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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hie 다영 Lee Sep 12. 2022

<동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길


옛날에 일러스트로 그려서 만든 엽서. 원본 파일은 찾을수가 없어 사진으로 대체..

제작은 저예산으로 이루어졌고, 장르적으로나 과정으로 봤을 때 엄연한 독립영화이건만 따로 다양성 영화 지정신청을 하지 않은채로 다른 상업영화와 다를 바 없는 조건 속에서 정면돌파한 <동주>라는 영화는 열악한 상영 조건 속에서도 큰 호응을 받았고, 입소문을 타고 상영기간과 상영관을 확보하며 승승장구하는 또 하나의 기적을 일구어내었다. 개봉 당시 미국에서 거주할 때여서 극장에서는 보지 못하고, 한참 후에야 친구와 집 앞 작은 까페에 앉아 이어폰을 한 쪽씩 끼고 <동주>를 보았다. 영화가 끝난 후 앉은 자리에서 같이 영화를 본 친구와 아주 오래오래 대화를 나누었다. 많은 생각이, 또 감정들이 온 머리와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나온 후에도 그 모든 생각들이 정리가 되지 않아, 집에 오는 길을 혼자 느리게 느리게 걸어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장 먼저 들었던 감정은 <동주>를 관람한 많은 관객들이 그랬듯, ‘부끄러움’이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이해되지 않는 단어들과, 상황들과 역사적 사건들과, 그들의 마음들이, 나의 무지와 무관심을 드러내보이고 입증하는 것만 같아서 그게 너무나 부끄러웠고, 영화의 중심보다 부수적인 요소에 정신이 팔려서 순간순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고, 그런 역사와, 죽음과, 노고를 딛고 서서, 지금 당장 눈 앞에만 보이는 자신의 손익에만 급급해 외려 서로 싸우고, 발톱을 세우고 전전긍긍해 살아가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에 부끄러웠고, 나의 짧은 시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상과 욕심들이 부끄러웠으며, 살아있음이 부끄러웠고, 그들과는 다른 이유로, 이 시대에 예술을 하는 것, 아니 스스로를 그리 칭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나의 딱딱한 마음과 굳은 목이 부끄러워졌다.


두번째로는 질문을 했다.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라면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니?”라던 몽규의 질문에 스스로 몇번이고 반복해 대답했다. 미국에서 유학을 했고, 꽤 큰 미대를 들어갔고, 졸업을 했다. 몽규의 이 질문은 대학교 1학년 때 나에게 ‘넌 왜 예술을 하는데?’라고 질문하곤 ‘제가 좋아하니까요’라는 나의 대답에 ‘그건 좀 너무 이기적이지 않니?’라고 했던 한 선배의 말처럼 나의 머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아직도 나는 종종 질문한다. 과연 현재, 이곳에서 예술의 역할은 무엇이며 그가 갖는 의미는 또한 무엇일까. 시를 사랑했던 청년 동주, 그에게도 어른들과 사회는, 몽규와 그 스스로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과연 오늘과 같은 때에 문학과 시는 무슨 소용이 있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주는 계속 시를 쓰고 우리에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한 권의 시집을 남긴다. 그 시집은 오늘 날 우리에게 <동주>라는 영화로 다시 살아났고, 그런 의미에서 이준익 감독은 그 질문에 그만의 방법으로 대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그동안 수없이 윤동주와 그의 시에 대해서 배워왔고, 공부해왔지만 그 모든 지식은 머리에서 그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영화 <동주>를 통해서 그 수많은 배움들은 비로소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왔다. 배움이 단순히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간접적인 경험을 하고 ‘느낀다는 것’. 이준익 감독은 영화의 힘을 이용해 지금의 많은 동주와 몽규들에게 시대정신을 질문하고 그에 따른 우리의 행동과 역할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지금 이 시대에 내가 예술을 하고 글을 쓰고, 이야기하고, 지키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떤 마음으로 그런 생각들을 향유하고 살아내가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는 관객에게 어떠한 간접적인 체험과 시점을 통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각자가 대답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행동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 다음으로 내가 취해야 할 행동과 태도는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그 다음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들과 생각들이, 여태껏 수 많은 영화들과 사건들을 통해 나를 스친 생각들과 계기들처럼 금방 스쳐가는 것은 아닐까, 잊혀지지 않을까. 난 또 다시 무뎌지지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순간 찾아들었다. 다시 이전처럼, 개인의 소소한 사건 사고에, 개인의 욕심과 허영에 눈이 가리워 다시 또 눈 앞의 당장 반짝이는 것을 쫓기에 급급해 정말 중요한 것을 잃어가진 않을까 두려워졌다. 이렇게 좋은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우고 느끼는 것들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두려웠고, 혹여 그렇다 하더라도 그걸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내가 될까 두려웠다. 결국은 나의 이 인생이, 젊음이, 나란 사람에게, 또 나란 사람의 약함과 두려움에 낭비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결국은 나도 이 고민들 가운데,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고 순응하게 될까봐, 그것이 너무나도 두렵기만 하다.

마지막  영화가 나에게 남긴 것은 그래도 ‘소망이었다. 동주에게는 몽규가 있었고, 그를 도와주고자 했던 선생들과, 그가 시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의 시를 사랑했고, 위험을 무릅쓰고도 그의 시집 출간을 위해 노력했던 쿠미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듯, 몽규와 함께 나라의 독립을 꿈꾸고 정의를 도모하며 행동했던 학생단체와 친구들, 선생들이 있었듯, 언제나 꿈을 꾸는 이에게는  곳을 함께 바라보고 뜻을 모을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하는 소망이 마음 속에 어렴풋이 자리잡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모든 노력과 수고가 빛을 발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리고 이준익 감독님은  영화를 만드는 모든 과정에서 <동주> 통해 전하고자 했던 정신을  스스로 어느 정도 이룩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숫자와 인지도가 목적이 아닌, 시인 동주와 운동가 몽규에 대한 그의 진심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 속에 함께 했던 스태프들과 연기자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의   마음  뜻이, 오늘  우리 관객에게 전해진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그가 말하고자  이상을 실현시킨 <동주>, 머리로 아는 것을 비로소 가슴으로,  우리의 삶으로 끌어온 영화, <동주>. 오랜시간이 지나도록 잊지 말아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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