이 벌어졌던 몇년후 특전사로 복무했던 남편은 자신이 근무했던 곳이 총성이 일어났던 그 장소라며, 얼굴이 붉어졌다.
우리도 역사의 한시대를 살아냈다는 자각은,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과, 그 잘못된 정권을 끝내기 위해 애썼던 사람들을 기억하게 한다.
이번 나들이는 완전 한국적이다. 시골에서 사는 우리에게는 토론토는 "준 한국"이 되기도 한다. 점심으로는 백종원 사진이 걸린 "홍콩반점"에서 먹고, "서울의 봄"을 보고, 토론토에서 유명한 조선옥 식당에서 "우거지 국밥" "순대국밥" "김치찜"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갤러리아 한국식품점에서 장보기까지, 한국사람은 어디에 갔다놔도 한국인이다. 내가 대접하는 마음으로 계획했지만, 지불은 팝콘세트까지 한가지씩 맡아서 했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선물나눔이 되었다. 아픈 와중에 있는 막냇동생은 라이드 서비스도 받았고, 무일푼 참여자가 되어서 그녀가 한턱을 쏠 내년 크리스마스를 기다려본다.^^
많이 아팠던 친구가 우리를 불렀다. 동생과 남편의 생일이기도 하다면서. 작년 이맘때만 해도, 잿빛에 가까운 그녀의 상황이었기에, 앞치마를 두르고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했다. 아픈 사람을 이렇게 부려먹어도 되나, 했지만 그녀의 혈색은 나의 혈색을 뛰어넘어보인다. 매일 걷고 있다는 그녀는 치료약의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캐나다의 의료혜택으로 대단히 비싼 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면역력 향상을 위한 그녀의 노력과, 하나님의 보호하심, 모든 사람들의 기도가 빗어낸 기적으로 보인다. 그녀가 근처 한인이 경영하는 초밥집에서 주문한 초밥이 있었고, 음식 또한 푸짐했다.
그날의 대화는 우리들이 늙어서 무엇을 해야 하나, 언제나 모이면 화두가 되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녀는 오래전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중에 이웃이 되어서 성경읽고 이야기하며 늙어가는 삶이 멋지지 않을까, 그런 말을. 그때는 정말로 흘러들었다. 성경 읽으면서 이웃과 함께 늙어가는 삶, 그럴싸해보이지 않았고, 즐거울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삶이 과연 올까, 하는 생각에 미치면서 그런 삶이 보통의 삶보다 값진 삶이 될것 같고, 평범한 꿈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녀의 남편은 성경이야기 하면, 싸우게 된다면서, 우리 모두 일차전을 치렀다. 나도 남편과 다르고, 그녀의 집도 두 사람이 모두 다른 신앙관(종교관?)을 갖고 있어서 참으로 지난한 꿈이라는 걸 다시한번 느낀다. 선합치, 후실행이 아니라 합치를 꿈꾸며 실행을 하는 삶으로 가야할 것 같다. 조그마한 일이라도 하면서 말이다.
또한가지 조앤언니가 다니는 Day away(장애노인 돌봄 서비스)에 갔던 이야기를 하자. 언니는 오랫동안 이 기관에 자원봉사를 해왔다. 일주일에 한번 나가서 노인들 식사시간에 음식도 떠먹여주고, 말벗도 되어주는 그런 일을 한다. 한달에 한번은 언니가 맡은 음악시간이 있어서 좋은 곡이 있으면 피아노 반주도 해주고 하는데,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었으니 우리들이 가서 음악모임을 함께 하자는 계획이었다. 키치너 동생은 자신의 음악을 가끔씩 녹음하기도 하고, 가족들이 모이면 찬송가를 부르게 하고 영상을 만드는등 뒤늦게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는데, 이번 행사에 프로듀서를 맡았다. 정말 안될 것 같았는데, 나와 남편 그리고 동생과 키치너에 있는 안장로님(여자분)과 함께 키치너에서 한번, 우리집에서 한번 맞춰서 불렀다. 키치너에 모였을 때 동생은 급하게 오는 중에 뒷차에 박혀서 차사고가 나기도 했고, 늦게 모여서 밤 12시까지 연습하는등, 나름 곡절이 많았다. 나와 남편 듀엣도 넣고, 동생 솔로도 넣고. 언니는 반주하면서 고요한밤 솔로도 하고. 지루하지 않게 프로그램 편성을 하느라 나름대로 애썼다. 영어를 쓰는 노인들을 위해 한곡만 한국말로 하고, 다섯곡을 영어로 부르려니 혀가 안돌아가고, 내가 맡은 앨토로 부르느라 고생했다.
그날 노인들중에는 음악성이 뛰어난 한분이 있었다. 우리들이 부르는 노래에 미성으로 화음을 넣어주었다. 그녀는 치매인데도 노래실력은 뛰어났다. 가사를 잘 모르는 것 같았는데, 캐럴찬양은 잘 따라불렀다. 남편은 인사를 하면서 박수치는 사람들을 향해서, 내일 한번 더 오면 어떻겠습니까? 해서 모두를 웃겼다. 안장로님은 노인분들이 좋아할 초콜릿과 쿠키도 사오고. 막내동생은 빨간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OH holy night"을 잘 불렀는데 직원들은 동생의 나이가 20대 초반인가, 후반인가 물어보았다. 동생은 50대 초반인데 말이다. 남편과 나는 급조된 듀엣으로 높지않은 곡을 택해 오연준 "고향의 봄" 반주를 듣고 연습했다. 검은옷에 청바지, 그리고 빨간리본으로 장식을 했는데, 이곳에 올리기에는 좀 촌스러워 참는다.
크리스마스 즈음에 하는 모든 일에는 의미가 부여된다.
한국에서 새로 오픈해서 화려한 개막을 했다는 팀호튼스 커피숍에서 작은 만남을 가졌다. 팀호튼스는 동네마다 있는 캐나다 국민다방이다. 오늘은 겨울치고는 햇볕이 따뜻해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더울 정도였다. 격식있는 식당은 아니지만, 서민적이고 평안한 분위기에서 몇시간 이야기를 했다.
이분은 특별하다. 한국 대학에서 오랫동안 가르치다가 이른 은퇴를 하고, 합류하신 분이다. 그분은 메노나이트들의 생활상을 보고, 그들의 공동체를 연구해서 책을 내기도 했고, 최근에 또한권을 펴냈다고 책을 전해주고 싶다고 하셔서 겸사겸사 만났다. 해외 700만 동포들이 한국에 큰 힘이 될수 있다는 것이 그분의 생각이다. 남한, 북한 문제가 평화적이고 진취적으로 풀리려면, 해외에 나와있는 동포들이 힘을 합해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인데, 동포 입장에서 당당히 우리를 사용하라는 외침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에 통일된 한국을 볼수 있느냐 하는 것에 기대를 건다면, 이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것같다. 오늘 받아온 책이기에 읽지는 않았고, 잠시 소개만 한다.
책 표지는 나뭇잎 한반도를 잘 키우기 위해 토양을 에워싸고 있는 세개의 손을 담았다. 남한, 북한을 비롯해 해외동포의 손이 보태졌다. 해외동포 수가 적은 나라의 인구수보다 더 많다고 말씀하시는 그분에게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한국을 알리는 작은 행사를 함께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런 제안을 받는다. 한때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한인들 모이기"가 거의 불씨가 사라져갈 즈음인데 이분은 그 불씨를 살려보자고 하신다. 그것도 큰 꿈을 간직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