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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Sep 11. 2020

이렇게 며느리가 된다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남편이 출근해 아이와 단둘이 있는 주말이었다.
그날따라 아이는 할머니한테 다녀오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할머니는 지금 일을 하고 계시고, 엄마는 할머니가 일하시는 곳을 알지 못한다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내가 길을 알아! 내가 찾아갈 수 있어!"라며 오히려 큰소리다.

사실 요 며칠 폭염이 내리쬘 때마다 시어머니 걱정이 들곤 했다.
시부모님은 평생 장사를 하셨다. 시장 좌판에서 시작해 당신들 소유의 가게까지 키워내신 분들이라고 했다. 가게는 시아버지가 편찮아지실 즈음 처분을 하셨다고 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지인분의 가게에서 여전히 장사 일을 하고 계신다. 자식들에게 기대지 말고 스스로 살라는 아버지의 유언도 있었지만, 어머니가 아직 젊기도 하시고 평생 일을 하셔서인지 손에서 일을 놓으시지 못하시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큰며느리다. 결혼하고 6개월 만에 시아버지 앞에서 또박또박 말대답을 해 이혼 직전까지 상황을 몰고 갔던, 그래서 남편을 아버지와 나 사이에서 샌드백 만들어 그 여린 가슴을 멍투성이로 만들었던 그런 며느리다. 그땐 이혼을 할 때 하더라도 더 이상은 굽히고 싶지 않았다.
사실 우리의 결혼은 시작부터 소란스러웠다. 돌이켜보면 그때 접었어도 좋았을 혼사였다.
통상 안사돈들끼리 결정하실 일까지 전부 시아버지께서 관여를 하셨는데, 그러면서 갈등만 깊어졌다. 평생 남편 그늘에서 그림자처럼 사셨던 어머니도 아들 혼사에 당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으셨을 텐데 말이다. 문제는 양쪽 모두에게 있었다. 시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실 수는 없어서 아들 편에 따로 말을 넣어 혼란스럽게 하셨던 어머니는 급기야 예비 사돈 앞에서 인사를 하던 와중에 시아버지의 의견과는 관계없이 당신은 이바지를 받고 싶으시다는 의견을 내시다가 반말을 하셨고, 우리 엄마는 그 상황에서 바로 정색을 하지 않고 나중에야 딸에게 이야기를 꺼내셨다. 아무리 아들 가진 집이라지만 열 살이나 많은 사람에게 반말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그날 밤 엄마가 말했다. 하여간 그랬다. 이런 일들이 소소하게 많이 쌓였다.
결혼을 준비할 때는 저러했고 결혼을 한 이후에는 그러했다.
우리는 서로를 아꼈지만 미워했고, 챙겼지만 서로 싸우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는 그런 관계였다.





폐암을 앓으시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아이를 출산한 지 70여 일 갓 지난 산모였다. 한겨울에 어린 아기를 데리고 빈소를 지켰다. 시고모 댁 사촌으로부터 젖먹이를 친정에 두고 홀로 와서 빈틈없이 빈소를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2년 후 내가 암에 걸렸다. 어린아이를 끼고 키우며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는다는데, 남편의 집안에서는 아이의 안부를 묻는 문자 한 통이 없었다. 나중에야 연락이 닿은 시고모님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연락을 못했다 하셨다만, 홀로 힘들었던 순간마다 시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던 그 순간이 생각이 나곤 했다.
나는 큰애들을 용서할 수 없는데 당신이 그러라고 말만 하고 떠나면 나는 어떡하느냐 울부짖으시던 시어머니의 모습이 종종 떠올랐다. 어른이 그러실 수도 있지 가부장적인 시아버지께 감히 순종도 하지 않더니만 저렇게 벌을 받는 것이라고 그 집안 식구들끼리 모여 하하 호호 수군거릴 것 만 같았다.
그건 가부장이 아니라 상대 집안 여식에 대한 폭력이고 무시인데 말이다. 하긴 그걸 아는 집안이라면 여자를 그렇게 하대하지는 않았을 테다.

암 수술을 받고 그다음 해 친정아버지를 여의었다. 항암 중이라 머리털이 하나도 없어서 상주인 나는 가발을 쓰고 빈소를 지켰다. 그 빈소에서 오랜만에 시어머니를 뵈었고, 내가 항암 투병하는 사이에 시집을 왔다는 손아래 동서를 처음 만났다.
장례식장에 처음 오는지 빈소에서 눈을 빙글빙글 굴리며 실실 웃는 그 얼굴을 한참 쳐다보고 있는데, 어머니가 내 손을 덥석 잡고 안아주셨다.
"너 힘들어서 어쩌니. 엄마가 도움이 못되어 늘 미안하다. 너도 힘들겠지만 홀로 되신 엄마 잘 챙겨드리고, 건강해라. 부디 건강해라."


그 후로 가끔 연락을 드렸다.
전염병이 돈다 하니 마스크 꼭 챙기시라고, 폭염이 심한데 어찌 계시느냐고.
내 부모의 일에 우리 집안 자손들보다 더 충실이 예를 다 해주는 남편이 고마운 이유도 있었고, 살다 보니 시어머니가 같은 여자로서 이해가 되기 시작한 연유도 있었다.
그해 어머니 생신에는 시아버지랑 사시며 평생 드셔 보시지 못한 음식을 대접해드렸다. 음식부터 옷, 헤어스타일까지 전부 아버지의 취향에 맞춰야 했던 어머니의 일생을 아는 남편이 처음으로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했던 날이기도 했다.




당장 할머니를 만나러 가겠다고 서두르는 아이를 달래 가며 반찬을 만들었다. 더위에 좋다는 반찬을 만들어 어머니가 남편 편에 들려 보내셨던 빈 반찬통을 채웠다.
가서 인사하고, 간 김에 시장 보고, 짐이 무거우니 내가 어머니 댁에 넣어두고 오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남편이 비번을 안 알려주면 경비실에 맡기지 뭐.

어머니가 일하시는 큰 시장 옆 블록에 주차를 했다. 길을 건너 시장으로 들어서자 아이는 골목을 거침없이 걸어 할머니가 계시는 가게를 찾아냈다. 아빠랑 몇 번 놀러 갔던 시장이라고, 그 어린것이 길을 외워버린 모양이다.
내 새끼가 똑똑하다며 아이를 안아주시고 뽀뽀세례를 하시던 어머니께서 서둘러 집에 다녀오자 하셨다.  영문을 모른 채 따라갔더니 무언가를 내 가방 안에 빛의 속도로 집어넣으시며 집에 가서 열어보라 하시고는 다시 시장으로 데려다 달라하셨다.
"그냥 너 시집올 때 너무 못해준 게 내내 미안해서.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남부럽지 않게 키운 딸인데 그 딸이 받은 함 가방에는 그 흔한 금가락지 하나가 없었다. 어차피 양가 도움 없이 시작하는 것이었으니 둘이 마음 맞춰 잘 살면 고생스러워도 다 이뤄진다 하셨지만, 우리는 보낼 만큼 보냈는데 내 딸이 그런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에 부모님이 참 속상해하셨다. 그랬던 때가 있었다.
그래도 나중에 다 받았는데, 이것도 아버지께서 어머니와 상의 없이 하신 것이었을까.

어머니를 내려드리며 보니, 첫 명절에 아버지를 모시고 가 돋보기안경을 맞춰드렸던 안경점이 눈에 들어왔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기 바빴지만, 그래도 그날만큼은 온전히 기뻐하셨던 시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며느리와 큰아들에게 귀한 마음의 눈을 선물 받으셨다며 어찌나 기뻐하셨던지.
그래서 가족들은 입관할 때도 그 돋보기를 관에 넣어 보내고 싶어 했었다.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열었다.
현금 30만 원과 골드바가 들어있었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 공임을 하지 않았으니 그 현금으로 예쁜 걸 만들어 가지라는 말씀도 함께였다.
"어머니, 이렇게 큰 선물 안 주셔도 되는데요.."
말 끝을 더 잇지 못하는 내게 수화기 너머로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한테 늘 미안하고 고마워서. 없는 집에 시집와 잘 살아줘서 고맙다. 엄마가 돈 더 많이 벌면 더 좋은 거 해줄게. 싸우지 말고 건강하고. 너무 속 끓이며 살지 마. 아프면 안 돼."
나는 어떻게 말을 더 이어야 할지 몰라 그저 건강하시라는 말 밖에는 하지 못했다.


"나도 골드바 구경 좀 하자. 어때? 좋아?"
퇴근해 집으로 온 남편의 첫마디였다.
가볍게 "응!"이라 하기에는 그건 좀 아니고, 그렇다고 아닌 것도 아닌지라 벙어리처럼 서 있었다.

"별로야? 싫어?"
아니. 좋지.
감사하고 좋은데, 어머니가 어떻게 일하셔서 주신 건지를 아니까. 마냥 좋아하긴 좀 그래.
...

그가 말했다.
그냥 마음 편하게 받아. 엄마가 예전부터 주고 싶어 하셨어. 그리고 우리도 다 그렇게 키우셨어.
그냥 감사하게 마음 편하게 받아.
안 그럼 내가 가진다!




벌써 두 달이 훨씬 지난 일이다.
그날 받은 공임비는 남편에게 용돈으로 줬다. 아마 그는 어머니께 용돈으로 돌려드렸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선물에 작은 메모를 붙였다.
이렇게 며느리가 되고 시어머니가 된다-고.

남편에게 이런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아버지 때도 그랬고, 나는 어머니랑도 말을 오래 섞으면 계속 문제가 생기잖아. 근데 이제는 이유를 알겠어. 나 기분 상하라고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그냥 쓰실 줄 아는 어휘가 그 정도인 뿐인걸. 나쁜 분이 아니고 나쁜 마음에서 하신 말씀이 아닌데, 그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줄을 모르는 분이어서 그랬다는 게 이제는 이해가 돼."
이제는 독 바람 치던 선릉 한복판에서 우리 엄마에게 반말을 하셨던 시어머니의 상황이 이해가 된다.
그래서는 안됐지만, 하늘 같은 남편의 결정을 뒤에서 번복하자 말하는 그 입장에서는 얼마나 심장 떨리고 긴장되는 순간이었을까. 아들 장가보내며 생전 처음 명품 백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으셨을까. 그러니 비록 상대 집안에 보낼 함은 좀 비었어도 "이런 거 또 사줄 거야?"라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어보셨을만했지. 큰아들을 장가보내고 드디어 나와 같은 성별의 여자가 집안에 들어왔는데, 기대와는 다르게 고분고분하지 않아 괘씸하고 속이 상했을 그 심정도 이해가 된다. 상대적으로 없는 집안에 해 준 것 없다고 괄시하나 싶기도 하셨을 테다. 그 며느리가 애교도 많이 부리고 말도 잘 듣고 존경도 해주면 참 좋겠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지가 제일 잘난" 것한테 무시당한다 싶어 더 화가 나기도 하셨을 테고 말이다.  
급기야 지 잘난 맛에 사는 이것은, 이 순간에도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고마운 것은, 아니 감사한 것은 내가 어머니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처럼 어머니도 그러하다는 점이다.
두 분의 형편이 우리보다 못해서 무시했던 게 아니라는 걸.
선 긋기 잘하고 친정부터 먼저 챙기는 큰며느리지만, 그래도 걱정하며 그 나름대로 챙기고 있다는 걸.
야는 야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가정을 지키고 있다는 걸.

어머니도 나도 고부관계는 처음이라 서로 서툴고 어려웠을 뿐이라는 걸.

집에 차에 명품 백과 밍크코트, 캐럿 높은 다이아반지가 부러웠던 때가 있었다.
양쪽 다 여유 있게 주고받으며 시작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출발일 테다. 하지만 돈으로 존경과 순종을 맞바꿔야 하는 결혼이라면, 글쎄다 나는 과연 고개를 숙일 수 있었을까. 고개를 숙이지 않은들 누가 듣기나 했을까.
하긴. 아직도 아들 가진 것은 조선반도 가장 큰 유세 거리여서, 며느리를 종놈의 종 부리듯 대하는 집안이 있다고 한다. 지인의 말처럼, 이런 와이프 모시고 살며 가운데서 샌드백에 메신저 역할을 조용히 감당하는 남편을 만난 것도 복이다.
살다 보니 그렇다.
결혼을 한다고 해서 어른이 되고 부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니다.
법적으로 가족이 되었으니 며느리가 되고 시어머니가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나라는 사람은 그런 것 같다.
부부의 연을 맺고 자식 낳아 키우는 동안, 세월이 쌓이고 오해가 풀리고 이해와 마음이 닿아 며느리가 되고 시어머니가 되는 것 아닐까.

이렇게 며느리가 되고 시어머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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