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봄
사람들이 두터운 외투를 옷장 깊숙한 곳에 차곡차곡 정리한다. 겨울잠 자던 개구리와 뱀은 깊숙한 동굴에서 나와 산과 들로 나서고, 앙상하던 나무들도 따스한 봄기운에 서서히 저마다의 새로운 옷을 입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어두컴컴하고도 적막한 현관에서 잿빛 구두를 벗었다. 새내기 대학생인 아들은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고, 한창 사춘기인 고등학생 딸은 봄옷을 산다며 친구들과 쇼핑하러 나갔다. 아버지는 집 안의 모든 전등을 밝혀 공허한 마음을 달래려 했지만 불빛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아직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집엔 겨울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버지는 한동안 봄이 온 걸 몰랐다. 때늦은 저녁식사 시간에 된장찌개 한 숟갈 푹 뜨며 본 TV 화면 속 벚꽃들을 봤을 때서야 아버지도 봄이 왔음 알게 되었다. 허나, 벚꽃을 볼 수 있어 행복하다는 젊은 남녀의 인터뷰를 들어도 해마다 당연하게 찾아오는 봄이 대수냐는 아버지의 생각은 변치 않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돈도 많아’, ‘저런데 가면 다 돈이야’. 아버지에게도 찾아온 이번 봄 역시 아버지 당신에게 별 다를 것 없는 시간의 흐름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회사 동료가 보내온 게임 메시지였다. 해도 채 뜨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에 출근하는 아버지에게 휴대폰 게임은 유일한 취미이자 인생의 낙이었다. 하루 종일 서있어서 다리가 아픈 아버지에게 집에 있는 오래된 소파만큼 세상에서 편한 곳도 없었다. 마치 아버지를 위해 맞춤 제작된 소파인 듯 사계절 내내 아버지와 함께 했다. 아무도 없는 집을 지키고 있던 소파도 하루 종일 외로웠는지 아버지를 자기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공장에 취직을 했다. 봄여름 가을 겨울이 수십 번 바뀌어도 부모와 자식을 위해 자기 자리에서 당신의 일을 할 뿐이었다. 언젠지 모르게 커버린 아이들은 각자의 청춘을 만끽하기 위해 밖으로 또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아버지는 밖에 나가면 다 돈이라며, 집만큼 편한 곳은 없다며 안으로 또 안으로 향했다.
퇴근하는 버스 속에서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은 아버지에게 집과 회사가 아닌 밖으로 향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아버지는 유모차에 앉아 푸푸 거리며 민들레 홀씨를 부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당신의 행복한 날이 언제였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까까머리 학생 시절 진달래 꿀을 쪽쪽 빨아먹던 시절이었을까. 15년 전쯤 아이들과 봄나들이 갔던 때였을까. 아버지의 행복했던 시절은 세상에 꽃향기가 진동할 때였다.
학창 시절, 사진사가 되고 싶었던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그 꿈을 접었지만, 소중한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 만큼은 빼놓지 않았다. 이젠 생계에 바빠 사진을 찍는 여유마저도 사라져 버렸지만 옷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한 권의 사진첩엔 아버지의 청춘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억수로 비가 쏟아져 처마 밑으로 몸을 피했던 그 날, 단풍잎을 모아 책갈피에 꽂아두던 그날, 꽁꽁 언 강 위에 얼음 썰매를 타던 그 날. 그리고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던 그 날. 모든 날들이 아버지에겐 청춘이었다.
조약돌 같던 아이들이 쑥쑥 자라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행복했지만 동시에 세월의 야속함도 느낄 무렵, 회사에서 받은 공로 표창은 아이들에게 봄꽃의 향기를 알려줄 기회였다. 그러면서 아버지 당신도 스치듯 지나가버린 청춘을 잠시나마 느끼고 싶었을 터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꽃구경을 가는 것이 여간 기쁘지는 않았나 보다. 꽃 덤불 앞에선 아이들은 웃고 있는 것인지 찡그린 것인지 모를 애매한 표정을 지은 채로 아버지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오늘도 때늦은 저녁식사를 마친 아버지는 여김 없이 휴대폰을 들었다. 하지만 이내 손에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소파에 뉘어 있던 몸을 일으켜 옷장으로 향했다. 켜켜이 정리해둔 두터운 겨울옷들 사이로 깊숙이 손을 넣었다. 마지막으로 앨범을 들춰본 적이 한 해, 두 해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진 앨범은 아버지의 손길이 닿는 것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던 아버지의 봄은 확실히 거기에 있었고, 아버지는 후-욱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꽃향기가 나는 쪽으로 다시 손을 뻗었다.
15년 전 아이들과 함께 한 어느 한 봄날, 사진 속 아버지는 아이들보다 더 환한 미소로 오늘의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의 봄은 여느 봄과는 달랐다.
by 서동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