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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l 05. 2020

속물과 속물근성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

0. 들어가기


어릴적에 스스로 속물이라고 생각했다. 엘리트들을 비판하며서 엘리트가 되고 싶은 속물. 그래서 항상 마스크를 낀 것 같이 얼굴은 다른 방향을 향하면서 속마음을 무엇인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욕망'하는 것들의 천국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래서 인지 항상 초점은 미래에 있거나 과거의 어느 시점에 있었고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책임전가'는 말 그대로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나의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군가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누군가에게 나의 시간을 주는 것이다. 나는 이 사회가 이래서, 저 사람 때문에, 거기는 분위기가 이상해서. 이런 식으로 책임전가를 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깐 남는 것은 불행한 마음과 함께 무엇인가를 은근히 바라는 데 이루지 못하는 열등감과 열패감과 자아의식의 붕괴가 찾아오는 토요일 오후 2시였다. 


그래서 유독 속물과 속물근성에 대한 글을 많이 찾아보고 고민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런데 크리스나무르티가 말한 것처럼 사물을 진지하게 직시하다보면 관성에서 빠져나올 수 있듯이, 진지하게 내 안에 속물 근성을 고민하고 성찰하는 과정에서 나는 조금은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최고로 좋은 것, 행복한 삶, 누군가에게 떵떵 거리는 삶 보다는 내가 좋아하고 맞는 것에 만족하면서 사는 편이 되었다. 열등감을 느낄 시간에 공부를 하고 말지. 이런 생각으로 말이다. 



1. 불안_알랭드보통


속물

알랭드보통은 '불안'이란 책에서 속물의 탄생과정을 이야기한다. 1800년대를 지나가면서 영국사회에서는 큰 변화가 생겼다.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시민사회가 성장하면서 사람들 간의 '평등'이라는 의식이 매우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영국의 학교제도도 탄생을 받아서 귀족들만 다니던 학교에 평민들도 함께 다닐 수 있는 변화가 생겼다. 처음으로 귀족들과 학교를 같이 다니던 평민들은 대부분 농민이거나 노예였거나 상인이거나 했다. 그러다보니 귀족들이 입고 있는 옷과 말투, 문화적인 양식들을 따라가고 싶어했다. 그래서 평민들 사이에서는 귀족과 귀족이 아닌 사람으로 나뉘게 되었다. 어떤 활동은 귀족적인 것, 어떤 말은 귀족적이지 않은 것. 모든 것이 귀족이라는 관점에서만 보게 된 것이다.


영어로 속물은 snob이다. s는 부정형이고 nob은 noble의 약자이다. 대체로 속물이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고 알랭드 보통은 말한다.


하나의 관점으로 모든 사물을 보는 사람을 속물이라고 한다

현대인의 불안은 어쩌면 하나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속물'적 관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하나의 관점이란 '자본'일 가능성이 크다. 세상이 자본으로 구성되고, 자본으로 만들어진 규칙과 삶의 질서들 가운데서는 모든 것들이 자본으로 옷음 입는다. 사람도, 동물도, 행위도, 관계도 모두 돈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속물들의 왕국이 형성되면서 순수한 것과 인간적인 삶은 점점 더 파괴되어 버린다. 속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처절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의 시작은 일단 '비교의식'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내가 가진 것이 열등하다고 느낄 때 결국은 속물근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비교의식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비교의 기준'을 고민해 보는 것이다. 속물에 대한 정의에서 보는 것처럼, 속물은 한가지의 기준으로 모든 것들을 포함시켜 버리고 정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거나 대변하게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럼 어떤 기준이 필요할까? 프랑스의 자크라캉은 '우리 모두는 타자의 욕망으로 살아간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타자의 욕망은 직접적으로 타자의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우리의 의식을 뚫고 저변의 무의식에 깔려서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무의식의 구조는 이미 여러 사람들의 말과 상징, 기준들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는 길, 바로 내가 어떤 기준에 의해서 평가받고, 만족한다고 느끼는 것인지 성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결국은 해석학의 길로 접어 들어야 한다. 




2. 일상의 악덕_주디스슈클라


속물근성

미국의 정치철학자 중에 으뜸을 뽑으라면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중에는 쥬디스 슈클라를 뽑는다. (물론 한나아렌트 만한 사람이 없지만, 한나아렌트는 미국이라기 보다는 독일쪽이 아닌가?) 특히 슈클라의 '일상의 악덕'Ordinary Virture에서는 일상의 자유를 파괴하는 5가지의 악덕을 소개한다. 잔혹성, 위선, 속물근성, 배신, 인간혐오가 그것이다. 여기서 속물근성은 위에서 말한 속물에서 더욱 발전한 개념으로 소개된다. 속물근성을 가진 사람은 일상에서도 삶을 두개로 구분한다. 자신이 속한 그룹은 동일성과 소속감 그리고 같은 계급으로 치환되고, 자신이 속해 있지 않은 그룹은 배제와 차별 그리고 혐오를 진행해도 괜찮은 감정이다. 이러한 속물근성은 snob에서 snobbery로 표현할 수 있다. 속물근성은 개념사를 만든 코젤렉의 분류에 의하면 '새롭게 만들어진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일상의 악덕은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도 같지만, 한편으로는 5각지의 악덕이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씩은 담겨 있다. 특히 속물근성은 인간혐오라는 방식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잔혹성까지 띄게 되어 있다. 미국에서 이어나는 조지플로이드 사건의 경우가 속물근성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백인들은 왜 백인인 것에 열망하는가? 오직 '백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드을 혐오하고 잔혹하게 살해하거나 역사적으로 지워버릴려고 한다. 일상의 악덕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3. 가면뒤에서_메이자 루이 올컷


가식

메이자 루이 올컷은 가난하게 살았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서 하루에 한끼 정도만 먹고 3개월 동안 글을 썼다. 그리고 나온 책으로 스터덤에 오르면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단지 자신의 습작정도, 돈을 벌기 위한 원고 정도가 '작은 아씨들'이었다. 




그런데 진짜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사실 '가면 뒤에서'였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가식은 가식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어떤 일정한 목적이 있어야만 가능한 방식이다. 그러니깐 가면을 쓰고 그 가면 뒤에는 자신의 진정한 목적이 있지만, 그 목적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가식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착한 사람들 곁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내 주위에는 착한 사람들 투성이라서 '착한 사람' 가면을 쓰고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의 가식은 언제 탄로 날 것인가? 아니면 그 가면이, 가식이 진짜 피부를 뚫고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의 원천까지 들어올 것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오히려 가면을 쓰다가 가면이 내 마음의 형태를 띄게 된 경우인 것 같다.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다가 이제는 정말 착한 사람이 되어 버려서 남들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조금 더 손해보는 방식으로 살게 되는 '바보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도 같다. 아무튼.


가면 뒤에서 루이자 메이 올컷이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람들은 자신이 쓴 가면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가면을 쓴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가면을 쓴 것이 탄로나면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도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그러니깐 인간의 가면은 언젠가는 벗겨지고 그 가면 안에서 웃고 있는 자신이 진짜라는 것이다. 속물근성과 연결되는 가식은 가면 뒤에서 웃고 있는 진짜 나에 대한 부분일 것이다. 나이가 어느정도 지나가서 삶의 대한, 자신의 과거에 대한 '경로 의존성'이 생기면 이제 가면을 벗고 싶어도 벗지 못하고, 가식을 떨치고 싶어도 떨치지 못하는 때가 온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는 시간들 말이다. 






4. 참을수없는 존재의 가벼움_밀란쿤데라


존재의 가벼움

구조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이 자신의 구조 안에 갖히는 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어떻게 보면 구조 자체에 얽혀져 있어서 자기 자신이 누군인지 모르는 사람이, 그 구조의 의해서 정의내려지고 결국 구조가 바뀌면 자신의 정체성도 사라지는 '존재의 가벼움'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속물근성에서 여기까지 왔다. 자신이 속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속물'이 되는 것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에서 자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신의 하나의 관점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에 익숙한 것이다. 자신은 그 구조 안에 갖혀 있으면서 되려 다른 구조에 갖혀 있는 사람을 비판하고 있는 꼴. 


가벼운 것이다. 영혼이 21그램도 안되는 것이곡, 다른 관점을 감히 엄두도 못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 안에 갖힌 사람, 그래서 존재가 너무 가벼운 사람. 한가지의 기준 밖에는 없는 사람. 속물. 




0. 나오기


능력있는 위조지폐 감별사는 특별히 위조지폐를 감별하기 위한 방법을 개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수가 될 수록 위조지폐의 특징들을 찾아 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지폐를 더 많이 본다. 그래서 돈을 세다가 위조지폐가 나오면 수난의 망설임도 없이 '위조'임을 알아차린다. 


속물근성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사실은 핵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짜의 삶, 정말 나 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속물에서 떠나는 방법이었다. 나는 어떤 방법이 가장 좋고 잘 맞으며, 내가 어떤 구조에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지. 이런 고민들은 가식 자체를 분석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많은 시간을 아낄 수 있다. 


조지버나드 쇼는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살고 싶었지만 한번도 살지 못했던 삶을 살고 싶다"라고 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을까? 다시 태어나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삵고 싶을까? 어떤게 진짜 삶일까? 한 100가지 정도의 의미와 대답은 찾은 것 같다. 그럼 이제는 무엇을 할까? 속물근성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분위기와 문화를 바꾸어서 진짜 삶을 추구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일까? 


더 열심히 공부하고 고민하고 돌아보는 가운데 진짜 삶이 구조를 만들과 사람들을 부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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