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가 본 드라마, 〖레이디 두아〗

by 보라

(이 게시물은 드라마 〖레이디 두아〗의 상세한 내용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혜선 이름이 뭐야?”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 『죄와 벌』의 등장인물이 너무 많은 건 유명하다. 심지어 책 옆에 인물 관계도를 같이 볼 정도다. 누가 누군지를 알아야, 그 기나긴 서사에서 촘촘하게 이어지는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레이디 두아의 주인공은 실존하는 한 명의 사람이다. 하지만 이름이 여럿이다. 목가희, 김은재, 사라 킴, 두아, 김미정, 2389. 이 모든 이름이 한 인물을 가리킨다. 어쩌면 이 이름보다도 더 많은 이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름의 개수만큼이나 여러 삶을 살았다. 드라마 전체의 서사에서 사건이 촘촘하게 이어지다 못해, 얽히고 설켜서 알아보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무엇이 ‘사실’일까?”

데이터, 통계, 연구 결과가 ‘진실’인 건 아니다. 진실은 오로지 신만이 안다. 통계, 데이터, 수학, 이 모든 노력은 그저 거대한 진실의 한 부분을 포착할 뿐이다. 만일 그 전체가 코끼리라고 했을 때, 우리가 포착한 부분은 코끼리의 머리일 수도, 다리일 수도, 눈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데이터, 통계, 연구 결과도 ‘이것이 코끼리의 다리다.’라고, 즉 우리가 포착한 부분이 어딘지 알려주지 못한다. 어쩌면 그 결과는 편향됐을 수도, 전체를 알기에는 역부족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너무나 쉽게 뉴스, 논문, 책을 믿는다.

명품, 가격을 생각해보자. 그것이 좋음, 아름다움, 미덕 등 어떤 전체의 ‘진실’은 아니다. 그저 ‘좋다’, ‘아름답다’, ‘대체 불가능하다’ 등의 선언으로 포착된 것이다. 그런데도 너무나 쉽게 그것들에 비해 내 노력 혹은 시간이 경시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나는 아직 1인분만큼의 일도 해내지 못해. 그런데 저 명품은 오랜 시간 인정 받은 브랜드에서 숙련된 전문가들이 만들었어. 나는 저런 걸 언제 들어보나.’, ‘나는 10년 동안 숨만 쉬어도 저걸 못 가질텐데. 저 사람들은 저걸 가질 만해.’

어쩌면 목가희에서 김은재로, 김은재에서 사라 킴으로, 사라 킴에서 김미정으로, 김미정에서 2389로, 다른 인물이 될 때마다 그녀가 좇는 ‘사실’도 달라지는 듯 하다. 우울, 기회, 사업. 그러면서 사실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무엇이 명품인가? 무엇이 진짜인가? 무엇이 가짜인가?


“그럼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자산을 묻는 문항 중 ‘가상화폐’가 생겼다. 여러 설문조사 질문지를 봤지만, 이런 문항은 서울청년패널조사에서 처음 봤다. 마치 주식처럼 시시각각 그 가치가 오르락 내리락 변하는데 이 항목을 확인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처음엔 놀랐고, 점차 웃음이 나왔다. 그것도 잠시였다. 설문지를 덮어두고 운전하고 집에 가는 길에 든 생각이 아주 무거웠다. 우리나라 환율도 시시각각 변한다. 물론 가상화폐만큼 빠르게 변하는 건 아니다. 한편, 더 넓게 보면 돈, 시간, 나이, 언어 등 변하지 않는 것이 있나? 이 모든 게 ‘순간’을 포착하는 셈 아닐까.

이 드라마는 무명녀의 죽음으로 시작해, 무적자 두 명의 혼선으로 끝난다. 끝까지 경찰은 신원을 확인하려 하고, 그러기 위한 흔적들(예. 구강상피세포, 지문, 조직 샘플, 인간관계 등)을 찾아 헤맨다. 핵심은 찾는다는 게 아니라, ‘헤맨다’는 것이다.


“진짜와 구별할 수 없는데 가짜라고 볼 수 있나요.”


두 명의 무적자는 서로에게 의지했고, 서로를 믿었고, 서로를 이용했다. 둘의 관계가 너무나도 끈끈하고, 둘의 겉모습뿐 아니라 내면까지 지독하게 닮았다.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는 둘만이 안다. 그런 와중에 한 명이 죽었다. 그렇다면 남은 한 명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잠깐, 근데 이건 뭐야?”

극중 거대 사채업자는 딱 한 번 사채업자이기를 포기했다고 고백했다. 자신을 고생시킨 친구에게 그의 일평생을 넘어 그의 자손도 못 갚을 돈을 빌려줬다. 그 친구의 아들이 아버지의 선산에서 귀한 나무를 뽑아왔다. 그게 5억 상당이었다. 빚에 비하면 한참 못 되는 금액이었지만, 그는 그 나무에 모든 빚을 탕감했다. 그의 서사가 진행되는 걸 보며, 그의 감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보다 잔인하고 매서운 그의 의사결정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그의 고백에 주인공(여기서는 ‘김은재’라고 부르자)은 자신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거액을 빌려줄 것이라고 하고 실제로는 빌려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희망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그 희망이 없어지는 편이 돈 한 푼 쓰지 않고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사채업자와 김은재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사업가인가 사기꾼인가. 돈을 버는 전략이 뛰어난 걸까, 알기 어려운 로직으로 사람을 옭아매는 걸까.

그 이후 그는 또 한 번 더 사채업자이기를 포기했다. 김은재는 신장 이식이 필요했던 사채업자에게 흔쾌히 신장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보상인 5억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그에게 신장을 이식하기 위한 법적 절차의 일환으로 신분을 완벽히 세탁했다. 술집에서 일하던 ‘두아’에서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김은재’가 됐다. 그런데 사채업자 수술 직전에 김은재는 도망갔다. 그녀가 도망친 사람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결국 잡혔다. 그런데 사채업자가 김은재를 죽이지 않고 돌려보내라는 결정을 내린다. 김은재가 그저 ‘희망을 주고 막상 그 희망을 빼앗는’ 선택을 한 것임을 알았는데도 말이다. 이건 명백한 배신이었다.

더 의아한 건 그녀가 자유가 됐음에도 결국 사채업자에게 신장을 이식했다는 점이다. 사채업자이기를 포기하는 이와 배신을 포기하는 배신자는 뭘까? 왜 그런 선택을 한 걸까?


“‘아는 것’과 ‘알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 논리적이지 않은 의사결정. 몸에 남은 상흔. 현장에 남은 흔적들. 이 모든 건 ‘한 개인에게서 나오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개개인만큼이나 다양하다. 같은 상황과 조건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은 A라고, 다른 사람은 B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는 각기 다른 감정, 의사결정, 흔적 등을 남긴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인지 여부를 판단할 때는 ‘그 사람에게 이런 일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가?’보다는 ‘우리 대다수는, 혹은 권위자는, 어떤 것이 사실이라고 하는가?’를 근거로 삼는다.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사실은 무언가, 특히 권위자에 의해 규명된다. 사실은 각각의 사건을 설명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체를 연결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반면에 이야기는 무언가에 의해 규정된다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만든 것(언어, 돈, 시간 등)에 의해 직관적으로 설명되거나, 논리적으로 해석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만이 복잡다단한 사건을 연결할 수 있다.

여기까지의 생각을 모으니, 최근에 읽은 책의 한 문장이 〖레이디 두아〗의 마지막 장면과 오버랩된다.


우리는 세상을 보이는 대로 보는 게 아니라, 보려고 하는 대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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