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동네, 길고 긴 길목에는 벚꽃이 봄을 알려주는 신호등이었다.
겨우내 철저히 땅속에 감추어둔 작은 희망들.
희망이 작은 봉우리가 되어, 가지 위로 머리를 내밀더니,
인간의 발걸음이 무수히 지나가는 동안에
글쎄, 알알이 익어 터져버렸다.
한 잎 한 잎 드러나는 너의 정체.
세상에 수줍어도 당당히 피어내는
네 운명을 선언하듯
한 잎 두 잎 다소곳이 자리를 찾아낸다.
책가방을 매고 길을 걷다 하늘을 올려보면
하늘을 잔잔하게 물들인 여리고 여린 분홍빛 물결들
우리 동네 벚꽃 축제는
열 살 소녀의 마음을 홀딱 훔쳐가 버렸다.
단짝과 걷던 길목에서 잠깐 멈추어
하염없이 벚꽃의 향연을 바라보다가
짝사랑하던 아이의 해맑은 얼굴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제 나의 아이의 작고 통통한 손을 잡고서
그 긴 세월을 버티고 어김없이 봄의 계절을
당당히 알리는 내 오랜 친구 앞에서
나는 그때 그 소녀처럼 숙연해진다.
사랑하는 아이야
며칠이 지나면 이제 이 아름다운 꽃들은 지고 만단다.
그러니 눈에 가득 담아두렴.
미련 없이 떨어져서 무수히 많은 발걸음 아래 놓일
운명에도 연연해하지 않는
봄의 여신들을 기억하렴.
얼마 뒤면 높은 아파트들이 들어선다는 소식에
더 아름답게 자신들을 피어내는,
우리 동네 벚꽃길의 전설은
너와 나만 아는 비밀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