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콤앙마 Jan 24. 2024

5. 할머니

<동시로 시작해서 에세이로 마무리 5번째 이야기>


  작년 11월 첫 주의 금요일 저녁이었다. 

 나는 고단했던 주가 끝났다는 해방감과 다가 올 주말에 대한 기대감에 잔뜩 들떠 불금을 즐기고 있었다. 미뤄뒀던 미용실 예약부터 아이들과 놀러 갈 계획까지 유독 기다려지는 주말이었다. 

 

 하지만 그 설레던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휴대폰 진동이 울렸고 액정 창에는 엄마가 찍혔다. 우리 가족에게는 주말마다 양가에 전화 연락을 드려 한 주의 안부를 전하는 루틴이 있다. 그 말은 엄마가 굳이 주말을 하루 앞두고 별 이유 없이 전화를 했을 리는 없다는 거다. 또 툭하면 우리 딸은 늘 바빠서 전화 한번 하기도 조심스럽다고 너스레를 떨던 엄마 셨기에 머릿속에는 수많은 물음표가 찍혔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

 

 나는 평소처럼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민아, 할머니가 좀 전에 하늘나라로 가셨어.


 잔뜩 물기 어린 엄마의 목소리는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바로 나의 외할머니, 우리 엄마의 엄마가 향년 93세를 일기로 삶에 마침표를 찍으셨다는 거였다. 아흔셋, 사언제 돌아가신다고 해도 그다지 놀라울 것이 없는 나이라고들 하지만 할머니의 부고소식을 듣고 내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왜?"였다. 


 아직은 보내드릴 수 없었다. 우리 할머니, 손도 많이 잡아드리고 많이 사랑한다고 손녀 민이가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 꼭 말씀드려야 했는데, 이렇게 인사도 없이 갑자기 가실 줄은 정말 몰랐다. 

 

 엉엉 울고 싶었지만, 전화기 너머엔 방금 막 엄마를 잃은 가여운 우리 엄마가 있었다. 그런 엄마가 겨우 눈물을 참아가며 말을 이어가고 계셨는데, 그런 엄마한테 미안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엄마는 내게 아직 장례식장이 꾸려지지 않았으니 천천히 내일 오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갑작스러운 임종으로 마지막을 지킨 건 오직 둘째 이모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내 주변에서 자기들만의 불금을 즐기고 있던 가족들이 모두 내 옆으로 바짝 모여들었다. 나는 겨우 사실만을 전했다. 그리고 괜찮냐고 묻는 아이들과 남편에게 나는 지금 나만의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혼자 있게 해달라고 했다. 남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무뚝뚝한 첫째는 끝내할 말을 찾지 못하고 내 주변만 빙빙 돌다 나갔다. 다만 평소 애정표현이 많은 둘째는 가만히 나를 제 품에 안고는 한두 번 도닥여주더니 안방 문을 가만히 닫고 나갔다.  

 그렇게 셋을 다보낸 후에야 겨우 참았던 울음을 토해냈다. 할머니가 더는 나와 같은 세상에 안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더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졌다.  


 할머니는 13년 전, 그러니까 내가 결혼한 바로 다음 해에 외할아버지를 먼저 보내시고 혼자가 되셨다. 그러고도 한참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셨던 광주에서 생활하시다 집을 정리하시고 의왕에 계시는 외삼촌댁으로 올라오셨다. 그러자 할머니 뵙는 일이 수월해졌다. 뿐만 아니라 그 덕에 친정 부모님이 할머니를 뵙는다는 이유로 올라오셨다가 우리 집에 머물기도 하셨으니 내게는 큰 행복이었다. 


 원래 결혼 전에는 명절이면 빠짐없이 외가, 친가 인사를 갔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서울에서 경상도 시댁과  전라도 친정을 가로질렀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혹독한 일정에 외가, 친가 방문을 끼워넣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전화는 드렸지만 얼굴 뵙는 쉽지 않았었는데, 가까워지니 명절 전후로 꼭 삼촌댁에 방문해서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우리 할머니는 북에 아버지와 막내 여동생을 두고 어머니와 바로 밑 여동생과 함께 남으로 피난 내려오셨던 이산가족이셨다. 그러다 막내아들로 귀하게 자라 초등학교 교편을 잡으셨던 할아버지와 결혼해 8남매를 낳으셨다. 위로는 딸 넷, 아래로는 아들 넷 그렇게 남녀 짝 맞추듯 낳기도 쉽지 않으셨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하시다. 

 

 하루도 빠짐없이 가계부를 작성하시고 말 한마디를 허투루 하는 법이 없는 철두철미한 성격의 할아버지 곁에서 할머니는 많이 힘드셨을 거다. 

 사실 나도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국민학교 시절 외갓집만 가면 손자 손녀들 쪼르륵 앉혀두고 교장선생님 훈화말씀 하시던(실제로 교장으로 정년 하셨다.) 기억이 선명하다. 다리에서 쥐가 나고 몸은 배배 꼬이는데 할아버지는 그런 손주들의 불편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그런 다음 본인이 아껴 드시는 외국 과자를 꺼내 아주 조금씩 나눠주시고(워낙 단 걸 좋아하셔서 늘 챙겨두셨다.) 빳빳한 신권 천 원짜리 지폐를 손가락으로 눈앞에서 튕겨 보이시곤 나눠주셨다. 


 음;;; 당시 할아버지는 당신 호로 이름 지은 건물의 건물주셨다. 그런데 우리의 용돈은 늘 천 원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아무튼 그 당시 내가 본 할머니는 늘 별로 말씀이 없으셨다. 본인 말하시는 건 그렇게 좋아하시면서 할머니가 이런저런 말을 할라치면 면박주기 바쁜 우리 할아버지, 박영감님 때문이셨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건, 할아버지는 내가 외가에 갈 때마다 앉혀두고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 기억은 몽글몽글 눌러 담아 두려고 해도 자꾸 흘러나온다.


 겨우 천 원짜리 지폐 한 장도 생생 내며 주셨던 할아버지는 모르셨겠지만, 할머니는 가끔 나를 몰래 불 꺼진 방으로 끌고 가셔서 주머니에 무려 삼만 원을 찔러 넣어주셨다.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바로 입 위로 집게손가락을 들어 올려 비밀이라고 신호를 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자녀들, 그러니까 이모, 삼촌들이 할아버지 몰래 할머니를 쓰시라고 드리곤 했던 용돈이었다. 늘 인색하셨던 할아버지 곁에서 쓰고 싶고 갖고 싶은 것도 많으셨을 텐데 본인에게는 절대 안 쓰시고 그 돈 모아 자녀들을 위해 참기름을 짜서 나눠주시고 손주들한테 할아버지 몰래 용돈을 챙겨주셨던 거다. 


 내 기억 속에 할머니의 말씀을 제대로 듣기 시작한 건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였다. 그런 할머니가 내게 늘 해주시던 말씀은 이거였다. 


아이고, 이쁜 사람! 우리 민이가 하는 일은 다 잘 될 것이다!


 학교 다닐 적 공부를 조금 잘했던 것 빼고는 특출 난 거 하나 없는 손녀를 뭘 보고 그리 이쁘다, 다 잘 될 거라 하시는지. 늘 민망해서 손사래를 쳤지만, 할머니의 말씀은 주문처럼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런 할머니가 작년 초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셨다. 조금씩 조금씩 머릿속 기억들을 지워내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슬픈 병인 치매가 온 것이다. 


 결국 할머니는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처음엔 요양원으로 옮기신다는 말을 듣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막상 가보니 시설도 밝고 다양한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어서 마치 노인들을 위한 유치원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를 가족들이 단체로 뵈었던 날, 할머니는 계속 가족들을 알아봤다가 잊으셨다가를 반복하셨다. 


 그러다 내가 '할머니 손녀 민'이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민이가 서울 가서 아주 부자 됐단다.


나를 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시는 것 같았는데, 이 말씀만은 분명히 하셨다. 그러자 함께 있던 가족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그날 할머니 접견을 마치고 나와 부자 됐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내가 가족들께 차와 다과를 대접했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유언이 돼버렸다. 할머니는 그렇게 떠나버리셨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이제 고아가 돼버렸다. 철없는 딸은 엄마를 충분히 위로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엄마와 함께 우리 엄마의 엄마를 오래 추억할 것이다. 


우리 할머니, 보고 싶은 우리 할머니~

하늘에서도 우리 엄마랑 민이 많이 예뻐해 주세요. 


사랑해요. 할머니


 



 


 

작가의 이전글 4. 바퀴 달린 책가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