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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May 13. 2022

Work #2

알려주며 살기

자타공인 발표를 잘하는 사람이다. 친구들은 대학 시절 내가 발표로 호되게 혼났다는 이야기에 매우 놀랄 정도였다. 도대체 무엇으로 혼이 났는지, 그 이유조차 가늠하기 어려워했다. 3-4년이 지난 지금 그날을 돌아보면 새삼 먼 일 같다. 그때 혼나느라 교실 앞에 혼자 서서 보낸 10-15분은 지나가지 않았는데.


신입생인지, 저학년이었다. 쑥스럽지만 영어를 전공했기에 영어로 발표를 준비했다. 동기들과 선배들까지 있던 날이었고, 발표 첫날이었다. 찬반토의를 위한 발제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낯설고 새로운 발표인 탓에 보통 pros and cons 라고 쓰는 말을 cons and pros라고 쓸 정도였다. (더 웃긴 건, 단어 순서를 바꾼 이유가 있는지 물어보신 질문에 내 입장이 cons여서라고 답한 것이었다.)


전날 밤까지 붙잡고 있던 발표는 “얼마나 준비했어?” 라는 질문으로 끝났다. 이 발표에는 노력과 시간이 없다고 하셨다. 수업을 같이 듣는 동기와 선배들에게 학교 다닐 때 발표를 안 배우는지를 물으실 정도로, 미숙한 발표였다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그때 한 선배가 우리 교육환경에서 학생의 발제 기회가 거의 없음을 말해주었다. 아직도 그 선배의 용기가 감사할 따름이다.


혼나는 당시는 혼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열심히와 잘하는 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학교에서 영어로 발제나 발표를 10분 이상 해본 건 한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토론의 호스트로서 준비한 발표는 없었다. 발표 해본 경험이 부족했고, 좋은 발표를 본 경험도 드물었다. 최악인 건 서툰 영어 회화 실력으로 교수님께 제대로 내 입장을 설명하지도 못했기에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 책임과 복구 기회는 온전히 내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 수업이 끝나고 동기들이 내게 몰려왔다. 괜찮은지를 물으면서. 무덤덤해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땐 정말 얼떨떨해서 괜찮았다. 서럽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우충충한 날씨를 뚫고 도서관에 영화를 보러 갔다. 그 즈음 열람실이 아무리 좋아도 그렇게 멀티실에 갔다. 혼자 창밖과 영화를 보는 시간이 좋았다. 그날은 회색빛 기분을 나아지게 하러 갔다.


표지가 예뻐서 고른 영화가 발표 공포증이 생길 뻔한 그날을 아름답게 마무리지어줬다. 영화는 ‘나의 서른에게’였다. 각자의 역경을 목전에 두고, 삶을 달리 보게 되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뭘 해도 나아지지 않는 기분이 드는 날에, 한 번 보기를 권한다.) 그 영화를 보고 나오며 지금 상황이 어찌됐든 간에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하고 멀티실에 회색 기분을 두고 나왔다.


놀랍게도 그 다음 수업에 당신께서 그날 말이 심했다며 사과하셨다. 당신의 말씀이 전부 사실이라고 생각했고, 그날의 무서운 이미지가 당신이 사과하실 거라는 생각을 못하게 했다. 거짓말 같이 진심으로 사과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의 서른에게’ 주인공처럼 새로운 기회를 얻는 듯 했다. (그녀의 솔직한 고백에 박수를 보내며, 본받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그 뒤로 발표할 시간은 계속 이어졌고, 차츰 발표 달인이 되어갔다. 발표자료뿐 아니라 말하기 또한 자꾸 하니까 늘 수밖에 없었다. 특히, 스크립트를 그대로 외우기 힘들어서 발표자료를 만들며 계속 발표 연습을 소리내어 한 덕분에 말하듯 한 발표를 하는 편이다. 그때그때 상황을 녹여내며 발표할 수 있게 된 이후로 발표 긴장감이 현격히 낮아졌다. 그제서야 발표를 잘한다는 칭찬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최근 발표자료를 봐달라는 말을 들었다. 뿌듯한 마음과 함께, 잘 도와서 그가 훌륭한 발표를 해냈으면 했다. 나보다 어렸던 그는 팀 프로젝트가 낯설었고, 발표 자료 제작을 맡은 건 더 새로워했다. 그가 정리한 발표 내용을 다듬고 시각화했다. 아주 간단히 시작해서 그가 다음에 바로 적용해볼 수 있도록 유도했다. 실제로 그가 차츰 스스로 발표자료에서 더 업데이트할 지점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의 발표는 성공적이었다. 교수님은 그의 첫 발표에 잘한다는 칭찬을 하셨다고 한다. 그 칭찬이 그에게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나 늘리는 계기가 되어 그의 다음 시도를 자극하길 바란다.


그가 부러웠다. 나의 처음은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도와달라고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탓도 있었지만, 첫째로 나고 자라면서 뭐든 혼자 알아보고 해내야했다. 발표, 장학금, 서류처리 등을 해결하기 위해 누군한테 물어봐야 하는지를 알아내는 것부터 했다. 그때는 손윗사람이 없다는 게 약점 아닌 약점 같았다.


지금은 그덕에 새로운 시도가 두렵지 않다. 일을 해결하는 방법은 어떻게든 있고, 막상 부딪혀보면 사실은 별 거 아닌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시도를 해낸 다음 내 뒤를 이어오는 사람들에게 알려주면서 느끼는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 어깨 위에 올라서 한 걸음 더 멀리 바라보는 그들 덕분에 또 그 다음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더 멀리 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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