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나메나 Jun 20. 2020

게와 새의 이야기

 사고와 표현의 오늘 수업은 박물관 견학이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이라니, 분명 학교에 관련된 뻔하고 재미없는 전시물만 많겠지.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고 학교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합정, 공덕, 약수, 고려대역. 고려대역? 아뿔싸! 안암역을 지나쳤구나. 지하철 오는 내내 졸았을 때부터 알아봤다. 나는 교양관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간다. 강의실에 도착하니 학생들이 복도에 모여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 나를 알아본 교수님이 초콜릿을 건넨다. 왁자지껄 떠드는 13학번들을 진정시킨 후 교수님은 박물관으로 앞장선다. 길가엔 꽃이 만발했다. 햇빛은 화창하다. 눈이 부신 나는 선글라스를 꺼내 낀다. 복학한지는 2달이 지났다. 대부분의 강의와 밥을 혼자 해결하며 학교생활을 해왔다. 외로울 법하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바쁘기도 하고 혼자 다니는 것엔 이골이 난 나니까.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도 역시 나는 혼자였다. 서로 친한 13학번들이 서로 하하호호 무리지어 간다. 오늘은 보통과는 달랐다. 군중속의 고독이랄까, 모두 제 갈 길을 가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쉬는 시간과는 달리 나말곤 모두 즐거웠다. 터벅터벅 박물관으로 간다.


 박물관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이라 자리를 비운 도슨트를 대신해 작품설명을 하시는 교수님의 말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듣지 못하였다. 우르르 몰려있는 1학년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이야기를 들을 자신은 없었다. ‘어차피 나는 설명보다는 작품의 느낌으로 박물관을 즐기는 타입이니까’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천천히 따라간다. 전시물은 예상대로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마저도 무너졌다. 고려대의 역사와 조선시대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도대체 고려대 경영대의 매년 신문광고 전시가 나에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무엇을 보고 감상문을 써야할지 점점 걱정이 되었다. 그냥 나의 관심사에 속한 담뱃대나 라이터, 재떨이를 보면서 ‘저거 가지고 싶다.’정도의 생각이 다였다. 수업 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 쯤 미술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감상문 소재를 찾아야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이것저것을 살펴봤다. 한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조중묵의 어해도. 모래밭에 네 마리의 게가 앞을 향해 나아가는 그림이었다. 직진하는 게들의 모습을 세로로 길게 잡아 그렸다. 화선지의 색깔이 모래를 연상케 했다. 두 마리의 큰 게가 다리를 넓게 벌려 위풍당당하게 앞장선다. 그 뒤로 또 한 마리, 꼴찌로 정말 작은 게가 다리도 못 펴고 앞선 게들을 쫓아간다. 순간 나의 모습이 그 꼴찌 게에서 보였다. 박물관까지 오는 길 혼자 맨 마지막에서 쓸쓸히 따라가는 내 모습. 그림속의 그 게는 한층 더 작아보였다. 움츠려있는 듯 했다. 선두에 선 게들은 13학번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뭉쳐 씩씩하게 걸어간다. 나의 게는 혼자였다. 혼자 나머지 게들의 뒷모습을 본다. 그 게의 돌출된 두 눈은 마치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듯 했다. 선글라스에 가린 나의 눈동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견학이 끝났다. 이제 다른 수업을 들으러 갈 시간이다. 교수님에게 인사를 하고 밖을 나온다. 햇빛은 야속하게도 화창하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헤어진다. 나는 홀로 남겨진다. 나는 담배를 꺼낸다. 담배를 태우며 눈부신 오후 무리를 지어 즐겁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나말곤 다 행복해 보였다. 내 모습이 초라해진다. 답답한 마음에 연기를 내뱉고 하늘을 쳐다본다. 맑은 하늘에 솜사탕 같은 구름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의 눈엔 구름마저 그들끼리 뭉쳐 다니는 듯 했다. 한숨을 쉬고 다시 거리를 보았다. 문득 ‘그들을 따라 굳이 종종걸음 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리를 지은 구름의 행렬 사이로 한 마리의 새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작가의 이전글 '적과 흑'을 읽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