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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작 Aug 30. 2021

점심 메뉴 '아빠랑 못 먹는 거'




포장 자재 조사를 위해 엄마와 함께 방산시장 투어를 간 날이었다. 11시에 도착해 대중없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배가 무지 고팠다. 광장시장이 가까워서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많았다.



“엄마, 점심 뭐 먹을까?”

“아빠랑 못 먹는 거.”



엄마는 나랑 외출하면 꼭 먹고 싶어지는 메뉴가 있다. '아빠랑 못 먹는 거.' 아빠를 제외한 가족들이 선택할 수 있는 메뉴다.



어릴 적 네 식구가 함께 아침식사를 하다가 아빠가 먼저 출근하실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아침 메뉴는 김치찌개. 아빠가 출근한 후 엄마는 비장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명했다.



‘뒤집어.’



김치만 넣어 끓인 ‘척’한 김치찌개 밑바닥에 돼지고기가 깔려 있었다. 고기가 들어 있으면 아빠가 아예 수저도 안 댈까 봐 안 보이게 끓인 것이다. 찌개 바닥의 고기는 아빠 몰래 열리는 이벤트와 같았다.



그만큼 엄마가 식사 준비에 가장 신경 쓰는 대상은 아빠다. 집밥을 가장 많이 먹는 식구가 아빠고, 혼자 있으면 잘 챙겨먹지 않는 사람이라서도 그렇다. 아빠는 고기나 기름진 양식, 외식 종류를 선호하지 않고, 간도 심심한 음식을 좋아한다. 단맛이 강한 간식류도, 너무 신 과일도 안 드신다. 아빠가 유일하게 잘 드시던 바깥음식은 생선회였는데 그마저도 약 알레르기 반응을 겪은 이후 못 드신다. 또 입맛에 안 맞으면 수저를 아예 대지 않는다. 이런저런 이유로, 엄마는 아빠의 입맛과 건강을 고려하여 식탁이 꾸린다. 그래서 우리는 집 식탁이 절간 같다는 농담을 자주 한다.



아무튼 그리하여 광장시장에서 우리가 고른 메뉴는 아빠랑은 못 먹는 육회비빔밥이었다. 명물이고 원조라는데 맛이 특별하기보다는 그냥 그 식사가 즐겁고 재밌었다.



배 채운 힘으로 다시 방산시장으로 갔다. 방산시장은 무지 넓다. 지도를 봐도 모르니 무작정 들쑤시고 돌아다녔다. 비닐과 박스가 필요해서 쿠키 샘플을 들고다니며 규격 사이즈를 찾았으나 적당한 사이즈가 없었다. 그래서 이어서는 박스 제작을 문의하러 다녔다.



너무 비싼 곳, 초짜로 보였는지 건성으로 받아 주는 곳(견적 연락도 안 줬다), 손님이 줄줄이라 상담받기도 힘든 곳들을 거쳐 한 골목을 지나게 되었다. 노란 인테리어가 예뻐서 눈이 기억한 업체였는데 두 번째로 지나치게 되니 구경이나 하자고 궁금해서 들어갔다.



운이 좋았다. 사장님은 친절했고 가격, 사이즈, 손이 덜 가는 제작방식 등을 쉽게 알려 주셨다. 크게 망설이지 않고 바로 그곳에서 상자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감사하게도 사장님이 후에 쿠키도 주문해 주시고 응원도 해주셨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은 ‘아빠랑 먹을 수 있는’ 집밥을 먹었다. 하루 있었던 일을 신나게 말하다가, 아빠랑 못 먹는 외식을 했다고 하면 서운할까 봐 그냥 육회비빔밥을 먹었다고 말했다. 엄마랑 눈이 마주치고 몰래 웃었다.



심심한 간의 저녁을 먹고, 후식은 역시 엄마표 쿠키였다. 쿠키를 먹다 보니 사실 우리 집 쿠키의 ‘간’은 아빠의 이러한 까다로운 입맛에서부터 탄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간이 세지 않고 부드럽고 손이 가는, ‘아빠랑 먹을 수 있는 거’인 것이다. 그 예민한 입맛을 통과하다니 엄마는 놀라운 실력의 파티쉐라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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