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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Aug 12. 2022

Work #4

남들이 말릴 때, 잠깐 멈출 수 있어야 한다.

기업 연수원에서 일하면 다양한 방식으로 부지런한 사람들을 만난다. 교육을 들으면서 쉬는 시간에 회사나 거래처와 통화하러 쉬지 못하는 사람, 교육 전후로 업무용 노트북을 켜놓고 한참 일하는 사람, 아침 일찍 혹은 늦은 저녁에 운동하는 사람, 밤새 교육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람 등이다.


지금 ‘나는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야.’ 라고 생각했다면, 그렇지 않다. 가까이에서 관찰해보니 본인 안에서 부지런함이 샘솟는 사람들은 드물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유독 많은 교육과정이 있는데, 그 과정은 대부분 팀장님들 이상의 리더십 과정인 경우가 많다. 그 사람들을 보며 부지런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 진리임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면 리더가 되면서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리더가 아닌 분들 중에서도 부지런한 분들이 있다. 교육과 일, 자기관리(산책하시면서 중국어 통화하시는 분도 있었다.)까지 해내시는 분들을 마주할 때, 가끔 걱정하는 마음과 일에서 잠깐 즐거움을 찾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웃으며 여쭤보았다. “일이 많으세요?” 대부분 “아니에요. 제가 일을 못해서 지금까지 붙잡고 있는 거죠.” 하셨다. 그 말에 겸손의 미덕이 담긴 건 알았지만, 더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까지 미처 하지 못했다. 막상 내가 교육 참여자로 같은 질문을 받고, 같은 답을 하고 나서야 그 대답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신입사원 입문과정에서 세 가지 기획팀이 있었다. 동기모여라팀, 브이로그팀, 뉴스레터팀이다. 동기모여라팀은 “동기 모여라” 활동시간 게임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레크리에이션 팀이다.  브이로그팀은 진행되는 과정을 촬영해서 영상을 만들었다. 유사하게, 뉴스레터팀은 과정 이야기, 인터뷰 등을 담은 뉴스레터를 제작하고 발송했다.


뉴스레터팀의 일정은 일주일 단위로 잡을 수 있다. 발송일 기준 일주일 전에, 다같이 모여서 콘텐츠 주제를 논의한다. 교육과정도 중요하지만, 신입사원인 우리들의 이야기가 재밌게 담길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나왔다. 연수원에서 생활하는 꿀팁, 연수원에 올 때 싸온 짐 비교 등 신선한 콘텐츠는 모두 이 회의에서 나왔다. 회의 말미에 각자 어떤 콘텐츠를 하고 싶은지 결정한다. 그 뒤 2-3일에 걸쳐 서베이를 돌리고, 카드뉴스를 만들고, 글을 썼다.


동기들에게 가장 놀란 순간은 각자의 결과물이 모일 때였다. 글 쓰고 콘텐츠를 만드는 일과 본인의 업무가 거리가 멀어보였다. 멤버들 중에는 뉴스레터를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뉴스레터 톤앤매너로 콘텐츠를 잘 만들 수 있을지, 우리의 결과물이 하나의 페이지에 조화롭게 올라갈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예측은 깨지라고 있는 것처럼, 동기들이 하나둘씩 보내준 콘텐츠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편안한 구어체로 나한테 말을 거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신입사원의 톡톡 튀는 발상과 언어, 그리고 회사를 존중하고 동기들을 챙기는 마음까지 보였다. 결과물을 받은 다음날, 동기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글을 잘 써요?”


뉴스레터팀을 비롯한 모든 기획팀은 항상 바빴다. 교육을 듣고, 업무도 가끔 하고, 기획단 일도 하다보면 다들 잠은 언제 자나 싶을 정도였다. 밤 늦게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로, 컴퓨터와 씨름을 하고 있거나 진지한 얼굴로 모여 있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였다. 팀 프로젝트를 하고 있거나, 기획단 일을 하고 있거나. (대부분 업무 하는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인 강당 벽면에 붙어있거나, 다른 방에서 같은 회사 사람들끼리 모여서 하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혹은 기획단 일에 너무 몰입하다보면 마감 포인트를 찾기가 힘들다. 그때 특효약은 본인이 “이제 그만하자!” 하거나 옆에서 보던 사람이 “이제 그만해!” 하는 것뿐이다. 사실 전자는 더 힘들다. 몰입하고 있을 때 스스로 ‘아, 이거면 충분해.’ 생각이 잘 안 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결과물이 다 나오고, 여러 사람에게 보내진 이후에도 ‘아직 더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으면 모를까.


주변에서 “그만해! 그만하면 됐어!” 라고 하면 무슨 생각이 들까? ‘왜 말리고 난리람?’ 이런 생각은 안 든다. 오히려 작은 의심이 뇌리를 가볍게 스친다. ‘지금 오버페이스인가?’ 하는 생각이다. 몰입은 한 가지 생각만 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런 작은 의심 혹은 순간순간의 확인조차 스스로는 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 의심을 무시해서 정도가 더 심해지면 나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무리가 올 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그만해!” 할 때 ‘그래, 나 열심히 했어. 이제 좀 쉴 때야.’ 라는 여유를 가질 줄 아는 것이다.




입사 후 처음 맡은 장기 과정은 리더 과정이었다. 당시 팀장 후보자 교육도 같이 하고 있을 때라, 연수원을 뛰어다닐 정도로 업무 속도를 조절하기 어려웠다. (오죽하면 선배들이 캥거루가 뛰어가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 리더 과정이 끝나갈 무렵, 회식 자리에서 많은 선배 분들이 말씀하셨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예쁘지만, 일에 100%를 쏟아붓지 말라고.


처음에는 어리둥절 그 자체였다. 일에 최선을, 어쩌면 200%를 쏟는 게 미덕 아닌가? 심지어 고교 시절 수능을 준비하던 때 “남들이 말릴 정도는 해야 열심히 한 거지.” 아침 8시에 자습실 문을 열고, 밤 10시에 자습실 소등하고 문을 잠그고 나오는 생활을 하면서도 아무도 “이제 그만해!” 라고 말리지 않았다. 100%는 커녕, 200%를 해도 잘될까 말까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입시 원서를 낼 때쯤 조용히 쌓이던 스트레스가 터졌다. 자기소개서가 너무 안 써졌고, 200%를 해도 부족하다고 처음 느꼈다. 한계에 부딪혔는데 넘어설 방도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날 학교생활 12년 중 처음으로 선생님 앞에서 엉엉 울었다. 잘 모르겠다고, 잘하고 싶은데 잘 안 된다고. 노력해도 안 된다는 걸 직면한 순간, 느껴지는 막막함은 진짜 압도적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부모님은 말씀하셨다, “그만해. 일단 나중에 방법을 생각해보자.” 우리 부모님은 학교에서 내가 뭘 하는지, 성적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셨다. 그런데도 방법을 찾겠다는 일념 하에 자기소개서를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내가 쓴 자기소개서를 보여드렸고, 그때 누가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는 방법을 천천히 배우기 시작했다.


100%를 쏟아붓지 말라는 건 열심히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여유를 남겨둬야 갑작스럽게 터지는 일도 살펴볼 수 있고, 지쳐가는 나를 가끔은 살필 수도 있다. 100%를 하지 말라는 건 결국 일만 챙기는 게 아니라 ‘일하는 나’를 챙기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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