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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앙마 Jan 23. 2024

한때 엄청 빠져있던 것

한 달 쓰기 챌린지 열네 번째 날(2024.01.03의 기록)

#사십춘기, 나를 찾는 매일 글쓰기 

#한 달 쓰기 챌린지 

#한때 엄청 빠져있던 것


 한때 엄청 빠져 있었던 것?


 주제를 놓고 한참 망설였다.

 금사빠인 난 잘 빠지긴 하지만 또 잘 빠져나와서 '엄청' 빠졌다고 할만한 게 많지 않다. 


 사람? 먹을 것? 사는 것? 배우는 것?


  찾아서 쓸라치면 오늘 하루도 모자랄 것 같다. 사실 그중 제일 마음이 동했던 건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그건 한때 내가 빠졌던 다른 카테고리에 있는 것들과 동급으로 놓고 보기엔 내 인생에서 비중이 너무 크다. 

 

 결국 가볍지만 한때는 내게 정말 중요했던 것! 

 그리고 10년 이내의 것으로 국한해서 한 가지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바로 '한국사'다.  

2015년 하반기엔 난 '한국사'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한국사'가 나오기까지 다소 긴 서론이 존재한다.  

 

 당시 남편은 인도에 있었다. 2014년 8월에 태어난 둘째 백일 무렵 3개월 합숙교육을 받고 1년간 해외로 파견 나갔다. '지역전문가'라고 월급과 체류비가 그대로 나오면서 파견된 나라에서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고 체험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주재원과는 달리 가족이 함께 머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잠시의 방문도 허락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가 쪽 친척동생들은 남편이 그곳에 있다고 인도에 가서 함께 여행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정작 나와 아이들에게는 그런 시간이 전혀 허락되지 않았다. 


  '지역전문가'는 남편이 결혼 전부터 꼭 해보고 싶어 했던 프로그램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4살 첫째와 갓 태어난 둘째를 두고도 남편의 지원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격려하고 응원했다. 이를 두고 같은 회사 근무 중인 남편을 가진 부인들에게 두고두고 '대인배'라는 소리를 들었다. 자기라면 절대 안 보내줄 텐데 애를 둘이나 혼자 키워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보내주냐고 말이다. 사실 그때만 해도 늘 바쁜 남편이라 옆에 있어도 독박육아의 느낌이었던지라 그의 부재가 클 거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가 둘째를 낳고 잠시 복직했던 시기였던 터라 아이를 봐주시겠다고 어머님께서 지방에서 올라오셨었다. 양가가 다 지방에 있었기에 당연히 첫째는 혼자 독박육아로 키웠었다. 그런데 이번 둘째 때는 내가 잠시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듣고 손주들 남의 손에 못 맡긴 다시며 어머님께서 오시겠다고 하셨던 것이다. 남편도 남들한테 비싼 돈 주고 맡기느니 어머님이 혼자 계시니 아끼는 손주들 보시며 우리가 용돈 드리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고 했었다. 


 아무튼 그렇게 잠시 함께 지내게 된 어머님께서 남편이 이 파견을 지원한다고 할 때 내게 따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혼자 힘들 것 같으면 내가 도와줄 테니 남편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막지 말라고 말이다. 이미 그전부터 막을 생각도 없었고 오히려 결혼 전부터 그의 로망이었음을 알기에 흔쾌히 보내 줄 생각이었는데 사실 어머님의 그 말씀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그리고 실제로 남편의 파견이 결정된 후 어머님은 잠시였지만 너무 낯설었을 서울 생활이 숨 막히고 힘드셨다며 지방으로 내려가셨다. 


 결국 나 혼자 5살과 6개월 된 아기를 키우게 됐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할만했다. 5살 첫째는 어린이집을 다녔고 주로 낮시간엔 아가인 둘째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시련이 찾아왔다. 


 바로 2015년 6월을 강타한 낙타! 메르스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렇게 유난을 떨게 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삼성병원에서 환자가 속출했다. 어린아이들을 혼자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어딘가로 나간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때부터 첫째의 등원을 멈추고 첫째, 둘째 모두 집에서 혼자 돌봤다. 


 그렇게 한 달을 집에만 갇혀있다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보다 못한 친정부모님이 무조건 애들 데리고 내려오라고 하셨다. 두 분 다 맞벌이에 8시간 정규 근무를 하시는 분들이셔서 바쁘신데도 힘든 딸 더는 혼자 못 두겠다시며 불러주셨다. 철없는 나는 그 마음을 넙쭉 받고 남쪽지방 친정으로 달려갔다. 


 친정에서의 생활은 꿀이었다. 애 돌본다는 핑계로 집안일은 손도 안 대고;;;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철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난 그때 아이 돌보는 것만으로도 지치곤 했다.     


 '한국사' 이야기한다고 해놓고 여기까지 딴소리만 하다니. 아무튼 서론이 너무 길었다. 


 그렇게 6월 말 친정에 내려가서 8월에 둘째는 돌을 치렀다. 

 걷기 시작한 아이는 여기저기 꽈당 꽈당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시기에 도래했다. 분명 아이 보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그때 난 다른 생각으로 더 힘들었다. 


 바로 머리가 텅텅 빈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한 브레인 한다는 교사 집단에 속해있는 나였는데;; 두 아이를 출산하고 잠깐의 복직시기를 제외하고서 아이들만 키우는 데만 몰두하고 살았더니 점점 모르는 것 투성이인 무지렁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들어왔던 것이 바로 '한국사'였다. 갑자기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다. 아직 내 뇌가 다 죽지 않았다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교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까지 들었다. 그래서 무작정 11월 한국사 1급(고급) 시험을 접수했다. 9월 중순쯤에 시작했으니 3개월도 채 남지 않았었다. 

   

 그렇게 한국사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어리니 각 잡고 앉아서 공부할 수 없었다. 사실 원래도 책상 앞에 그렇게 오래 앉아 있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래서 귀로 듣는 공부를 시작했다. 목표는 최태성 선생님의 EBS 무료강좌 다 듣기! 내 기억으론 80강이 훌쩍 넘는 방대한 양이었다. 


 아이가 깨어 있는 시간은 힘들었다. 주로 낮잠시간이나 밤시간을 이용해서 들었다. 쉽지 않았지만 간절했기에 집중력은 배가 되었다. 그리고 최태성 선생님의 강의는 재미있었다. 또한 울림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애국심이 뿜뿜 상승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국사에 홀릭했던 시간을 거쳐 막판에는 기출문제들을 한두 번 훑어보고 시험에 임했다. 


  결과는 성공! 그것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때의 뿌듯함이란! 바닥을 치던 자존감이 다시 샘솟는 것 같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한국사가 나의 산후우울증을 치료해 줬던 듯싶다.  


#늘 서론이 장황하고 길다

#한국사

#다시 머리가 텅텅 빈 것 같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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