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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울 Feb 19. 2021

프로 여행러에서 사진 여행자

우리 같이 여행 갈래?

사진 여행의 발단

어제 아빠가 사진을 좀 찾아달라고 전화가 오셨다. 클라우드에 저장된 사진들을 뒤져보는데 사진을 볼 때마다 한 사진, 한 사진에 한참을 머무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아빠의 부탁마저 잊고 나는 사진을 보면서 '아..' 하는 탄식을 쏟아내고 있었다. 결국 아빠가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얘! 찾았다. 찾지 마라." 평소 같으면 아빠랑 소소한 이야기들을 했을 법한데 내 정신은 온통 사진에 쏠려있었다. 단답으로 전화를 받고 나는 계속 핸드폰 속 사진들을 길잡이로 여행을 떠날 채비를 했다.


프로 여행러의 기억

나는 기질적으로 여행을 좋아했다. 다소 내성적이고 두려움도 있는 반면 혼자서건 둘이서건 떠나는 여행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여행을 가서 특별히 뭔가 엄청난 것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쉬기'를 위해도 아니고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기 위한 것도 아니고, '나를 알기 위해서'와 같은 철학적 이유는 더더욱 아니었다. 여행을 떠나면 '무언가' 색다른 것이 있을 거란 기대, 그리고 매일매일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무제한 걷기,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기, 무거운 여행책, 카메라, 옷, 여권 등을 포함한 소중한 가방 무게를 하루 종일 견디는 것)을 하다 보면 하루에 건질만한 게 몇 개는 있었다. 그것은 명소의 발견이건, 작품의 발견이건 혹은 사람의 발견이건 간에 특별했다. 대게 가난한 여행자였던 나는 늘 싼 숙소, 싼 레스토랑, 무료로 볼 수 있는 박물관 등에 머물렀다. 그러나 참 좋았다. 모든 순간들이 말이다. 그저 내가 여행자라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나는 정말 여행을 사랑하는 자였다.





스페인보다 세탁기


나의 눈길이 머물렀던 사진은 5년 전의 사진 속 스페인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뒤로한 나의 모습이다. 이 여행이 더욱 애틋한 것은 아마도 이런 여행을 당분간은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리라. 당시 중학교에서 근무하던 나는 방학기간 동안 스페인 여행을 오랫동안 계획하고 있었다. 2주간의 스페인 여행을 위해서는 아껴도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고민도 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여행을 간 것이 참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 후 5년간 혼자 2주간 여행은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지나가더라도 아이가 클 때까지 내가 혼자서 해외여행이 아닌 국내여행이라도 떠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점점 현실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돈이면 얼마야? 이 돈이면 세탁기를 바꾸겠네.."와 같은... 여행을 떠나 행복한 발견에 쓰는 돈보다 지금 나의 불편을 덜어줄 신상 세탁기가 더 탐이 나는 현실주의자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나의 모습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꿈은 이탈리아에서부터

그러나 내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원 없이 여행을 다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20대에는 돈을 모으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내가 사는 책의 절반은 경제공부, 재테크, 부자 되는 법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왜 돈을 모으는지에 대한 이유가 명확하다. 27살 첫 직장을 다니던 중 짧은 휴가를 이리 붙이고 저리 붙여서 일주일간 이탈리아로 떠났다. 오직 이탈리아만 기차로 돌아보고 왔는데 모든 곳이 아름다웠다. 특히 기차에서 내려 바라본 베니스는 내게 꿈의 도시였다. 도시를 흐르는 물을 따라 곤돌라가 떠다니고 저녁 무렵 카디건을 걸치고 산책을 하다 보면 꼭 중세시대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배경도 그렇거니와 거리 곳곳에서 바이올린 하나로 버스킹을 하고 있는 멋진 음악가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진지했고 나는 예술과 어우러진 삶을 사는 듯한 그들이 너무나 부럽기만 했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시는 연인을 보며 어찌나 부러웠던지... 나도 언젠가 이 곳에 다시 와서 저 멋진 레스토랑 창가 자리에서 와인을 마시며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리라. 나의 꿈은 거기서부터 생겼다. 베네치아에 자리한 소담한 집을 한 채 사서 그곳에서 글도 쓰고 여행도 하고 가족들도 초대하는, 그리고 아침에는 자전거를 타고 갓 구워진 빵을 사러 가리라. 돌아오는 길에는 2.6유로짜리 카푸치노를 사서 한 모금 마시리라. 나는 그런 생활을 하리라.



나는 지금 일상을 여행 중인 거야


정말 그렇다. 나는 50대쯤에는 꼭 이탈리아가 아니더라도 내 마음의 주파수를 울리는 그런 곳에서 얼마간 머무를 공간을 찾고 싶다. 그곳에서 일상은 크게 다르지 않겠지. 나는 서점에 들를 테고, 책을 읽을 테고, 글을 쓸 테고, 친구와 수다를 떨 것이다. 나의 가족은 자신만의 여행을 즐길 것이고, 나는 나의 시간을 오롯이 즐길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길 가에서 들리는 선율을 따라 걷다가 적당한 레스토랑을 찾아 와인 한잔과 함께 식사를 즐길 것이다. 상상만 해도 기분 좋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어쩌면 지금 나의 시간을 현명하게 쓸 수 있는 신상 세탁기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사진 여행을 하고 돌아온 곳은 내 방 작은 서재이다. 곧 아이가 돌아올 시간이라 내 마음이 바빠졌다. 국은 끓였나? 음식물 쓰레기는 버렸나? 집을 한번 둘러본다. 어쩌면 나는 지금도 여행 중인지 모른다. 매일이 같고, 어쩌면 너무 지루하고 어쩌면 너무 바쁜 이 일상이라는 곳을 나는 여행 중인지도 모른다. 이 하루하루에도 언제나 작은 발견은 가득하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아이가 나에게 '엄마, 너무 예뻐요.'라고 말해줄 때, 보고픈 친구가 보내온 손편지를 읽어 내려갈 때, 마스크를 벗고 오랜만에 가족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때, 내가 끓인 된장찌개가 모처럼 맛이 날 때, 아이가 아빠와 씨름을 할 때 나는 매일 고마움에 몸서리친다. 길고 길었던 여행자의 방랑을 해 보았기 때문일까? 지금의 '엄마'로서의 여행을 나는 또 얼마나 그리워하며 사진여행을 할지, 눈에 선하다. 나는 늘 떠나보내고 소중함을 깨닫는 바보 중의 바보기 때문이다.




우리 함께 여행 가자.
이 말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여행은 대상이 누구 건 간에 사랑하기 위해 떠나는 것 같다. 어쩌면 지금 내가 발견한 사랑이 있어서 나는 여행이 고프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언젠가는 아이와, 남편과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 그곳에서 우리 더 사랑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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