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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나메나 Jun 20. 2020

’절대 부패할수 없는 자’, 로베스피에르

1. 로베스피에르의 혁명 이전의 삶

 로베스피에르는 귀족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평민 신분인 그의 집안은 대대로 아르투아 지역의 법률직에서 일했을 뿐이다. 변호사였던 그의 아버지 덕택으로 그의 가정은 나름 윤택한 환경을 로베스피에르에게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가 6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세상을 떴을 때부터 상황은 변하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변호사 직을 그만두고 방랑을 시작하다 결국은 자취를 감추었고 가장을 잃은 그의 가족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된다. 본인이 가장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이런 상황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점잖고 성실함이란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덕목을 키워갔다. 고통적인 유년 생활은 그의 급진적인 정치 이념에 한 몫했을 것이다. 그는 심지어 입을 옷이 없어 외출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성실하고 똑똑한 그는 그가 살던 지방의 주교가 주는 장학금을 받아 파리의 명문학교 루이르그랑 콜레쥬로 들어가게 되고 12년간 학업을 수행한다. 그 곳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던 로베스피에르는 대관식을 마치고 루이르그랑에 들릴 때 축사를 맡게되는 데, 여기에 재밌는 일화가 있다. 장댓비를 맞으며 진흙에 무릎을 꿇으며 열성적으로 축사를 낭독했던 로베스피에르에게 돌아온 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저 다시 길을 재촉했을 뿐이었다. 그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을 극렬히 주장을 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재밌는 일이 아닐 수 없다.


 23살이 되던 해에 그는 학업을 마쳤다. 파리에서 직업을 구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가정에 대한 책임감도 느껴 고향으로 내려가 아르투아 주의 변호사로 일한다. 다정하고 전도유망하며 뛰어난 변호사였던 그는 훌륭한 명성을 안게 된다. 예의 비범함으로, 또한 변호사로 일한 지 1년만에 판사를 겸직하게 된다. 이 때의 로베스피에르는 그의 미래를 아는 우리에게 상당히 흥미로울 수 밖에 없다. 그 때 그가 참여하던 아카데미 콩쿠르에 정치적 논문을 썼었는데, 그 내용이 재밌다. 그는 혁명을 부정했고, 구체제의 전면 개혁을 주장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죄를 선고받은 자의 재산 몰수’를 폐지 하자는 그의 주장은 미래의 방토즈 법령을 떠올리면 어이가 없을 정도이다. 심지어 사형을 구형해야 한다는 것에 절망하여 판사직을 사퇴하였다!


 하지만 불의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 때에도 그는 항상 약자의 편에 섰고 거침없고 가차없이 그의 정의를 위반하는 기득권층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행적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그의 적들도 생겨나게 했다. 그러한 와중에 1788년 삼부회가 소집이 예정되고 그는 찬성과 반대를 동시에 받으며 우여곡절 끝에 1789년 삼부회에 제 3신분 대표로 나가게 된다.


 2. 로베스피에르와 루소

 인간은 본래 자유인으로 태어났다는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프랑스 혁명과 로베스피에르의 정신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루소에 따르면 사회는 개인의 간섭을 제한하여서도 개인들 간에 주종관계를 만들어서도 안되며 그 자유를 억제하는 위기가 찾아올 때면 개인의 힘을 뭉친 공공적 힘으로 대항하고 그 순간에도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해야한다. 이러한 지극히 공화주의적인 루소의 사상은 더나아가 왕권신수설마저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은 로베스피에르는 “국민의 주권을 찬탈한 자는 폭군이다.“라는 말에 기대 루이 16세를 처형했고, ”국가가 형성되는 시기, 가장 파괴되기 쉬운 순간에 전쟁이나 기근, 폭동에 의해 국가는 전복된다.“라는 주장에 따라 지롱드 파가 주장했던 혁명 전쟁을 반대한다.


 로베스피에르는 그런 루소를 생애 내내 찬양하고 따랐다. 로베스피에르는 그를 실제로 만난걸로 전해진다. 이하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숭고한 이여! 당신은 내게 나를 아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중략)... 나는 노년의 당신을 만났고, ...(중략)... 전대미문의 혁명이 우리 앞에 펼쳐놓은 위험한 길 위에서 내가 당신의 글 속에서 끌어올린 영감에 변함없이 충실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는 평생을 충실히 따랐다.


3. 로베스피에르의 대두

 1793년 프랑스 혁명의 상황은 말그대로 사면초가였다. 외부로는 루이 16세의 처형으로 말미암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고 영국 군이 사방에서 침략하고 있었고, 식량난과 공황은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프랑스의 화폐인 아시냐는 전쟁으로 인한 국가 재정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무한정 발행되었고 이는 아시냐의 가치 하락으로 이어져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해 국민들의 살림살이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국내외 위기는 반혁명세력의 득세로 이어졌다. 프랑스의 총사령관은 두 번이나 반란을 시도했다가 국외로 망명하였고 프랑스 정부는 사실상 파산 직전이었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혁명의 중심 파리에 대한 반란들이 일어났다. 프랑스의 80개 현 가운데 60개의 현이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 중에선 나폴레옹 시기까지 이어지는 방데 반란이 있었는데, 이는 프랑스 방데 지역의 가톨릭 사제, 반혁명 귀족, 농민들이 봉기한 사건으로, 바람 앞에 촛불인 프랑스 혁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국민 공회 안에선 점점 온건파인 지롱드파가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곧 일어난 지롱드 파인 뒤무리에 장군의 반란은 지롱드 파의 몰락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결국 분기탱천한 파리 시민들은 국민공회를 포위하고 지롱드 파의 제명을 요구했고 이는 받아들여져 지롱드 파의 운명은 사실상 여기에서 마무리된다.


 지롱드 파의 몰락은 산악파의 국민 공회 장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산악파를 이끄는 리더는 바로 로베스피에르였다. 그에게는 위기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답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포’이다. 그의 주장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추구하는 자유에는 미덕이 필요하고 그 미덕을 프랑스 민중은 아직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철저한 공포로 그들의 부덕을 물리치고 자유의, 민주주의의 미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지론을 중심으로 그는 바로 행동에 들어간다. 첫 단추는 혁명을 뒤집으려는 분자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것이었다. 공포 정치 동안 파리에서만 1400명, 전국 적으로는 2만명이 처형당했다 알려졌다. 이 중에는 마리 앙투아네트, 라부아지에 등 굵직굵직한 인물들도 포함되었으며 같은 자코뱅파인 당통과 에베르도 속해있으니 가히 공포 정치라 말할 수 있겠다.


 그는 새 헌법을 만들어 민주주의적 투표의 꽃인 보통선거를 실현시켰고 재산권을 넘어선 국민들의 생활권을 보장하였다. 나라 안팎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징병제를 시행했으며 최고가격제를 통해 국민들의 살림살이를 안정되게 해주었다. 방토즈 법을 통해 반혁명 기득권층의 재산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로베스피에르의 대두의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계속되는 전쟁에서의 승리이다. 재밌는 것은 로베스피에르가 이전에는 전쟁을 찬성했던 지롱드파에 맞서 혁명 전쟁을 반대했다는 것인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정규군이 아닌 프랑스 군은 질 것이며, 군사 독재자의 출현이 뻔하다는 것이다. 과거야 어쨌든 로베스피에르의 군은 승승장구한다.


4. 로베스피에르의 정책들

ㄱ. 혐의자 법

 로베스피에르가 이 법을 제정하기 전까지 반혁명 혐의자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었다. 이 법은 여섯개의 기준으로 반혁명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기반을 세웠다. 하지만 너무 추상적이고 광범위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길 가능성이 높았고 결국에 로베스피에르가 그의 공포정치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처형할 수 있는 단초를 주었다.


ㄴ. 혁명재판소 설치

 로베스피에르는 법을 토대로 재판을 열어 반혁명주의자들을 쉽게 제거할 계획을 세웠고 혐의자 법을 통해 법을 그의 입맛대로 맞추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재판이다. 지금까지의 재판은 너무 번거롭고 상소도 가능해 그의 청사진에는 맞지 않았다. 따라서 그와 자코뱅 파와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재판소를 설치한다. 판사와 배심원은 자코뱅파 일색인 공회가 입맛대로 임명하였고 상소가 허락되지 않았다. 이러한 약식 재판 또한 공포정치를 수행할 수 있는 기본 기구였던 것이다.


ㄷ. 프레리알 22일 법

 이 법의 주요 골자는 “모든 시민에게 반혁명 분자를 파악하고 치안 판사 앞에 그들을 데려 오기 위해 권한을 준다. 반혁명적인 행위를 발견한 것은 바로 그것을 비난하는 것이 요구된다 ." 이다. 조르주 쿠통이 제안했고 로베스피에르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통과하였다. 이 법으로 반혁명 의심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재판의 간소화가 이루어졌고 오로지 배심원의 심증만으로 처벌을 내릴 수 있었다. 이 법에 의해 유죄를 받은 피고는 무조건 죽임을 당했으므로 여기서 처벌이란 사형을 의미한다.


ㄹ. 방토즈 법

 방토즈 법은 처벌받은 된 반혁명 분자들의 재산을 몰수해 가난한 농민에게 나누어주게 하는 법을 뜻한다. 생쥐스트가 제안한 법으로, 로베스피에르와 그는 이 법을 통해 하층 계급들의 생활고를 덜어주고자 했고 동시에 그들의 지지도 이끌어 내자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이 법은 실행되지 못하다가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후 폐지된다. 


ㅁ. 최고가격제

 아시냐의 가치 하락으로 인플레이션은 최고조에 이르고 농민들의 고충은 심해질 대로 심해졌다. 로베스피에르는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최고가격제를 실시한다.

ㅂ. 국민 총동원

 로베스피에르가 집권할 때에 가장 중요하고 필요했던 것은 전쟁에서의 승리였다. 어떻게 보면 전선에서의 위기 덕분에 로베스피에르는 실권을 잡게 되었고 그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한다. 병사들에게 연공서열이 아닌 실적에 따른 승진 기회를 제공함으로 사기를 진작하였고 공안위원회의 의원들을 전선으로 보내는 것 또한 병사 사기 진작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징병이었다. 그는 18세 ~ 40세의 전 남자에게 군복무를 강제하는 국민 총동원령을 실시해 혁명 전쟁을 실행할 기반을 마련한다. 군인들만 아니라 노동자들과 과학자를 동원해 군수용품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ㅅ. 보통 선거

 이전에 선거는 일정 나이 이상의 남자 성인이라면 누구나 투표할 수 있는 보통 선거가 아니라 어느 정도 이상의 세금을 낸 사람만 투표를 할 수 있는 제한 선거였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이를 바꾸어 모든 남자 성인이 투표할 수 있게 헌법을 바꾸었고 이는 근대 민주주의 헌법의 기초가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이 보통 선거로 민주주의의 기틀을 닦았고 동시에 상퀼로트의 지지를 얻는 데도 성공한다. 하지만 아직도 남자 성인만이 투표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여권에 대한 의식 성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ㅇ. 보통 교육

 보통 선거에는 국민들의 의식 성숙의 뒷받침이 필연적이다. 그는 교육 제도의 개혁을 통해 초등 교육을 의무화 시켰다. 다른 교육 제도의 정비는 물론이다.


5. 로베스피에르의 몰락

 로베스피에르의 여러 가지 개혁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포 정치는 점점 국민 공회와 국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다. 프랑스의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위기들은 대부분 수습되었으니 그가 집권할 당시의 배경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중소 농민들은 봉건주의적 제도에서 멀어졌고 자신의 토지를 갖게되어 생활 기반이 안정되었고 그들은 급격히 보수되었다. 이는 반혁명적 분위기를 만연하게 하였다. 그가 중소 농민을 위해 행했던 정책들이 그의 목을 쥔 것이나 다름 없다. 로베스피에르가 숙청한 당통파와 에베르파 잔당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그의 정적들은 그를 제거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게 되었고 그에 관련한 나쁜 소문들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여러 법령을 제정할 때에 도외시 되었던 치안위원회도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공세를 취했다. 


 위기를 느낀 로베스피에르는 테르미도르 8일에 국민 공회에서 연설을 하게 되는데 자신의 결백함과 반혁명세력을 타도하자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는 공회 내에 수많은 반동세력이 있고 그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외쳤지만 그는 한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은 반동세력의 정확한 명단을 밝혀 처단하지 않은 것이다. 그저 반혁명세력을 처단해야 한다는 그의 연설은 반혁명세력 이외에 다른 의원들에게도 큰 위협이 되었다. “혹시 나도?“하는 생각이 모두의 머리 속을 헤집어 놓았다. 만약 로베스피에르가 한 명 한 명 이름을 말했다면 반혁명세력들만 그의 적이되었을 테지만 이제는 중도파들 조차 로베스피에르의 적이된다. 너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므로 자신도 예외로 둘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테르미도르 9일 로베스피에르는 반대파들의 요구에 의해 체포되고 다음날 형장의 이슬이 되고만다.


6. 로베스피에르의 의의

 로베스피에르는 단순한 살인귀, 독재자가 아닌 좀 더 복잡한 인물이었다. 물론 그가 수많은 사람을 처형한 학정의 장본인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한 비난을 하기 전 그 학정의 배경과 의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로베스피에르 집권 전 상황은 말그대로 최악이었고 혁명의 진행, 더 나아가 완성을 위해서는 꼭 어떠한 변곡점이 필요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반혁명 세력을 척결하고 민심을 수습해야하는 과제가 프랑스 혁명의 앞에 놓여졌던 것이다. 이 때 등장한 것이 로베스피에르였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공포 정치였다.


 그가 끝까지 만들고 지키려 노력했던 것은 바로 인민의 자유였다. 인간의 천부인권을 인정하고 찬양했다. 보통 선거, 의무 교육, 생존권 보장 등 그의 정책들이 말해주는 만큼 그는 정치 인생 전부를 자유에 바쳤다. 비록 이들 중 대부분이 현대에 와서야 대부분 구축되었지만 이 정책들의 기조들은 지금도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것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민주주의의 살아있는 화신인 것이다.


 사회주의에도 그가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비록 마르크스는 로베스피에르가 거대한 착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방토즈 법, 토지의 소유 제한 등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회민주주의적 사상이 이후 사회주의자들, 러시아 혁명에 이념적 배경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레닌은 그를 미완성의 볼셰비키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는 혁명가들의 혁명가, 혁명의 근대적 모델이었다.


 자유를 위해서 가끔은 일정 기간동안 자유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이 로베스피에르의 철학이자 신념이었다. 물론 이 문장은 악용될 소지가 매우 크다. 독재자가 국민의 자유를 억제시키기 위해 너무나 좋은 변명거리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떠한 정도의 자유를 위해, 얼마나의 기간 동안, 얼마나 자유를 희생시켜야 할 지는 언제까지나 의문점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특유의 냉철함과 지성으로 정확히 이 의문점을 해결했고 이를 해내었다. 혁명이 성공하고 자신의 잇속을 챙겨 기득권이 된 후 상황에 안주하는 이들도 무수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그러지 않았다. 혹자는 로베스피에르의 죽음과 함께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 끝났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말했듯이 로베스피에르의 이러한 철학은 타락할 위험이 크다. 시작한 의도는 좋았을 지라도 권력의 달콤한 맛을 느낀 사람은 변절의 가능성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의 중심에는 그가 있었고 그는 바로 ‘절대 부패할 수 없는 자’, 로베스피에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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