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다르도의 내전, 대중혐오, 법치
장석준 작가님과 함께한 2번째시간. 내전과 대중혐오 그리고 법치에 관련된 이야기를 신자유주의와 연결해서 살펴보았다. 디자인은 계속해서 에드워드호퍼의 작품으로 하고 있디.
신자유주의는 경제 정책의 집합을 넘어 현대 사회를 규율하는 거대한 통치적 합리성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는 20세기 중반 오스트리아 학파와 시카고 학파를 거쳐 체계화되었으며,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는 과정을 거쳤다. 과거의 고전적 자유주의가 시장의 자율 방임을 강조했다면, 신자유주의는 시장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법치와 제도적 개입을 필수 요소로 간주한다. 이러한 변화는 개인의 삶을 기업가적 모델로 재편하고 사회 전체를 경쟁의 장으로 변모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본 글에서는제시된 지적 흐름을 추적하며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권력의 기술로서 작동하는지 상세히 분석하고자 한다. 지배적인 경제 논리가 어떻게 인간의 실존적 양식까지 규정하게 되었는지 살피는 것은 현대 사회의 모순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우리는 이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통치의 보이는 설계도를 직시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도판 속의 복잡한 연결망은 단순한 이론의 나열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골격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 분석의 핵심은 미셸 푸코가 제시한 '통치성' 개념과 하이에크의 '법의 지배'가 만나는 지점을 포착하는 데 있다. 신자유주의 통치 방식은 대중의 민주적 요구를 억제하고 전문가 엘리트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를 강화하는 전략을 취한다. 도판은 이러한 계보를 미제스, 하이에크, 프리드먼으로 이어지는 인물 중심의 흐름과 몽펠르랭 사회와 같은 조직적 거점을 통해 시각화하고 있다. 또한 현대에 이르러 나타나는 '새로운 세계 합리성'이 어떻게 전 지구적 차원에서 주권과 통제를 재구성하는지 탐구한다.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내전적 속성과 그 대안적 가능성을 모색함으로써 현대 정치경제학의 지형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단순히 과거를 복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지배 체제가 가진 균열을 찾아내어 새로운 사회적 상상력을 자극하고자 한다. 권력은 언제나 자신을 자연스러운 질서로 위장하지만, 비판적 분석은 그 인위적인 기획의 흔적을 폭로한다. 이 글을 통해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통치 기획의 설계도를 해체하고 그 이면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다.
루드비히 폰 미제스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신자유주의의 지적 토대를 닦은 결정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1930년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비효율성을 비판하며 시장의 가격 기구가 가진 정보 전달 기능을 강력히 옹호했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전통은 단순한 경제학을 넘어 인간 행동의 공리적 특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정교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하이에크는 시장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설계할 수 없는 '자생적 질서'로 정의하며 이를 존중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논의는 1947년 스위스에서 열린 몽펠르랭 사회의 결성으로 이어지며 국제적인 지식인 연대를 형성했다. 그들은 전후 서구 사회를 휩쓴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 모델이 개인의 자유를 서서히 침해하는 노예의 길이라고 경고했다. 결과적으로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 경제 위기는 이들의 이론이 주류 정책으로 부상하는 결정적인 역사적 계기를 마련했다. 이 시기의 지적 전환은 국가의 역할을 시장 보조자에서 시장 질서의 적극적인 설계자로 완전히 탈바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신자유주의 사상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실패를 극복하려는 반성에서 시작된 고도의 정치적 기획이다.
미제스는 자유주의가 단순히 방임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사회주의와 파시즘의 위협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이에크는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기보다, 개입의 방식이 법치주의적 원칙에 부합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들은 시장 경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도덕적 가치와 법적 장치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질서 자유주의'적 관점을 공유했다. 몽펠르랭 사회는 이러한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전 세계의 경제학자, 언론인, 정치인들을 규합하여 강력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 조직은 수십 년 동안 학술대회를 열고 정책 보고서를 발간하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체계적으로 확산시켰다. 리프먼과 같은 언론인들도 이 흐름에 합류하여 대중에게 시장 중심의 세계관을 심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신자유주의는 결코 우연히 승리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된 지적 투쟁의 결과물인 셈이다.
하이에크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지식의 분산성과 시장의 자생적 조정 능력을 연결한 부분이다. 그는 중앙 정부가 모든 정보를 독점할 수 없기에 계획 경제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완성했다. 이러한 인식론적 겸손은 역설적으로 시장 질서에 저항하는 모든 시도를 반지성적인 것으로 몰아세우는 근거가 되었다. 시장은 이제 단순한 교환의 장소가 아니라 진리를 판별하는 궁극적인 심판관의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상자는 이러한 지적 확신이 어떻게 현대 경제학의 뿌리가 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하이에크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을 통해 자신의 이론적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으며 신자유주의의 대부로 등극했다. 그의 사상은 이후 대처주의와 레이거노믹스의 핵심적 이론적 자원으로 활용되며 실질적인 통치 규범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유라는 개념은 오직 시장 안에서만 유효한 협소한 의미로 축소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사상적 기원의 마지막 조각은 시카고 학파의 밀턴 프리드먼에 의해 완성되어 실천적 동력을 얻었다. 프리드먼은 통화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정부의 자의적인 경기 부양책이 인플레이션만을 초래한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공기업 민영화, 규제 완화, 세금 감면이라는 구체적인 정책 패키지를 제시하며 신자유주의의 실행력을 극대화했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린 피노체트 독재 체제는 프리드먼의 이론을 실험하는 잔혹한 시험대가 되기도 했다. '밀턴 프리드먼'은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학문의 영역을 넘어 현실 권력과 결합했는지를 상징한다. 그는 경제적 자유가 정치적 자유의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하며 시장 만능주의를 도덕적 정의의 반열에 올렸다. 이러한 논리는 복지국가의 해체를 정당화하고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강력한 수사적 무기로 작동했다. 결국 오스트리아 학파의 철학과 시카고 학파의 정책은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통치 체제의 두 기둥이 되었다.
미셸 푸코는 신자유주의를 단순한 경제 이론이 아닌 인간을 통치하는 새로운 기술로 분석하며 '통치성' 개념을 도입했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국가는 시장에 직접 개입하기보다 시장 논리가 사회의 모든 영역에 침투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한다. 국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기업처럼 운영되며 효율성과 수익성을 통치의 최우선 가치로 삼게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개인은 이제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본으로 관리하는 '자기 경영적 주체'로 호명된다. 이는 교육, 건강, 인간관계조차 투자와 수익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고도의 규율 권력으로 작동한다. 'People's Capitalism'은 이러한 주체화 과정이 대중에게 어떻게 내면화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경쟁은 사회적 연대를 대체하며 개인은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성과 측정의 굴레에 스스로를 가둔다. 통치성은 강압적인 폭력보다는 자유를 매개로 하여 개인이 스스로를 규제하도록 유도하는 세련된 방식을 취한다.
자기 경영적 주체는 자신의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위험과 책임을 온전히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존재다.
과거 복지국가가 질병, 실업, 노후를 사회적 책임으로 간주했다면 신자유주의는 이를 개인의 관리 실패로 규정한다. 개인은 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스펙'을 쌓고 유연한 노동 시장에 적응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아는 하나의 상품이 되어 끊임없이 마케팅되고 재구조화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푸코는 이를 '기업 모델의 전 사회적 확산'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이 신자유주의 통치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새로운 세계 합리성'은 이러한 주체 생산 방식이 전 지구적으로 표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이제 명령에 복종하기보다 스스로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경쟁에 뛰어든다. 이러한 자발적 복종은 신자유주의 체제가 물리적 억압 없이도 강력한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비결이다. 결과적으로 주체는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시장이 정해놓은 경로를 충실히 따르는 존재가 된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불안을 통치의 동력으로 삼아 사회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든다. 낙오에 대한 공포는 개인으로 하여금 잠시도 쉬지 않고 자기 착취에 몰두하게 만드는 강력한 채찍이 된다. 모든 사회적 관계는 거래적 관계로 치환되며 타인은 연대의 대상이 아닌 잠재적인 경쟁자로 인식된다. 도판 하단에 언급된 '미시적 대안 행동'의 부재는 이러한 통치성이 얼마나 깊숙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방증한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시장 친화적인 방향으로 재편하여 저항의 가능성 자체를 거세하려 한다. 성공한 자에게는 보상을, 실패한 자에게는 낙인을 찍는 명확한 신호 체계는 통치의 정당성을 강화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심지어 여가와 휴식조차 다음 경쟁을 위한 재충전이라는 생산적 행위로 변모시킨다. 결국 인간의 실존은 시장의 지표로 환산되며 주권적인 자아는 실종되고 경영되는 자아만 남게 된다. 통치성은 이렇게 우리 삶의 미시적인 모세혈관까지 침투하여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을 완성해 나간다.
이러한 주체화 과정은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결합하여 더욱 정교하고 실시간적인 감시 체제를 구축한다. 알고리즘과 데이터 분석은 개인의 성향과 능력을 수치화하여 끊임없이 등급을 매기고 피드백을 제공한다. 플랫폼 노동의 확산은 개인이 스스로를 경영해야 하는 상황을 더욱 극단적으로 몰아가고 있다. '새로운 통치성'은 기술 관료적 지배와 시장 논리가 결합된 현대적 통제 방식을 의미한다. 개인은 자신의 데이터를 제공하며 스스로 통제의 그물망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그 안에서 효율성을 경쟁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연대는 불가능해 보이며 오직 파편화된 개인들의 무한 경쟁만이 남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기술을 통해 통치의 비용을 낮추고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인간은 공동체로부터 격리되고 오직 시장이라는 차가운 매커니즘 속에서만 존재 의미를 찾게 되었다. 주체는 스스로를 경영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거대한 알고리즘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 통치 방식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법의 지배를 통해 정치적 민주주의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다수결의 원칙이 시장의 효율성을 해칠 수 있다는 깊은 불신을 가졌으며 이를 제어할 장치를 요구했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법은 시장 참여자들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는 중립적인 규칙이자 사유 재산을 보호하는 방패다. 이들은 독립적인 중앙은행이나 국제 기구에 경제적 결정권을 위임함으로써 대중의 정치적 압력을 원천 봉쇄한다. '비상상태 통치'는 경제 위기 상황에서 민주적 절차를 유예하고 엘리트 중심의 결단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구조는 시민의 참여를 형식적인 투표 행위로 축소하고 실질적인 권력은 시장 기구에 귀속시킨다. 법치주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시장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최상위의 통제 장치로 기능하게 된다. 결국 신자유주의적 법치는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기보다 자본의 축적 조건을 안정화하는 도구로 변질되었다.
신자유주의 통치는 '정치의 경제화'를 통해 민주적 논쟁의 영역을 기술적 관리의 영역으로 치환한다. 사회적 불평등이나 복지 문제는 더 이상 정의의 관점이 아닌 비용과 편익의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국가는 시장 질서에 위협이 되는 대중의 요구를 '포퓰리즘'으로 낙인찍으며 법의 이름으로 이를 배제한다. '대중혐오의 법칙'은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이 일반 대중의 정치적 판단력을 어떻게 불신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들은 헌법적 장치를 통해 정부의 재정 지출을 제한하거나 노동권 행사를 법적으로 까다롭게 만든다. 정치적 갈등은 사법화되어 법정으로 옮겨지고 시민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는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다. 법은 이제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시장 질서를 강제하는 규범적 폭력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게 되며 실질적인 통치는 시장 관료와 법률 전문가들에 의해 수행된다. 신자유주의적 법치는 이렇게 민주주의를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해체해 나가는 고도의 전략을 취한다.
앞에서 강조된 '강한 국가' 개념은 신자유주의가 결코 국가의 실종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국가는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에서는 후퇴하지만 시장 질서를 방해하는 세력을 진압하는 역할에서는 더욱 강해진다. 신자유주의 국가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파업을 해산하고 사유 재산권을 침해하는 모든 시도에 엄중히 대응한다. 이는 하이에크가 주장한 '자유의 헌법'이 실제로는 시장 질서를 위한 권위주의적 통치와 결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신자유주의 통치 방식'은 국가 폭력과 법적 규제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설명한다. 시장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역설이 신자유주의 역사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법치는 이러한 억압을 합법적인 절차로 포장하여 저항의 명분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강력한 법적 질서 아래서 시장은 성역화되고 그에 대한 도전은 범죄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화된다. 결국 신자유주의는 법을 통해 정치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시장의 행정적 관리를 들어앉혔다.
이러한 법치주의적 통제는 국제적인 조약과 협정을 통해 개별 국가의 주권을 넘어서는 차원으로 확장된다.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 제도(ISDS)는 국가의 정책 결정권을 초국적 자본의 이익 아래 둔다. 개별 국가가 시민의 안전이나 환경을 위해 법을 제정하려 해도 국제법적 제약 때문에 좌절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글로벌 통제' 섹션에서 묘사된 것처럼 전 지구적 차원의 신자유주의 법질서가 구축되었음을 의미한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보다 국제 금융 기구의 권고안이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비극이 반복된다. 시민들은 자신의 투표가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며 정치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을 겪는다. 신자유주의는 법이라는 정교한 장치를 통해 민주주의의 엔진을 정지시키고 자본의 흐름을 보장하는 고속도로를 닦았다. 이러한 법의 지배는 결국 소수의 자산가 계급에게만 진정한 자유를 선사하는 불평등한 질서를 고착화했다.
현대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인 '메타 이데올로기'로서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다. 주권과 보호, 그리고 통제라는 세 가지 축은 글로벌 자본의 이동을 원활하게 하는 동시에 노동의 이동은 엄격히 규제한다. 메타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거시적 통치 구조가 어떻게 정당화되는지 잘 보여준다.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거버넌스는 탄소 국경 조정이나 국제 표준 설정을 통해 기술 장벽을 쌓고 신흥 국가들의 추격을 차단한다. 자본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이윤을 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은 국가와 개인이 전담한다. 디지털 기술과 데이터 구조의 결합은 이러한 전 지구적 통제를 더욱 정교하고 실시간으로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는 개별 국가의 정책을 넘어 세계적인 차원의 합리성으로 작동하며 거대한 위계 질서를 구축했다. 이러한 글로벌 구조는 지역 사회의 자생적 발전 가능성을 억제하고 중심부에 대한 의존성을 더욱 심화시킨다.
글로벌 신자유주의는 세계 시장을 하나의 거대한 효율성 테스트장으로 변모시켜 모든 국가를 경쟁으로 몰아넣는다. 국가들은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법인세를 인하하고 노동 규제를 완화하는 '바닥을 향한 경쟁'에 내몰리게 된다. 도판 속의 '자본 통제'와 '이민 통제' 대비는 돈의 흐름은 자유롭되 사람의 흐름은 가로막는 신자유주의적 모순을 드러낸다. 국제 금융 기구들은 위기에 처한 국가들에게 가혹한 구조조정을 강요하며 시장 중심의 체질 개선을 명령한다. 이러한 압력은 개별 국가의 주권을 형해화하고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 논리로 통일하려는 메타 이데올로기의 발현이다. 글로벌 공급망의 복잡성은 생산의 분절화를 초래하여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자본에 대항하기 어렵게 만든다. 신자유주의는 세계를 연결하는 동시에 파편화함으로써 지배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지능적인 방식을 취한다. 이제 지배 권력은 특정 국가의 정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글로벌 시장의 네트워크 속에 숨어 있다.
신자유주의 메타 이데올로기는 '대안은 없다(TINA)'는 구호를 통해 대중의 상상력을 시장 내부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환경 문제나 빈곤 문제조차 시장 기전인 탄소배출권 거래나 사회적 기업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다. '시대정신'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이 어떻게 현대인의 보편적 상식으로 자리 잡았는지 시사한다. 모든 가치가 가격으로 환산되는 세계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들은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사라져 간다. 문화와 예술조차 콘텐츠 산업이라는 이름 아래 수익성을 증명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지배는 교육 시스템을 통해 재생산되며 다음 세대를 충실한 시장 주체로 길러낸다. 글로벌 미디어와 플랫폼 기업들은 신자유주의적 라이프스타일을 전파하며 문화적 동질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결국 메타 이데올로기는 우리로 하여금 시장 이외의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강력한 정신적 감옥이 된다.
이러한 글로벌 통제 구조는 데이터 주권과 인공지능 기술의 독점을 통해 더욱 공고해지는 추세에 있다. 소수의 빅테크 기업들이 전 세계의 데이터를 장악하며 디지털 영토를 확장하고 새로운 형태의 봉건적 지배력을 행사한다. 이는 '코드 체인지'와 '디지털 통치'는 기술이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무기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알고리즘은 소비 패턴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성향까지 분석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통치에 유리한 지형을 만든다. 글로벌 통제는 이제 군사력보다는 정보력과 금융력을 통해 더욱 은밀하고 효과적으로 수행되는 경향을 보인다. 개별 주체들은 디지털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는 착각 속에 살지만 실제로는 거대한 통제 시스템의 데이터 포인트로 관리된다. 이러한 기술적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고 통제함으로써 저항의 불씨가 당겨지기 전에 이를 차단하려 한다. 결국 글로벌 통제 구조는 기술과 자본이 결합하여 완성한 현대판 리바이어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사회 내부에 갈등을 조장하며 일종의 '내전적 상태'를 유지하는 장치임을 비판적으로 고찰해 보자. 경쟁 중심의 논리는 구성원 간의 연대를 파괴하고 각자도생의 원칙을 강화하여 사회적 저항의 동력을 조직적으로 분쇄한다. 이러한 '내전적 장치'는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승패의 결과로 받아들이게 하며 대중의 분노를 구조적 원인이 아닌 약자에게 돌리게 한다. 도판 속의 '내전'과 '대중혐오' 키워드는 신자유주의 통치가 어떻게 사회적 증오를 자산으로 삼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승자 독식의 구조에서 낙오된 자들은 서로를 원망하며 공동체적 회복을 위한 대화의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 국가는 이러한 갈등을 중재하기보다 법치주의적 엄벌주의를 통해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을 선호하며 긴장을 고조시킨다. 사회는 끊임없는 미시적 전쟁터가 되고 연대의 자리에 혐오와 시기가 들어차는 비극적 풍경이 펼쳐진다.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우리를 서로에게 적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지배력을 공고히 유지한다.
하지만 동시에 피에르 다르고와 크리스티안 라발 등이 제시한 미시적 대안과 새로운 합리성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미시적 차원에서의 대안 행동은 시장 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가치를 발견하고 회복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사유 재산권과 국가 소유라는 이분법을 넘어 시민들이 직접 자원을 관리하고 공유하는 새로운 거버넌스를 의미한다. '미시적 대안 행동' 은 일상 속에서 시작되는 작은 저항과 실험들이 연결될 때 거대한 변화가 시작됨을 시사한다. 마을 공동체, 협동조합, 오픈 소스 운동 등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에 균열을 내는 소중한 대안적 실천들이다. 이러한 활동들은 인간을 자본이 아닌 인격적 존재로 대우하며 경쟁이 아닌 협력의 즐거움을 일깨워준다. 새로운 합리성은 바로 이러한 현장의 목소리들이 모여 시장 중심의 논리를 대체하는 거대한 흐름을 형성할 때 완성된다. 우리는 이제 시장의 주체가 아닌 공동체의 주권자로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발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광범위한 연합과 새로운 사회적 계약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 위한 필수적인 정치적 과제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국가 주도형 복지 모델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민주주의가 결합된 새로운 시민 주도형 모델을 설계하는 작업이다. 오늘 강의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한 '광범위한 연합'과 '대안적 세계 합리성'은 파편화된 개인들이 다시 연결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기후 위기, 불평등, 기술 소외와 같은 전 지구적 난제들은 시장 기전만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성격의 문제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국경을 넘는 연대를 통해 글로벌 자본의 전횡을 감시하고 공통의 규범을 만들어가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정치는 경제의 하수인에서 벗어나 사회적 가치를 우선순위에 두는 본연의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 새로운 합리성은 효율성이 아니라 지속 가능성과 돌봄의 가치를 통치의 중심에 두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환은 우리 모두가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행동에 나설 때 비로소 실현 가능한 미래가 된다.
결국 신자유주의 이후의 세계는 통치 주체로서의 시민이 시장의 논리를 넘어선 공동체적 합리성을 어떻게 구축하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교육은 경쟁의 기술이 아닌 공존의 지혜를 가르치는 장으로 변모해야 하며 기술은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새로운 통치성'은 권력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구성되는 민주적 역동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시장이 준 성적표가 아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사회적 안전망을 다시 짜야 한다. 경제 성장의 지표보다 시민의 행복과 생태적 건강성이 더 중요한 정책 지표로 다루어지는 사회를 상상해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심어준 '대안은 없다'는 주문을 깨뜨리고 무수히 많은 대안이 이미 우리 곁에 존재함을 깨닫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이해관계의 복잡한 화살표들이 결국 '공통의 것'을 향해 수렴되듯이 우리의 실천도 연대의 지점에서 만나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인간의 얼굴을 한 새로운 문명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지적 계보를 확장하며 인간의 내면부터 글로벌 구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통치 체계를 완성해 왔다. 미제스와 하이에크의 이론적 토대 위에 구축된 이 체제는 푸코가 지적했듯이 고도의 통치성을 통해 주체를 생산하고 관리한다. 법치와 시장의 결합은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억제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사회를 무한 경쟁의 장으로 몰아넣었다. 또한 글로벌 메타 이데올로기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전 지구적 불평등을 고착화하고 자본의 지배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이러한 분석은 현재 우리가 처한 정치경제적 위기의 본질이 단순한 경기 변동이 아닌 통치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문제임을 시사한다. 신자유주의가 만든 복잡한 네트워크는 우리가 투쟁하고 극복해야 할 지배 질서가 얼마나 견고하고 정교하게 설계되었는지 실감하게 한다. 권력은 은밀하게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해 왔지만 분석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내는 과정 자체가 해방의 첫걸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만들어낸 내전적 상태를 종식시키고 다른 차원릐 새로운 세계 합리성을 구축하기 위한 지적, 실천적 노력을 결집해야 한다. 미시적 차원의 대안 행동들이 서로 연결되어 거시적인 변화를 견인할 수 있는 연대의 플랫폼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시장의 논리가 아닌 인간의 존엄과 공통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새로운 거버넌스의 설계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다. 디지털 기술과 AI의 발전이 소수의 통제 수단이 아닌 만인의 해방을 위한 도구로 쓰일 수 있도록 사회적 감시와 제도적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황혼기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갈등과 위기는 새로운 질서로 나아가기 위한 불가피한 진통이자 소중한 기회이기도 한다. 강의의 마지막에 제시된 대안적 세계 합리성과 다른측면에서의 새로운 세계통치성이 필요하다. 플랫폼 사회주의와 같은 것들 말이다. 이것이 구체적인 현실로 구현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경쟁하는 경영자가 아닌 연대하는 시민으로서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써 내려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