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ish Oct 09. 2022

디깅의 기쁨과 슬픔

  요즘 <가짜 노동>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망원동의 한 작은 서점의 매대에서 발견했다. 강렬한 제목에 이끌려 덜컥 구매했다. 가짜 노동이라니. 스스로 찔리는 구석이 많을 것 같아 구매를 망설이긴 했다. 그래도 요즘 내 관심사가 일을 대하는 관점, 태도 같은 것들이니 우선 샀다. 지금은 책의 중반부까지 읽은 상태.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현대인들은 과거와 다르게 '바쁨'이 미덕이라는 것이다. 딱히 일 하지 않고 차 마시고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는 그런 귀족들의 라이프스타일이 과거에는 최고의 가치였다고 한다. 반면 요즘은 바쁜 사람일수록 뭔가 있어보이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거다. 예를 들면 친구랑 오랜만에 만나서 '일은 어때?'하고 물어오면 '아 요즘 바쁘지.. OO 프로젝트 때문에 힘드네' 하는 식으로 대답하는상황이 대표적이다. 안 바쁘다고 말하면 괜히 월루하는 사람처럼 비춰질 것 같은 심리일까. 바쁜 날도 안 바쁜 날도 있지만 위와 같은 질문엔 보통 '아 요즘 바쁘죠..'하고 뭉뚱그려 대답했던 예전 내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저 질문을 누가 한다면 나는 바쁘다는 말 대신 '정신없다'는 말로 답하고 싶다. 이것저것 벌려놓은 과거의 나를 탓하면서 하루하루 꾸역꾸역 넘기는데, 그야말로 정신없다! 하나하나 일의 밀도는 낮은데 가짓수가 많아서 어질한 느낌이라고 하면 될까. 한편으로 그런 여러가지 일들을 관통하는 공통된 키워드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디깅'.




 마케터와 디제이를 본격적으로 같이 하게 된 건 올해 5월부터였다. 이태원 콘크리트바에서 처음으로 음악을 틀고 나서 평일 낮에는 대학내일에서 마케터로 일하고, 저녁에는 믹스셋을 짜거나 하우스, 테크노 음악을 디깅하는 일상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런 일상이 너무 만족스러웠다. 평일 저녁에 해야 할 일이 딱 생기니까 직장인 디폴트 감정인 공허함이 사라졌다. 아 이렇게 살면 번아웃은 안 느끼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그 디깅이란 것이 9월쯤부터 갑자기 나에게 확 몰아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MZ 트렌드를 매주 디깅하고 인사이트를 뽑아내야 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나의 모든 시야가 디깅에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디제잉 플레이도 그 쯤부터 한달에 2~3회씩 잡혔다. 디깅해야 하는 음악의 수가 많아진 것과 같다. 트렌드를 모아서 대화하는 스터디 모임도 그 무렵 참여했다. 그야말로 내 일상은 무언가를 모으는 것, 디깅으로 가득 찬 형태였다.


 디깅이 뭐 대수인가! 싶지만 무언가를 보고 기록하는 것에 '디깅'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한층 더 심오해진다. 트렌드를 디깅했다면 한 차원 더 깊은 수준의 인사이트가 있어야 하고, 하우스 음악을 디깅했다면 다른 디제이들이 별로 안 틀었으면서도 사운드가 만족스러워야 하고, 레퍼런스를 디깅했다면 내 자료에 찰떡으로 맞아떨어져야 하고.. 그런 가운데 가장 힘겹게 느껴졌던 건 바로 일에서 디깅하는 것과 음악을 디깅하는 것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일상이었다.


나의 디깅 아지트인 앤트러사이트

 서로 다른 분야의 것들을 깊이있게 디깅하는 일상이 힘든 건 사실. 그럼에도 동시에 즐거움도 많다. 디깅의 재미는 무언가 딱 포인트를 잡으면 쉴새없이 좋은 게 마구 쏟아져나온다는 것에 있다. 가령 이번주 토요일에 트랜시한 바이브로 음악을 틀고 싶은데, 감을 도통 못 잡다가 내가 틀고 싶은 분위기에 딱 맞는 디제이 셋을 딱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게 발견한 디제이가 어떤 음악을 틀고 좋아하는지 쭉쭉 파다 보면 어느새 내가 원하는 분위기의 음악들을 잔뜩 얻게 된다. 마케팅에서의 디깅도 마찬가지다. 핀터레스트에서 오프라인 공간 관련 레퍼런스를 디깅하다가 내가 생각한 분위기의 소품이 딱 등장했을 때, 그 이미지를 타고 타다 보면 어느새 내가 원하는 이미지로 가득 찬 폴더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또 어느 뉴스레터에서 특정 트렌드를 하나의 단어로 짚어주었을 때, 그 단어를 검색했더니 내가 원하는 트렌드 아티클들을 쉽고 다양하게 찾게 되는 경우도 있다.


 부단한 노력으로 광산을 파다가 금이 반짝이는 곳을 발견하듯, 디깅은 노력을 하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엄청난 결과물을 안겨준다. 그래서 디깅에는 우연한 기쁨이 있다.


 디깅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일상! 디제잉은 아직 플레이해보고 싶은 베뉴가 많고, 앞서 말했던 트렌드를 디깅해야 하는 프로젝트도 아직 계속 진행하고 있다. 어쩌면 이번 기회로 디깅이 나의 큰 장점 중 하나로 자리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디깅은 또 남들에게 인정받는 맛이 있다. 회의 때 레퍼런스를 가져갔는데 '좋은데요?'라는 상사의 말을 듣거나, 열심히 디깅해서 찾은 음악을 딱 플레이했을 때 사람들이 호응해주는 등. 그래서 디깅은 일종의 중독(?)이다. 한번 제대로 맛 보면 헤어나오지 못한다. 더 좋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계속 보여주고 싶은 마음. 그렇게 올해 남은 10월, 11월 그리고 12월까지 난이도 높은 디깅을 계속 할 예정이다.


 + 디깅적인 삶을 사는 모든 분들 응원합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옛날 음악 DNA, 아버지가 물려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