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멜 남자, 화이트 초콜릿 여자 #001
오랜 꿈이던 솔로배낭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 세운 새로운 목표는 바로 커플배낭여행이었다. 물론 인생의 목표라기보단 가벼운 버킷리스트에 가까운 것이었다.
반면 지난 두 달간의 유럽배낭여행을 마치고 가장 먼저 한 다짐은 다시는 장거리 비행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독에 찌든 몸을 가누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열 시간 넘게 이코노미석에 앉아있는 동안 허리에 가하는 부담이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자학이었다.
그 다짐을 깨고 언젠가 여자친구에게 말했다.
"이번 여름에 같이 유럽배낭여행 하지 않을래?"
그녀는 교환학생 기간 동안 스웨덴에 머물렀다. 한국에서 네덜란드를 거쳐 스웨덴까지의 순수비행시간은 13시간을 웃돌았다. 장거리 비행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때만큼은 그녀에 매료되어 뇌가 마비되었나 보다. 그까짓 장거리 왕복 비행,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공항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에게 문자를 남기는 것이었다. 2년이 가까운 긴 시간 끝에 다시 만날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친구가 아닌 연인이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찬 마음을 주체하기 위해 온 신경이 다 가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수하물을 챙기고 검색대를 나서니 환영팻말을 들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안녕 민재!
팻말에 또박또박 적힌 한글. 그녀의 손글씨였다. 물밀듯 몰려오는 감동을 전하려 그녀를 와락, 안아주었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다, 사랑한다, 안고 싶다, 사랑 표현은 많이 말했지만 정작 서로를 한 번도 쓰다듬어보지 못한 채 수개월을 보낸 우리였다. 일찍이 잡았을 손, 진즉에 기대었을 어깨, 수없이 포개었을 입술... 유일하게 행하지 못한 사랑의 언어가 있다면 그건 육체적 교감이었고, 우리는 기대와 함께 그것에 갈증을 느꼈다.
여독으로 피로한 몸을 누이기 위해 공항에서 곧장 그녀의 기숙사로 향하던 중, 언젠가 그녀가 말한 기숙사 침대에 대한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방에 싱글침대 하나밖에 없지만, 우리 둘이 쓰기에 충분할 것 같아. 괜찮지?"
'그럼 당연하지!'를 외치던 내가 생각났다. 그 말의 의미는 넓은 침대가 없어도 괜찮다는 게 아니라, 좁은 침대이기에 행복하다는 뜻이었다.
서늘한 북유럽 유월의 밤공기를 함께 마시며 도착한 그녀의 방은 명화 <별이 빛나는 밤에>가 연상되는 수수한 불빛으로 꾸며져 있었고, 그 조명 아래에는 샤워를 마친 다소 긴장한 성인남녀가 잠자리에 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십 수개월만의 믿기지 않는 재회를 회상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소리 없는 토론을 펼쳤다.
땅거미는 스러지고 갈매기와 아침해가 기지개를 켤 즈음에야 우리는 스르륵 잠에 들었다.
카라멜 남자, 화이트 초콜릿 여자 001 - 마침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각색되었습니다.
원저작물의 저작권은 브런치스토리 작가 권민재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