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내가 삿포로 여행을 떠난 날, 나는 다가올 결혼기념일을 맞아 꽃다발 하나를 예약했었다. 직접 분홍꽃, 노랑꽃 한 종류씩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꽃다발 가격에 맞춰 사장님이 구성해 주기를 부탁드렸었다. 오늘 아침 기다렸던 예쁜 꽃다발이 집으로 도착했다. 나는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며 꽃다발을 주었다. 아내도 결혼기념일을 축하한다며 꽃다발을 다시 내게 건넸다. 우리는 하나의 꽃다발을 서로 주고받으며 화사해졌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꽃을 잘 사지 않았다. 그렇다고 꽃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길가에 핀 꽃을 보면 한참을 서 있었다. 저마다 아름답게 꽃을 피워낸 모습이 신비롭다 생각했다. 꽃은 어떤 사진이나 물감으로도 재현해내지 못하는 고운 색깔과 코가 편안한 향기로움 가졌다. 꽃과 나란히 있으면 생기를 전해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꽃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꽃을 사서 선물하는 것이었다. 내가 받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뻔한 핑계라면, 무뚝뚝한 경상도 집안에서 태어나 꽃 선물을 못 보고 자라 서랄까. 경상도 역시 다른 지역처럼 수많은 꽃집이 있고, 내가 살던 동네에도 몇 개의 꽃집이 있었으니 환경 탓은 어렵겠다. 나는 꽃을 사서 선물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졌을 때, 일단 꽃집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는 모자란 성격이었다.
꽃집에서 산 꽃이 빨리 시든다는 것도 싫었다. 약품 처리를 해서 일부러 말려둔 꽃은 불쌍해 보였다. 영원히 잠들지 못하는 박물관의 미라 같았다. 언제고 화사할 것 같았던, 자신의 향기를 마음껏 뿜어 내던 꽃이 검게 죽어가는 모습이 싫었다. 시든 꽃은 처리도 쉽지 않은 쓰레기가 되었다. 그러니 꽃을 사기도, 받고 싶지도 않았었다. 그때 나는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모났던 마음이 가엽다.
적어도 꽃에 대해서라면, 다행히 지금은 예전보다 조금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다. 더 이상 꽃을 사는 게 싫지가 않다. 혼자 꽃집에 들어가고, 원하는 꽃을 고른다. 활짝 피었다가 슬쩍 지는 모습까지가 꽃이라는 걸 지금은 안다. 소멸이 있어 꽃의 지금이 더 아름답다는 것도.
나의 꽃은 물질이었다. 하지만 주고받는 꽃은 마음이었다. 마음이 오가는데 꽃만 보았었다. 지금은 이기적이었던 나를 인정하며 화사한 꽃다발의 아름다움을 즐긴다. 꽃(Flower)의 어원은 성장(bhel)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