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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작 Oct 24. 2021

망한 요리가 남긴 것

 





나는 까다롭고 고집스러운 어린이였다. 사소한 것에 일일이 제멋대로 굴다가 불퉁해지는 일이 잦았다. 미취학 시절 그런 고집이 한방에 꺾인 사건이 있었다. 엄마 아빠도 몰랐던 사건이다.



아기 시절부터 나는 외할머니댁에 자주 머물렀다. 어느 날 할머니에게 노른자가 안 터진 계란후라이를 먹고 싶다고 졸랐다. 엄마가 집에서 자주 해주는 반찬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위해 계란후라이를 부쳤다. 문제는, 할머니가 반숙을 즐기지 않는 어른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팬 위에서 톡 터져 퍼지는 노른자를 보며 삐죽거렸다.



“할머니 이거 말고. 노른자 안 터진 거.”

“알았어 다시 부쳐 줄게.”



할머니는 몇 번이나 반숙 후라이에 도전했다.



톡.

톡.

톡.



야속하게도 노른자가 터지고, 또 터졌다.



“이거 아니야. 이거 아니야! 안 터진 거!”



노른자는 또 터지고, 내 고집도 터지고,

마침내 할머니 화도 터졌다.



“나가!”



쫓겨난 어린이는 현관문 앞에 서서 엉엉 울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할머니는 왜 반숙후라이를 못해서! 이모가 달려나와 웃음을 꾹꾹 참으며 나를 달랬다. 할머니도 무서운 사람이라고 잘못했다고 말하라고 사죄를 종용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훌쩍대면서 터진 후라이 다섯 장에 케찹을 뿌려서 다 먹었다. 맛있었다.



“터진 것도 맛있지?”



요리는 어려운 일이고 고집도 적당히 부려야 하고 터진 후라이도 맛있다는 것을 깨달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사실 터진 후라이 정도는 망한 것도 아니다. 그 다음으로 먹어 본 대차게 망한 요리의 주인공은 아빠다.



아빠는 요리와 연이 없는 사람이다. 부엌에 잘 드나들지 않는 아저씨고, 살면서 가스렌지를 켠 일도 손에 꼽을 것이다. 다행히 위의 후라이 사건 이후의 일이었다.



엄마가 아픈 동생을 급하게 병원으로 데려가느라 나 혼자 집에 남아 있었다. 아빠가 퇴근하여 집에 오기까지 길지는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천둥이 쳤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집에 남은 것이 무서웠는지 귀에서 천둥 소리가 들렸던 기억이 남아있다.



집에 도착한 아빠는 밝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엄마랑 동생도 없는데 우리 라면 끓여 먹을까?”



미취학 어린이에게 라면은 어쩌다 먹는 특식이었다. 당연히 찬성!

그래서 아빠는 못하는 요리 실력으로 라면을 끓였다.


결과는 처참했다.



나는 라면 파마가 칼국수처럼 매끈하게 풀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물을 많이 넣어 국물이 한강이었다. 한솥 푹하게 삶아낸 라면‘같은 어떤 것’을 그릇에 나눠 담고, 아빠와 눈이 마주쳤을 때 ‘이거 먹어도 되겠지?’ 라는 생각을 했다.



역시나 맛은 이상했다. 그런데도 행복했다. 요리 못하는 아빠가 나를 위해 라면을 끓여 준 것이 감동이었다. 망한 라면을 먹을만하다면서 깔깔 웃는 그 시간이 얼마나 재밌었는지 모른다. 아빠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귀에 치는 천둥보다 파마 풀린 라면이 더 강렬하게 추억으로 자리잡았다.



쿠키도 레시피 확정 전에 몇 번이나 망한 쿠키가 탄생했다. 먹을만하다 아니다로 분류되기보다는, ‘이게 뭐야’라는 반응이 나올만한 애매한 맛의 쿠키들이었다.





"아이고 이거 망했다."



딸기의 흔적이라곤 맛도 색깔도 시공간의 틈으로 사라진 쿠키를 보고 엄마가 탄식했다. 반죽이 정육점에서 갈아 온 돼지고기 같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하는데. 의도치 않게 찐득하고 애매한 맛의 딸기쿠키가 탄생한 현장의 기록이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함을 깨닫고 일찌감치 접어놓은 메뉴다.



이러한 시간이 전부 즐거웠다. “이거 사실 망한 쿠키야.”라며 친구들에게 나눠 주기도 하고, 우리끼리도 맛이 이상하다면서 깔깔거리며 먹기도 했다. 망한 쿠키가 취향인 지인도 있었다. 엄마 친구 한 분은 잘못 구워서 퍼진 로투스 쿠키를 드셔 보시더니 이렇게 망한 거 더 없냐면서 망한 쿠키를 따로 찾으시기도 했다.



원래 남 망한 이야기가 제일 재밌다. 엄마와 나는 과거의 우리를 남처렁 생각하며 재밌어하고 있다. 고생한 기억이 추억에 더 진하게 자리잡는 법이고, 망했기 때문에 추억으로 남는 것이니 사실은 먹을만했다고 미화되기도 한다. 딸기쿠키가 상큼하고 쫀득했으며, 의도치 않게 비행접시가 된 쿠키는 누군가의 취향이니 나름의 맛이 있던 것이라고.



지금도 후라이를 먹을 때, 라면을 끓일 때, 쿠키 신메뉴를 고민할 때 망한 일화를 즐겁게 추억하곤 한다. 망한 요리가 음식 대신 남겨 준 나의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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