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사이어_기독교세계관 요약
기독교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모든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존재론적으로는 '하나님-인간-자연-동물'과 같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다른 세계관들은 존재론에서 '인간-자연-동물' 이나 '인간-정령-자연-동물'이나 '우주-인간-동물'과 같은 존재론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미션ngo에서 일하면서 어떻게 세계관이 구성되어 있는지 찾는 중에 제임스사이어의 고전 '기독교세계관과 현대사상'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를 했다. 세계관은 인식론에 포함되고 이러한 세계관에 따라서 다른 윤리적 삶을 살게 된다. 세계관적 변화에 대한 고민으로 더욱 연구가 필요하다.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제임스 사이어 James Sire
복음주의 변증가이자 사상가 제임스 사이어가 저술한, 20여 만 부가 판매된 기독교 세계관 분야의 고전,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확대개정 제4판. 1980년대에 한국교회에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신드롬을 몰고 온 기독교 세계관 분야의 고전이다.
확대개정 제4판에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다루는 부분이 생성되었으며, 독자들의 물음과 생각을 반영하는 저자의 성찰을 담았다. 아울러 현대사상에 대한 보완 작업을 포함했다.
이 책은 우리의 모든 결정이 어떤 특정한 세계관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의식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관 중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가르쳐주며, 기독교 세계관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세계를 보는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청년들, 특히 신학생들에게 도움을 건넨다.
저자 : 제임스 사이어 : 개혁주의 복음주의의 철학자이자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세계관 관련 전문가로서 미국과 유럽 전역의 캠퍼스를 오가며 강의와 세미나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지성의 제자도」, 「홍길동, 대학에 가다」,「코끼리 이름 짓기」,「비뚤어진 성경 해석」등이 번역되어 있다.
이 책은 첫째, 우리의 모든 결정이 어떤 특정한 세계관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음을 의식하게 해주며, 둘째, 그러한 세계관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선택이 좀더 책임 있는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의 참 가치를 깨닫고, 좀더 일관성 있고 책임 있는 선택을 해야 할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입니다.
- 손봉호, 서울대학교 명예 교수 -
아래 내용은 발췌 및 인용자료입니다~
펌: 블러그 좋은생각 http://blog.daum.net/yourwjkim2/1363?ntyp=tT107N
목차
1. 세계관의 차이
2. 하나님의 장엄으로 가득 찬 우주: 기독교 유신론
3. 시계와 같은 우주: 이신론
4. 유한한 우주의 침묵: 자연주의
5. 영점(零綺): 허무주의
6. 허무주의를 넘어서: 실존주의
7. 동양으로의 여행: 동양 범신론적 일신론
8. 또 하나의 우주: 뉴 에이지
9. 사라진 지평선: 포스트모더니즘
10. 검토된 삶
1. 세계관의 차이
삶의 중심이 상실되어서 생긴 마음의 공간은 아버지를 잃은 어린아이의 마음에 남겨진 깊은 틈과도 같다.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라 해도 이 공허를 메워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다. 우리 자신의 신앙과 우리 자신의 세계관 그리고 실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찾고자 하는 분투, 이것이 바로 본서의 내용이다.
본서의 목적
① 서양인들에게 자신과 타인, 자연계와 하나님, 혹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사고 방식의 기초가 되는 기본적 세계관을 개요하는 것이다.
② 이러한 세계관들이 유신론적 세계관의 붕괴로부터 이신론, 자연주의, 허무주위, 실존주위, 동양의 신비주위. 뉴 에이지라는 새로운 의식등을 거치면서 변천한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해 보는 것이다.
③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러한 세계관들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④ 우리 모두가 세계관의 관점에서 생각하도록 하는 것, 즉 자기의 사고방식을 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서로를 잘 이해하고 더 나아가 상호간에 진실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세계관이란 이야기의 형태로 혹은 실재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일련의 전재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몸담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는 하나의 결단이요 근본적인 마음의 지향이다.
세계관은 하나의 결단이다. 세계관의 본질은 인간 자아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영혼의 문제이고, 마음의 문제이다. 즉 세계관은 각 사람의 조종실에 해당하는 자아속에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마음으로부터 모든 생각과 행위가 나온다.
세계관은 이야기의 형태로 혹은 일련의 전제로 표현되는 것이다. 나와 인류 전체가 어디서 왔는지 혹은 나의 인생이나 인류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 성찰할 때, 나의 세계관은 이야기의 형태로 표현된다. 자연주의는 빅뱅에서 시작하여 우주의 진화, 은하의 형성, 태양과 유성들, 지구에서 생명의 출현, 우주의 쇠퇴에 따른 생명의 소멸 등을 줄거리로 삼는 으뜸 이야기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인은 창조, 차락, 구속, 영화로 구성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중심에는 물론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이 자리잡고 있다. 그들은 자신과 타인의 생애를 이 으뜸 이야기에 속한 자그마한 대목으로 여긴다.
세계관은 옳을 수도 있는 가정들이다. 한 사람의 결단을 표현하는 전제들이 부분적으로 옳거나 완전히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결단한 내용을 의식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우리의 세계관이 때로는 비일관적이기도 하다.
세계관은 우리가 몸담을 수 있는 토대이다. 우리의 세계관은 우리의 언행으로 드러나는 그것이다. 우리의 세계관은 보통 우리의 잠재의식 깊숙이 깔려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애써 오랫동안 성찰하지 않으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어떤 세계관을 명제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 명제는 과연 어떤 것이겠는가? 그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일곱가지 질문에 대한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대답이어야만 할 것이다.
1)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2) 외부의 실재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3) 인간은 무엇인가?
4) 인간이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5)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
6)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7)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다양한 기본적 세계관들에서는 이 외의 다른 문제들도 제기된다. 예를 들면, 이세상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인가, 인간인가, 또는 아무 책임자도 없는가? 사람은 결정된 존재인가? 자유로운 존재인가? 사람만이 가치의 창출자인가? 하나님은 진실로 선하신 분인가?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인가, 비인격적인 신인가? 혹은 신이란 도대체 존재하는가?
이러한 식으로 질문을 퍼부을 때 우리는 멈칫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회피한 채 살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입장을 취하거나 저런 입장을 취하게 된다. 어떤 명백한 세계관을 취하기를 거부하는 것도 결국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이거나 적어도 하나의 철학적 입장이 된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세계관을 검토하며 살든지 검토하지 않고 살든지 할 수밖에 없다.
말로 표현되거나 개념의 형태로 남아 있는 많은 세계관이 존재한다. 어떤 것들은 오래 전에 생겨났고, 또 어떤 것은 최근에야 형성되고 있다. 당신의 세계관은 어떤 것인가?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세계관은 어떤 것인가?
2. 하나님의 장엄으로 가득 찬 우주 : 기독교 유신론
17세기 말까지 서양에서는 분명히 유신론적 세계관이 지배적이었다.그 당시의 지적 논쟁들은 대부분 집안싸움에 불과했다. 도미니크파는 예수회와 예수회는 성공회와, 또 영국 성공회는 장로교등과 서로 다른 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동일한 기본 전제를 갖고 있었다.
- 성경에 계시된 대로 삼위의 인격적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셨고 인간은 그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인간은 그분의 특별한 피조물이다
논쟁이 있었다 해도 유신론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각 세계관은 신 또는 궁극적 실재의 본질과 속성, 우주의 본질, 인간의 본성, 인간 사망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 지식의 근거, 윤리의 기초와 역사의 의미 등 근본적 문제들을 다룬다.
유신론의 경우에는 기본 명제가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1.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삼위의 인격이시며, 초월적이고 내재적이며, 전지하시고, 주권자이시며 선이시다.
2. 하나님은 무에서 우주를 창조하셔서 개방체계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제로 운행하도록 하셨다.
3.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인격, 자기 초월성, 지성,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 등을 지닌다,
4. 인간은 주변 세계와 하나님 그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 안에 심어 주셨으며 능동적으로 인간과 교통하시기 때문이다.
5. 인간은 선하게 창조 되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은 비록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훼손되었다. 한편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구속하시고 선을 회복시키는 과정을 시작하셨다. 물론 인간은 이 구속의 사실을 접하고 그 구속을 거부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다.
6.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과 함께 누리는 생명의 문이든지 인간의 갈망을 궁극적으로 채워 주실 유일하신 분과 영원히 갈라서는 문이든지 둘 중의 하나다.
7. 윤리는 초월적이며, 선(거룩한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다.
8. 역사는 직선적이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켜 가는 의미있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기독교 유신론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한다. 하나님보다 우선하거나 그분과 동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분은 자존자(He Who Is)시다. 그 자존자는 가치있는 속성을 지니고, 또 가치자(The Worthy one)이시기에 윤리의 기초가 되신다. 자존자는 또한 전지자(He 쫴 Knows) 이시기에 인식론의 기초도 되신다. 결국 유신론은 완전한 세계관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대성이 기독교 유신론의 중심교리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근거해서 산다면 이 개념은 그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며 세상에서 매일 부딪치는 기쁨과 슬픔으로 펼쳐진 드라마에서 의미있는 순간들로 되게 하는 반석이요 초월적 준거점이 될 것이다. 또 기독교 유신론을 잘 이해한 자는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믿거나 선포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주된 행동은 하나님을 향한다. 곧 창조주이자 지지자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자요 친구 되신 우주의 주재께 사랑과 순종과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3. 시계와 같은 우주: 이신론
유신론이 그렇게 오랫동안 서양을 지배했는데 도대체 무엇이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 만일 유신론이 인간의 모든 근본 문제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제시하고 두려움에 대해서는 피난처를, 미래에 대해서는 소망을 주었다면 어떻게 다른 사상이 유입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각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많은 세력이 작용하여 서양의 기본적인 지적 통일이 깨졌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신론이 신학과 철학의 혼란한 논쟁을 벗어나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시동에서 발전되었다고 주장한다. 17세기에는 심지어 논쟁을 좋아하는 이들조차도 사소하게 생각하는 그러한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장황한 말다툼에 빠지곤 했다.
이신론의 성립에 영향을 준 다른 요소는 신지식에 대한 권위의 근거가 변한 것이다. 그 근거는 성경의 특별 계시로부터 사람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촛불’ 즉 이성이나 혹은 ‘내면의 빛’인 직관으로 옮겨졌다.
권위의 근거가 바뀐 이유중 한가지는 특히 역설적인데 그것은 그 당시 매우 번성하던 유신론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바와 관련이 있다. 중세에는 다소 플라톤적인 지식론이 널리 받아들여진 까닭에 유신론을 신봉하는 학자들과 지성인들의 관심이 하나님께 향했다. 그 인식론에 따르면 인식자는 어떤 의미에서 그가 연구한 대상과 같은 존재가 된다. 또한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선하고 거룩하게 되어야 하므로 하나님을 공부해야만 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학문인 신학은 제학문의 여왕으로 간주되었다.
세상은 전체가 바로 하나님의 세계다. 비록 타락했지만 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값진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연구할 만하고 이해할 만한 가치가 있다. 더구나 하나님은 이성적인 신이시기에 그분이 만드신 우주도 합리적이고 질서 정연하며 따라서 연구할 수 있는 대상이다. 이러한 근거에 바탕을 두고 과학자들은 우주의 형태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의 상이 드러났다. 과학적인 연구 결과 얻어진 세상은 우주의 구성에 대한 더많은 탐구와 발견을 하도록 자극하였다. 즉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근대적 과학이 탄생하여 놀라운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베이컨의 말처럼 지식이 힘, 즉 창조 세계를 조종하여 좀더 완전히 인간의 지배 아래 두게 하는 힘이 되었다. 우주에 관한 지식을 얻는 과학적인 방법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동일한 방법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데도 적용되었다. 과학의 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권위자의 위치에서 쫒아낸 이신론은 이제 신학의 영역에서 성경을 권위자의 자리에서 쫒아내고 단지 ‘인간’ 이성의 적용만을 허용했다. 이신론은 하나님을 단지 ‘자연’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분으로 보았으며, 그 자연이란 우주의 구조를 의미한다. 그런데 우주의 구조는 거대한 시계로 비유되었으므로 하나님은 그 시계의 제조자로 간주되었다.
유신론에서는 사람이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또한 유신론을 그 방법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보다 알아야 할 더 많은 것이 있으며 그것을 알 수 있는 다른 방법도 있다고 주장한다.
유신론의 기본 내용
1. 제1원인인 초월적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나 스스로 운행하도록 버려 두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내재하지도 않으시고, 완전한 인격도 아니시고, 인간사의 주권도 아니시며 섭리자도 아니시다.
2.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는 폐쇄 체계 안에서 인과율의 일치제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결정론적인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어떠한 기적도 일어날 수 없다.
3. 인간은 비록 인격체이지만 우주라는 기계의 한 부품이다.
4. 우주 즉 이세상은 타락했거나 비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정상적인 상태에 있다. 인간은 우주를 알 수 있고 우주를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5. 윤리는 일반 계시에 국한된다. 우주는 정상이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가를 보여준다.
6. 창조시에 역사의 과정이 정해졌기 때문에 역사는 직선적이다.
이신론의 모순
1. 윤리의 면에서 타락하지 않은 정상적 우주를 가정하면 자연히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다는 의미로 흐르기 쉽다.
2. 인식론의 면에서, 개별에서 보편을 추출하려는 논증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3. 인간 본성의 면에서 살펴볼 때 재조정에 대해 닫혀진 세계에서 인간은 인격과 존재의 중요성을 유지할 수 없다. 인간 존재의 중요성과 기계적 결정론은 결코 자리를 함께할 수 없다.
이신론은 견고히 유지될 수 있는 세계관이 아님이 드러났다. 역사적으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반까지의 짧은 기간에 프랑스와 영국의 학문 세계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이신론은 과도기적 세계관으로 정교한 형태의 이신론은 전 세계 학계 중심부에 있는 일부 과학자들과 소수의 인문학자들 속에 살아 있다.
4. 유한한 우주의 침묵: 자연주의
이신론은 유신론과 자유주의라는 두개의 큰 대륙을 연결하는 지협이다. 유신론에서는 하나님이 무한하고도 인격적인 존재로서 우주의 창조주이자 유지자였다. 이 신론에서는 하나님이 삭감되었다. 즉 여전히 창조주로 또는 암시적으로는 우주의 유지자로 남아 있지만 인격이 배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연주의에 이르면 하나님은 훨씬 더 삭감된다. 그의 존재 자체가 소멸된다. 특히 1600년대에서 1750년 사이에는 유신론에서 자연주의로 넘어가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르네 데카르트는 유신론자라고 의식적인 고백을 했지만, 우주는 ‘물질’로 구성된 거대한 기계이며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새 시대의 장을 열어 놓았다.
존 로크는 하나님을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인격적인 신으로 믿는 등 대체로 유신론자였으나,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이성이 성경에 기록된 ‘계시’의 진위를 평가하는 심판자라고 생각했다. 자연주의자들은 이 개념에서 ‘하나님이 주신’이란 말을 빼 버리고 ‘이성’만을 진리에 대한 유일한 판단기준으로 삼았다.
자연주의의 기본 내용
1. 물질은 영원히 존재하며, 존재하는 것의 전부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우주는 폐쇄 체계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제로 존재한다.
3. 인간은 복잡한 ‘기계’다. 인간이란 우리가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화학적, 물리적 성질의 상호 관계다.
4. 사망은 인격과 개체성의 소멸이다.
5. 역사는 인과율에 의해 연결된 사건들의 직선적 연속이지만, 전체적인 목적성은 없다.
6. 윤리는 단지 인간에게만 관계된다.
세속적 인문주의
자연주의의 두가지 형태중에서 먼저 세속적인 인문주의라는 용어는 신봉자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한결같이 사용되거나 또 거부당하는 것이다. 세속적 인문주의는 인문주의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이지만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 인문주의는 인간에게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태도, 즉 인간의 열망, 사고, 소망이 있다는 태도 전체를 말한다. 각 개인으로서 인간의 가치를 강조한다.
르네상스 이후 다양한 신념을 가진 지성인들이 자타에 의해 인문주의자로 불렸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들은 각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였으며 인문주의자는 오늘날의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을 말하였다. 인문주의라는 말을 완전히 세속적인 형태의 것과 구별하려는 오늘날의 많은 기독 지성인들은“ 기독교 인문주의자 선어”(1982)에 동의한다. 그것은 인간의 가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을 명백하게 나타내고 있다.
세속적 인문주의는 완전히 자연주의 세계관 안에서 뼈대를 갖춘 인문주의의 한 형태다. 모든 인문주의자가 세속적 인문주의자는 아니지만, 세속적 인문주의자들은 자연주의자다.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상으로는 노동 계급의 유익을 추구하고, 그들이 삶에 대한 경제적 통제력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산주의의 관료적 경직성이 사유재산의 몰수와 함께 경제 침체를 낳았다. 마르크스주의의 여러 형태는 모두 칼 마르크스의 저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인간은 인간을 위한 최고의 존재”라는 인문주의적 논지로부터 마르크스는 “인간이 비하되고 노예화되며 유기되고 멸시받는 존재가 되는 모든 상황을 전복하라”는 혁명 명령을 도출해 낸다.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신은 인간 잠재성의 반영, 우리가 실현하지 못한 이상들의 표현이다. 인간이 신을 발명하자마자 인간은 신을 발명하도록 만든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대신, 스스로의 상상으로 만든 것을 기쁘게 하는데 관심을 쏟아 붓기 때문에 종교는 그 기능상 해롭다. 그는 종교는 인간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하는 물질주의자다. 마르크스는 종교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주장을 받아들이므로 무신론은 오늘날 많은 종류의 마르크스주의에 한 부분으로 남아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역사적이고 변증적이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인식한다.
자연주의의 지속성
자연주의는 대부분의 과학적 연구에 틀을 제공한다. 인문학은 자연주의를 배경으로 인간의 가치를 위해 계속 투쟁한다. 자연주의 세계관이 지속될수 있는 이유는 자연주의는 정직하고 객관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일관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주의자들 내부에서부터 불일치의 소리가 흘러 나왔다. 또 ‘불분명한’ 기원을 가진 존재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신뢰할 수 있으며, ‘내가’ 단지 생각하는 기계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나의 생각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5. 영점(零點): 허무주의
허무주의는 철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감정이다. 그것은 철학의 부정이고,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이며, 어떠한 것이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부정이다. 허무주의에서는 어떠한 진술도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의미있는 것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우연이며 무의미하다.
자기 의식적이며 자기 결정력이 있는 인간은 의미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으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다. 아무것도 나의 선택을 제한하지 않는다. 나의 행동은 자기 결정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라는 주제는 자연주의가 보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닌 문제다. 나는 특정한 유전자 구조나 태어날 가정 환경을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았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로운 행위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환상이다. 사람들은 무엇이 자신에게 결정을 ‘야기시켰는지’전혀 알지 못한다. 당연히 무엇인가가 그들의 결정을 야기시켰지만, 그들은 그것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허무주의자들이 사용한 논법은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영향을 주거나 의미있는 어떤 일을 할 능력이 없지만 의식은 있는 기계다. 그러므로 가치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죽은 것이다.
자연주의자들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단계를 거쳐 새로운 사물들이 존재하게 되었음을 인정한다. 즉 수소, 탄소, 산소, 질소 등이 자유로이 결합해서 복합아미노산이나 생명의 다른 기본 구조체를 형성하는 진화의 각 단계가 새로운 존재의 등장이라는 것이다. 모든 단계마다 우연히 새로운 것을 낳는다. 우연이 인간 탄생의 실마리가 된 것이다. 우연은 우주를 이성이나 의미, 목적 등이 아니라 부조리로 열었다. 우연은 인간에게 자기의식만 허용할 뿐 변덕에 휩쓸리도록 버려둔다. 변덕스런 행동은 고귀한 품격을 갖춘 인간의 자유스러운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이유도 까닭도 없다. 자연주의가 허무주의로 넘어간 이유는 자연주의가 인간에게 의미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주의는 인식과 지식이 물질 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에 뇌와 동일한 것 또는 뇌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자연주의는 체계 외부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주의는 인간을 상자안에 두었다. 그러나 자신이 상자안에 있다는 지식이 참임을 확신하려면, 인간은 직접 상자 밖에 나가 보거나 혹은 상자 밖의 어떤 존재가 그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상자 밖에서 그에게 계시를 제공할 어떤 것이나 인간은 없고 자신도 상자를 초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식론적 허무주의로 귀결된다.
6. 허무주의를 넘어서 : 실존주의
실존주의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허무주의를 초월하라는 것이다. 사실 20세기 초 이후 등장한 주요 세계관들은 모두 이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문화적 침투력이 강한 세계관의 직접적 결과로 탄생한 허무주의는 우리 시대의 문제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는 세계관은 현대의 사고하는 지성인들에게 적절한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 실존주의, 특히 세속적 형태의 실존주의는 허무주의를 진지하게 취급할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실존주의는 완숙한 세계관이 아니기 때문에 이전 세계관의 관계에 따라 두가지 기본 형태를 띠고 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자연주의의 기생물이고 유신론적 실존주위는 유신론의 기생물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흔들어 놓았다. 좌절과 문화적 불만의 토양속에서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문화적 뿌리를 내렸고,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주요 세계관으로 꽃을 피웠다. 무신론적 실존주위는 다음과 같은 자연주의의 모든 명제를 받아들이며 출발한다.
물질만이 영원히 존재한다, 따라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는 폐쇄 체계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제로 존재한다. 역사는 인과율에 의해 연결된 사건의 직선적 연속이지만 전체적 계획은 없다. 윤리는 단지 인간에게만 관계된 것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의 본질, 인간과 우주의 관계에 대한 명제를 제외하고는 자연주의의 모든 명제를 긍정한다. 실존주의의 주요 관심사는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이 의미가 없다면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의미 있게 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1. 우주는 단지 물질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실재가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2. 단지 인간만이 그 존재가 본질을 선행하게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현재 상태로 빚어낼 수 있다.
3. 인간은 자신의 본성과 운명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롭다.
4. 매우 정교하고 빈틈없이 조직된 객관 세계는 인간과 대립 관계에 놓여있으며 인간에게는 부조리하게 보인다.
5. 객관세계의 부조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대해 반대하는 진정한 인간이 반란을 일으키고 가치를 창출한다.
무신론적 실존주위는 허무주위를 넘어 단지 유아론, 즉 87년동안 존재하다가 사라져 버릴 고독한 자아에 도달했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결코 허무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가치라 불리는 탈, 죽으면 깨끗하게 벗겨져 버릴 탈을 걸친 것에 불과하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신학적, 철학적 뿌리에서 발생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다음과 같은 유신론의 명제들을 받아들이면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삼위의 인격이시고 초월하시고 내재하시고 전지하시며 주권자이시며 선이시다. 하나님은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개방 체계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운행케 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하나님과 우주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고 의미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과 교통하실 수 있으며 또 교통하신다.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현재는 타락의 상태에 있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하실 필요가 있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백성과의 생활에 이르는 문이거나, 혹은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된 생활에 이르는 문이다. 윤리는 초월적이고 하나님의 속성에 기초를 둔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우주와 하나님의 본질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및 우주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다.
1. 인간은 인격적 존재이며 완전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 때 소외된 우주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는 이성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해결되는 난제다.
2. 인격적인 것은 가치 있다.
3. 지식은 주관적이다. 완전한 진리는 종종 역설적이다.
4. 사건의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불확실하고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현재화되고 생활화될 모델, 유형, 신화 등으로서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을 믿고자 하면서도 초자연적인 것이나 성경의 정확성에 대한 믿음을 그리 많이 요구하지 않는 신앙을 갈망하는 자에게는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바로 그 대안이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자연주의자가 인생에 대한 의미를 찾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면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도움이 될 것이다.
7. 동양으로의 여행 : 동양 범신론적 일신론
서양 사상사의 흐름은 결국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고 말았다. 자연주의는 허무주의에 귀결되었고, 자연주의에 물든 서양인들이 받아들이기 원하는 조건으로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기가 어렵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도 그러한 시도의 하나이지만 그것은 다소 심각한 문제를 여럿 안고 있다. 유신론도 한가지 해답이지만 자연주의자들은 여기에 별로 끌리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 사람이 무한한 인격이시며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한 세기 이상 이 질문은 심각한 장애가 되었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오히려 자연주의를 고수한다. 왜냐하면 자연주의는 여전히 그들이 거부하는 미신적인 종교보다 확실히 진보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외식적이고 사랑이 부족한 현대의 기독교계는 유신론의 생명력을 형편없게 증거하고 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볼 때 동양에 대한 관심은 1960년대 중산층의 가치관이 젊은 세대에 의해 거부되면서부터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동양 사상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은 우선적으로 서양 사상에서 후퇴함을 의미한다.
순환적 역사, 서로 어긋나는 길, 서로 다른 교리, 선인 악, 무식인 지식, 영원인 시간, 비실재인 실재, 이 모든 것은 자주 변하여 역설적인 가면으로 유일자를 가리고 있다. 서양인들은 계속 동양으로 향하고 있다. 동양이 평화에 대한 약속, 의미에 대한 약속, 가치에 대한 약속을 내세우는 한에는 사람들이 계속 반응을 보이며 좇아갈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얻을까? 단지 서양의 상처에 대한 동양의 치료제를 얻는 데 그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과 양식을 얻게 될 것이다.
8. 또 하나의 우주 : 뉴 에이지
동양 신비주의는 자연주의적 허무주의의 사슬에 매인 서구인들이 도피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되었다. 그러나 동양 신비주의는 낯선 것이다. 명상 요법은 비교적 익숙하지만, 여전히 실재를 파악하는 서양의 일반적인 태도를 즉각적으로 또 급격히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전환을 통해서 새로운 의식 상태에 도달할 수 있고 새로운 의미를 느낄 수 있겠지만, 지적인 희생은 크다. 동양에서 태어나기 위해서는 서양에 대해서는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좀 덜 고통스럽고 적은 희생을 치르면서 의미와 의의를 파악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일단의 젊은 학자와 의사, 심리학자와 종교 탐색가들에 의해 이런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인문 과학으로부터 자연 과학에 이르는 다수의 학문 분야에 전위자들이 있고 문화 전체에 대한 파급효과도 상당하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뉴 에이지 세계관 안에는 거친 부분과 내적인 긴장, 심지어 명백한 불일치도 있지만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다른 세계관들과 마찬가지로 이것을 일련의 명제들을 가지고 가시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뉴 에이지 세계관은 매우 혼합적이고 절충적이다. 여러 주요한 세계관들에서 따온 것이 많다. 비록 동양의 범신론과 고대 애니미즘에서 온 기묘한 분파와 낯선 차원이 있지만 뉴 에이지는 자연주의와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순수한 동양 신비주의에 비해 많은 개종자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자연주의와 마찬가지로 뉴 에이지는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우리 각자를 제외하고는 어떤 우주의 주(Load)도 없다. 단지 폐쇄된 우주가 있을 뿐이다. 그 우주는 놀라운 ‘인격적’지성과 능력을 가진 존재에 의해 ‘인간화’되었으며, “인간 의식은 두뇌에 의해 제한 받지 않는다.” 인간성의 진화론적 변화에 대한 희망도 자연주의에서 빌려온 것이다. 인간은 새로운 존재가 되기 직전까지 와 있다. 진화에 의해 변형이 일어날 것이다.
뉴 에이지 사고는 동양의 범신론적 일신론과 같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도덕이 초월되는 신비한 경험을 중심으로 한다. 뉴 에이지의 사고는 동양 범신론처럼 실재에 이르는 안내자로서의 이성을 부정한다. 세계는 실제로 비합리적인 혹은 초합리적이며 새로운 인식형태를 필요로 한다. 뉴 에이지는 애니미즘과도 관련이 있다.
뉴 에이지의 기본 신조
1. 존재의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자아가 중추, 곧 최고의 실제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이해함에 따라 인류는 인간 본성의 급격한 변화에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우리는 변화된 인간성의 전조들과 뉴 에이지의 전형들을 볼 수 있다.
2. 우주는 자아 속에서 통일되어 있으며 또 다른 두개의 영역인 보이는 우주와 보이지 않는 우주에서 발현된다.
3. 뉴 에이지의 핵심 경험은 우주의 의식인데 그 안에서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도덕성 같은 보통의 범주들은 사라져 간다.
4. 육체의 죽음은 자아의 종말이 아니다. 우주 의식을 경험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진다.
5. 실재의 본서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뉴 에이지의 일반적인 틀 안에서 다음 세 가지의 독특한 해석이 있다.
① 새로운 의식의 상태에서 인식되는 존재와 사물들은 의식하는 자아와 떨어져 존재한다고 보는 비학적 해석.
② 그 존재와 사물들을 의식하는 자아의 반영으로 보는 환각 해석.
③ 우주 의식이 질재에 대한 수많은 특수한 모형중 하나를 사용하는 정신의 의식적인 행동이라는 개념적 상대주위 해석.
뉴 에이지 세계관은 내적인 모순투성이이며 자연주의적 허무주의나 동양 신비주의가 부딪힌 딜레마를 해결하지도 못할 뿐 더러 이 딜레마를 무시한다. 뉴 에이지 세계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연주의나 범신론적 일신론이 가진 문제와 같이 닫혀진 우주의 개념이 문제를 일으킨다. 뉴 에이지에서 선과 악의 범주가 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자아가 왕이라면 왕은 잘못을 저지를 수 없고 자아가 만족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개념은 엄청난 잔인성을 허락한다.
뉴 에이지의 두번째 문제는 애니미즘으로부터 차용해온 것으로 기독교가 숲속의 악마들을 쫓아내고 자연 세계의 신성을 제거하고 타락한 천사들인 사탄의 왕국의 문제에 대하여 과도한 관심을 갖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한 이후로 닫혀진 문을 다시 열었다. 이제 그들이 돌아와 대학의 기숙사 방문을 두드리고, 심리학 실험실에 잠입하고, 부적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고 있다.
뉴 에이지의 세 번째 문제점은 실재의 본성과 진리의 본성에 대한 이해의 문제로 그들은 실재의 모든 체계의 언어를 받아들이고 그 모든 것이 실재에 대한 설명으로 동일하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의 사상이나 경험에 대한 비판도 없다. 모든 체계가 동일하게 가치 있으므로 경험이라는 시험만 통과하면 되는데 그 경험은 개인적인 것이다.
9. 사라진 지평선 : 포스트모더니즘
한 문화가 그 철학적 중심을 잃을 때에는 그 문화의 토대가 되는 철학뿐 아니라 문화의 상부구조 전체와 각 개인의 정체성까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법이다. 모든 것이 변하게 된다. 신이 죽으면 다른 모든 것의 실체와 가치도 함께 죽는다.
신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 포스트모던적인 지혜의 시작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근대의 마지막 행보이며 근대가 스스로의 신념을 심각히 숙고한 결과 분석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음을 자각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니체 이후 100년이 더 지난 오늘에 이르러 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마침내 “사람의 귀”에 도달했다. 우리 세계의 한계를 규정짓던 그 지평선은 씻겨 버리고 말았다. 우리의 위치를 지탱하고 있던 그 중심이 사라지고 없다. 포스트모던 성향이 더 짙어지고 있는 우리 시대는 다양한 관점과 철학적 대안의 홍수 속에서 표류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혹은 저기에 어떻게 도달할지를 알려 주는 지배적 관념이 없는 상태다. 가까운 장래에 문화적 무정부 상태에 빠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는 본래 건축학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축가들이 콘크리트, 유리, 강철로 된 비인격적이고 꾸밈없는 상자 모양의 건축물을 더 이상 짓지 않고, 과거로부터 여러 특색을 끌어오되 그 본래의 목적이나 기능과 상관없이 그렇게 하여 복잡한 모양과 형태를 꾸며내는 방향으로 전환된 데서 유래한다. 그런데 프랑스 사회학자 장 프랑스와 리요타르가 포스트모던이란 용어를 문화적 정당화 방식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면서 문화 분석에서 핵심단어로 자리 잡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 세계관 이상이기도 하고 그 이하이기도하다. 그 이유는 그 용어가 철학이 아니라 사회학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의 관심사는 사람들이 사회의 일부로서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있다. 따라서 존재나 앎 혹은 윤리의 범주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엇이 참된 실재인지를 묻지 않고, 존재와 앎과 윤리의 관념이 사회에 어떻게 발생하고 작동하는지를 묻는다.
1. 포스트모더니즘이 다루는 첫째 질문은 무엇이 존재하느냐 혹은 그 존재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언어가 어떻게 의미를 구성하느냐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일차적인 문제’가 존재에서 인식을 거쳐 의미 구성으로 변천된 것이다.
2. 실재 자체에 관한 진리는 영원히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뿐이다.
3. 이야기는 공동체에 결속력을 제공한다.
4. 모든 이야기들은 권력 놀음을 위장한다. 어떤 이야기든 일단 거대담론이 되면 억압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에 계시된 거대담론을 수용하는 ‘전근대성’ → 실재에 대한 진리를 제공하는 보편적 이성을 논하는 ‘근대적’ 거대담론 → 모든 거대담론을 권력놀음으로 환원시키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전환된 것이다.
5. 실체적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에 관해 묘사하는 그 언어에 의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존재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존귀한 존재라는 ‘전근대’의 유신론적 관념 → 인간은 돌연변이와 적자생존에 근거한 무계획적 진화의 결과인 DNA 주형의 산물이라는 ‘근대적’ 관념 → 인간이란 스스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구성된 비실체적 자아라는 ‘포스트모더니즘’ 관념으로의 변천이다.
6. 윤리는 지식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구성물이다. 한 사회가 선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사회적 선이 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문화적 상대주의의 변형으로 진리란 우리가 결정하기 나름이라는 관념이 윤리적으로 확정된 것이다. 선이라는 것은 사회에서 권력을 장악한 자들의 결정에 좌우된다.
7. 포스트모더니즘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중세에는 신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이었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철학과 더불어 과학이 지적 변화를 주도하는 첨단분야였다.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문학이론이 그 흐름을 주도했다가 인류학, 사회학, 언어학등지에서 흘러나와서 문학연구의 반(反)주류이던 것이 지성계의 주류가 되기에 이르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은 서구 문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역사학의 경우 과거의 과거성이 현 순간의 안개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역사학자들은 근대적 역사주의에서 벗어나 포스트모던 사상으로 전향하고 있다. 역사는 이제 성찰의 역사들에 대한 성찰이 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자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활동을 하든 상관없이, 나름대로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쓰기 시작했다. 과학적 진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사용하는 언어다. 즉 과학이란 과학자들이 정의하기 나름이라는 말이다.
사회학 분야에서도 한 일화를 보면 박사학위가 없는 두 명의 프랑스 과학자가 전문 용어투성이의 가짜 과학 논문을 써서 전문가의 검열의 피해 한 과학 저널에 수록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은 넌센스가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저널 앞에 세워 놓은 문지기를 피해 얼마든지 넘나들 수 있음을 보여줬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올바른 측면
1. 포스트모더니즘은 낙관적 자연주의를 대체로 정확하게 비판한다.
존재와 인식의 영역에는 인간 지성이 침투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존재한다.
2. 언어가 권력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적도 정확할 통찰이다.
3. 우리의 인식작용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에 주목하는 입장은 우리가 유한한 인간으로서 제한된 관점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사회는 여러 면에서 우리의 모양새를 형성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
1. 모든 거대담론에 대한 부정 그 자체도 하나의 거대담론이다.
2. 우리가 실재에 접근할 수 없다.
3. 언어의 불확정성을 주장하는 해체주의의 견해에 대해 언어는 모호하지 않는 주장을 표명할 수 없다는 주장을 언어로 표현할 경우 그 속에 해결 불가능한 역설이 내포될 수 밖에 없다.
4.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충족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은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충족성에 기초한다.
니체는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앉혔다. 최근에 자연주의자들이 견지하는 지배적 입장을 보면 그 중심에 인문주위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죽은 후에도 우리가 그럭저럭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식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 도덕적 입장이나 신념을 갖는 데 굳이 하나님이나 이성의 재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저 직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면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죽음, 이성의 죽음, 진리의 죽음, 자아의 죽음 등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이루는 것들은 상당히 오FOT동안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