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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울 Jan 26. 2021

다시 그리기

 그림을 전공한 아빠는 내게 참 멋진 존재였다. 당시만 해도 미술을 공부하려는 학생은 드물었고 금수저의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아닌 아빠였기에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도망가서 대학에 지원해야 하는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언제나 아빠의 젊은 시절 영웅스러운 면모를 사랑했다. 나 또한 내가 사랑하는 일에 언젠가 투신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아빠와 닮은 성격을 지닌 나는 야망이 있었고 나 자신에 언제나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럴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의 차이점이 있었다. 나는 금수저는 아니지만 아빠처럼 흙수저도 아니었기에 모험을 즐기지 않았다. 아니 모험할 이유도 없었다. 꿈이 아니어도 먹고살 수 있었다.

 중학생 때 미술학원을 간 기억이 난다. 아빠가 아는 지인의 화실이었다. 그 선생님은 예술가 스타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한 달 동안 나무 하나만 그리는 그 선생님의 가르치는 방법에 질려버렸다. 나는 무언가 알려주길 바랬다. 그러나 그 예술가 선생님은 나무도 나무답지 않게 그리는 창의성을 가르치고 싶었는지 초록색인 나무를 자꾸 다른 색으로 표현하길 바랬다. 그 선생님의 방식은 초심자인 나에게 전혀 맞지 않았는지, 내게는 창의성이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길로 나는 미술을 내 영역에서 제외시켰다. 기회가 있었던 것은 외국에서였다. 내게 아빠와 같은 모험은 바로 유학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이 정말 맞지 않았다. 나는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모범생의 옷을 입고 그런 척했다. 내성적이지만 속마음에는 커다란 야망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존재는 작고 내가 가진 것은 초라했다. 먼저 영어연수를 핑계로 영국에 가서 영어공부는 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당시 새벽 5시에 은행을 청소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달려가 후버를 돌렸던 기억이 있다. 당시 20살이었으니 지금보다 용감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꿈이 있었다. 그 지역의 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고 나중에 내가 정말 동경하는 대학으로 옮겨갈 생각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그림 몇 장 그려서 입학 신청을 하러 간 기억이 난다. 물고기를 그렸었나. 지금 생각하면 그 유치한 그림을 보고 입학 여부를 결정해달라는 꼬마 아이를 보고 얼마나 황당했을까. 하지만 조건부 입학으로 승낙을 받았으니,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그 원대한 모험은 포기되었다. 나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설득당했기 때문이다. 지친 몸과 외로움은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집으로 잠시 휴식차 왔을 때 나는 다시 돌아가서 아침에 후버를 돌릴 자신이 없었다. 매일 바게트 하나로 하루를 채울 자신이 없었다. 두려움과 외로움이 모험심 강했던 한 소녀가 꾸었던 꿈은 잠식해버렸다.



 그 후 나는 현실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다. 악착같이 공부했고 장학금을 타고, 토익을 거의 만점 받다시피 하며 졸업을 하고 원하는 대학원에 가서 취직도 했다. 의미 있는 일도 찾았다. 나중에는 영어를 가르치는 일로 전향했지만, 어린이들, 학생들을 대하는 일은 나와 잘 맞았다.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선의를 지닌 인생도 맘에 들었다.

 그러나 내가 다시 그림을 그리겠다고 생각한 것은 왜일까? 내게 그림은, 갈망의 대상이었다. 사실 내가 가고 싶은 과는 일러스트레이션이었다. 글과 그림, 내 생각을 전하는 그림, 그리고 그에 알맞은 문장. 표현을 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 나로서 가장 맞는 과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사촌동생이 내가 가고 싶은 대학, 바로 그 과에서 수학하고 있으니... 나로서는 힘 빠지는 일이기도 하다.

 부러워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나의 자아를 다시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중 하나는 꿈이었다. 나는 아이 보고 꿈꾸라고 하고 있지만, 그 꿈을 이루기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즐겁게 하기를 바라면서 정작 나는 현실에 순응해서 죽기 전에 후회한 다발 남길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면 얼마나 슬플까?

"엄마도 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삶도 행복해!"

우리 엄마가 30년도 전에 어린 우리들을 앉혀놓고 말씀하신 바로 그 내용과 일치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한번 해보고 싶었다. 엄마의 삶도 존중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니라는 것, 그것이 나에게 작은 죄책감을 안겨다 주는 시간이 지속되었지만 나는 엄마와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생각에서도 조금은 해방될 수 있었다.






 내게 아이패드를 사준 사람도 엄마였다. 엄마는 내가 좋은 엄마가 되기를 바라면서도 그리고 엄마가 못 이룬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람이었다. 한참 아이 키우느라 힘들 때 내게 엄마가 아이패드를 사주셨다.

"이거 네가 원하는 거지? 이걸로 하고 싶은 거 해봐. 글을 쓰던지, 그림을 그리던지 말이야. 인생이 백세시대라는데 지금부터라도 네가 원하는 거 해봐."

아이가 잠들 때만을 기다려서 나는 아이패드로 그림 그리는 연습을 하고, 그리고 일 년쯤 지났을 때는 글도 적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기쁨도 알았다. 그리고 조금 더 도전하는 삶을 살고 싶어 졌다.

그림 수업을 신청했다.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사진을 골라 그림을 그려보는 일이 썩 재미있었다. 이제는 나무만을 그리지 않아도 된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 관심 있는 것만 그려도 되니 정말 창의적인 그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내 인생이 망쳤다는 생각, 내 인생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고 나는 이렇게 이번 생은 망했다는 생각을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자신의 꿈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질투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말한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이번 생은 정말 망했다고 말하고 싶니?'

'아니'

솔직한 대답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길 원치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포기한 것은 유학이지 그림이 아니다. 다시 그 나이가 되어 유학을 갈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그림도, 글도 시작할 수 있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언제나 나를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비겁한 나 자신인 것이다.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내가 그리고 싶은 이미지들을 찾아보는 일은 설렌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만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싫어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싫어하는 일은 최소한으로,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은 최대한으로 하면서 살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그 정도는 내게 내 삶에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아이패드를 꺼내면서 밑그림을 그려본다.


"오 생각보다 소질 있는데?"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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