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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수 Sep 11. 2019

자녀들은 왜 그렇게 '귀찮아' 할까?

자녀가 가지고 있는 <귀차니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청소년을 만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구분선도 없다. 구분선을 정한다는 건 청소년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곤란하고 당혹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학교를 다니면 학교를 마치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주말이면 시간이 많을 것 같지만 친구들과의 재밌게 보내는 시간을 보장해주고 그다음에 나와의 시간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에게는 합리적이고 이해 타당한 제안이 되는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비행을 하고 있는 청소년 대부분은 나쁜 짓만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어린 나이에 그들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안쓰러운 친구들도 있고 또 비행과는 별개로 용돈 정도는 자기가 벌어야 한다는 꽤 어른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도 많다. 오늘 이야기는 비행은 하지만 자기 용돈은 자기가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의 이야기를 가지고 청소년들의 <귀차니즘>에 대해 한 번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연구하고 있는 <주제> 때문에 전국을 다니면서 위험에 처한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다소 비리고 물기가 묻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일은 지적 희열만큼이나 꽤 즐거운 일이다. 언제 들어도 놀랍고 신기하고 또 아프고 그러면서 나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당탕한 과정에서도 이야기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참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대부분은 풀어헤쳐서 정리하는 데만 시간이 꽤 걸린다. 청소년들과의 만남은 대개 당일 안에 끝나기도 하지만 지방에서도 꽤 거리가 있는 친구를 만날라치면 주저 없이 1박을 감행해서라도 만나야 한다. 그렇게 연구 때문에 만난 청소년들이 3개월 사이에 수십 명이 넘으니 내가 타고 다니는 자가용은 꽤나 힘들고 지칠 만도 할 것이다.


에피소드의 시작은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방에서 근무하는 경찰 후배로부터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을 소개받았다. 내가 연구하고 있는 주제와 깊은 관련이 있어서 이 친구는 꼭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소개받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학생에게 메신저를 보냈더니 답장이 없었다. 답장은 내가 기대했던 날짜보다 훨씬 지나서 도착했다. 그래도 고마워서 나는 학생이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맞춰 약속을 정했고, 일주일 뒤 약속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그런데 출발하고 30분이 지났을 까? 막 지방 국도를 들어갔을 즈음 학생으로부터 메신저를 받았다. 오늘 말고 다른 날에 만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약속이 깨진 것 때문이 아니라 혹시라도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싶어 이유를 물었지만 학생은 그리 시원하게 이야기를 해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하고 단번에 그럴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줬고 학생은 추후 일정에 대해서는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연락은 여전히 없었다. 이 정도 기다리면 내 입장에서는 조심스레 메신저로 연락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래서 일주일하고 하루가 지나서야 나는 조심스레 메신저로 안부를 물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생각보다 빨리 메신저를 읽어주었고 나름 미안했던지 물어보지도 않았는 데 스스로 3일 후로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정해 주었다. 두 번째 약속은 어땠을까? 역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니,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또다시 약속을 다음으로 미뤄야겠다고 통보해 왔다. 그래도 나는 늘 똑같다.


"어쩔 수 없지. 괜찮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럴 수 있으니까"


오히려 또다시 지방 국도에서 연락을 받지 않은 것이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다시 연락을 달라고 했지만 이후로는 어떠한 연락이 없었다.

한 번씩 메신저라도 보내면 요즘 너무 바빠서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했고, 그래도 괜찮다고 나는 다소 여유 있고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끈질긴 노력이 청소년들을 만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조금 더 기다려 보았다. 그러나 답은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훌쩍 지나고서 이제는 정리라도 해야겠다 싶어 학생이 학교를 마칠 시간에 맞춰 메신저가 아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일정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더니 '고깃집'에서 밤 11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때다 싶어 마칠 시간에 맞춰 아르바이트 가게 근처에서 기다릴 테니 같이 밥이라도 먹을 수 있냐고 물었다. 학생은 의외로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답을 주었다. 이건 또 뭐지?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서둘러 봇짐을 챙겨 지방으로 차를 몰았고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서 한 시간 가량을 차에서 책을 읽고서야 그 친구를 만났다. 학생은 마른 체격에 요즘 아이들이 잘 입지 않는 하얀색 남방셔츠를 입고 있었다. SNS 프로필만큼 외모 또한 훈훈해 보였고 나를 보자마자 머리를 긁적거리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서 인성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밥>부터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먹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었더니 학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국밥>을 먹고 싶단다. 남학생들의 경우 대부분은 고깃집에 가자고 하는 데 <국밥>이라니? 청소년들에게 먹고 싶 것을 물어보면 보통은 고깃집이나 치킨, 피자 같은 자극적이거나 인스턴트 하거나 아니면 조금 값비싼 음식을 좋아할 것 같지만 의외로 아이들 중에는 <국> 같은 밥 종류를 좋아하는 친구들도 꽤 많다. <밥>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면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속으로는 마음이 여며지는 것이 있다.


어찌 됐건 지금까지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 안쓰러워 <국밥>도 시키고 추가로 <수육>까지 시켰다. 그러고 보니 라포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밥>만큼 좋은 건 없다는 데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국밥을 먹으려고 하는 와중에 종업원을 불러 '양념장'을 달라는 학생의 목소리에서 여느 또래의 아이들보다는 수준이 조금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식당 옆 커피숍에서 따뜻한 디저트를 곁들였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레 처음 약속을 미뤄야 했던 일에 대해 잘 해결되었는 지를 물었고 아이는 다시 머리를 긁적거리며 솔직하게 귀찮아서 일정을 연기했다고 태연히 말해 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일정을 미룬 것도 역시 똑같은 이유였다.


"그냥 귀찮아서 안 나갔어요."


그럼 오늘은 왜 약속을 흔쾌히 허락했냐고 물었더니 아르바이트를 마치면 어차피 집에 가서 밥도 못 먹는 데 돈도 아끼고 또 식사하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허락했다는 것이다. 속으로 밥 먹자고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다행스럽게도 큰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귀찮아서 일정을 바꿨을 뿐이다.


청소년과 만나다 보면 이런 일은 허다하다. 그래서 기분 나쁜 일도 아니다. 그냥 아이들은 원래 이렇고, 또 이렇게 해야 '아이'라는 나만의 논리가 만들어진다. 유독 이 친구는 <귀차니즘>이 많은 친구였다. 내가 만났던 아이들 중에도 <귀차니즘>을 가진 친구들은 꽤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이제 이야기하려고 한다. 아마도 우리 자녀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귀차니즘>에 대해 알고 나면 자녀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자녀들의 <귀차니즘>에는 분명한 구조가 존재한다.  이 것은 <비행>과는 전혀 별개의 형태다. <귀차니즘>이 출발하는 시점은 어떤 제안이 들어왔을 때 <사고 단계>에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귀차니즘>과 비교되는 것이 바로 사고 단계에서 즉각적으로 구분되는 <게으름>이다. 즉, <게으름>과 <귀차니즘>은 엄연히 다른 구조라는 것이다. 쉬운 예로, 약속을 했는 데 지키고 싶지 않은 감정이 끼어드는 것은 <귀차니즘>이다. 그러나 약속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은 <게으름>이다. 물론 약속 자체를 하기 귀찮아하는 것이 <귀차니즘>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엄연히 구분하면 <귀차니즘>에는 <동기>가 없다는 뜻, 즉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발현되는 감정이 존재한다. 하지만 <게으름>은 동기와 상관없다. 감정의 패턴 자체에 <의지>가 없다는 것을 눈여겨보면 된다. 그렇게 본다면 <게으름>은 타박의 대상이 되겠지만 <귀차니즘>은 타박보다는 이해를 필요로 하는 장르가 될 것이다.


<귀차니즘>이 심한 자녀는 기본적으로 수준이 높은 모습을 보인다. 상대적으로 또래 친구들과의 수준이 비슷하다면 발달학적으로 그들은 탐색과정에 필요한 호기심이 발동되어 동력을 가동할 수밖에 없다. 이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제안이 들어오면 일단 조심스럽게 실행을 옮기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더구나 상대가 매우 호의적이고 편의적이라면 동력은 더더욱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우리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착하니까.


수준에서 오는 <귀차니즘>은 무엇보다 <이익>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이익은 자녀에게 필요하고 당장에 효과적인 이익이 따라야 행동이 뒤따를 수 있다. 결국 제안이 들어왔을 때 이것저것 판단해서 이익이 그리 많지 않다면 굳이 움직이여야 하는가?라는 의식에서 시작된다고도 볼 수 있다. 설령 그것이 잘못된 판단일지라도 자신의 판단을 믿는 편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다른 친구들과의 수준을 고려하면 이 정도의 판단은 옮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귀차니즘>을 자극하는 자녀들의 수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내가 만난 아이들 중에서 <귀차니즘>이 많은 자녀들은 대부분 친한 친구들보다는 친한 언니, 오빠, 형, 누나가 많았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퀄리티는 본인보다 학년이나 연령이 높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크게 영향을 받는다. 또래에서 가르쳐주지 못하는 자본을 취득하는 것이니 자녀 입장에서는 꽤 근사해 보이는 자산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조금 더 나아가면 가출을 했을 때 자녀는 엄청난 자본을 장착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니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수준이 올라갔기 때문에 집 자체가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집이 주는 형태와 부모의 이야기가 수준 이하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어떻게 보면 <귀차니즘>은 무기력에서 시작되는 형태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의지로 놓고 보면 다른 어떤 형태보다 의지가 강력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이 <귀차니즘>이다. <귀차니즘>은 어찌 보면 우리 자녀가 가지고 있는 수준을 이해하는 입장에서 바라보면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그럼, 이러한 <귀차니즘>은 어떻게 변화를 꾀할 수 있을까? 일단 자녀의 수준 측정이 중요하다. 자녀가 사용하는 문장과 단어 그리고 사고방식에 대해 우리 부모는 깊은 관찰이 필요하다. 내가 만난 <귀차니즘> 아이들의 대화에서도 나는 그들을 대하면서 연령적으로 2살 많게는 3살 정도 높다는 인식을 가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나 스스로 레벨업을 해서 그 친구들을 대한다. 그럼 효과적이다.


수준을 알게 되었다면 당연히 뒤따라야 하는 건 수준에 맞는 <제안>이다. 제안은 방식과 형태를 동시에 바꿔서 해주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에게 제안을 했을 때 수준에 맞는 정확한 방법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아이처럼 대했다면 아이처럼 대하지 말고 지금의 단계보다 두세 살 정도 수준을 올려 책정하고 대화하라는 것이다. 제안과 제재가 들어가야 한다면 그만한 수준을 고려한 <설명>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재 또한 수준에 맞는 <도구>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귀차니즘>이 이어지면 잘못된 자기 확신 즉, <확증편향>을 가지게 된다. 특히 잘못된 정보나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자녀에게는 향후 전개될 그들의 삶에 상당히 안 좋은 영향을 미칠게 뻔하다. 그래서 고쳐야 하는 것이 맞다. <귀차니즘>은 형태면에서 전체를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판단에 대한 부분이 잘못되어 기회를 놓칠 수 있는 아쉬움이 될 수도 있고, 또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확정된 편향 때문에 잘못된 일에 연루되어 뒤늦게 후회할 수도 있다. 또 자기기만을 통해 인간관계에 있어서 의도적 왕따까지 당할 수 있는 외톨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걱정해야 한다.


다시 학생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수준을 몰랐던 나는 그래서 여느 또래 친구들처럼 이 학생을 대했다. 그런데 이 학생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나는 이 친구의 수준을 알 수 있었다. 일단 이 친구의 수준을 끌어올려 준 것은 가족이었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현재는 할머니와 아버지와 단 세 식구가 살고 있는 데 연로하신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고 보잘것은 없지만 열심히 살고 계시는 아버님이 계신다. 가정형편은 보통이라고 했지만 내가 판단하기에는 어려워 보였고, 그래서 아이는 부모 이혼 이후에 겪게 되는 상실감을 친구와 특히 동네 형들과 보낸 시간이 많았다. 용돈을 거부하고 자신이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부모가 무조건 자식에게 희생하는 건 부당하다는 의견이 내가 이 친구의 수준을 확정하는 데 큰 역햘을 했다. 이러한 사고는 어디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다 같이 고생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도 한몫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동네 형들이 모일 때면 나누는 대화에서 지금껏 자기 또래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논쟁들이 학습이 되었을 것이다. 호기심에 또는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비행과 범죄를 저지르는 행위는 <귀차니즘>의 부차적인 요인이다.


그래서 나는 이 학생에게 걸맞은 제안을 했다. 요리에 관심을 보이고 있고 실제 조리사 자격증을 세 개나 땄다고 하니 나는 이 학생에게 <대학>과 <해외>라는 보다 큰 영역을 제시했다. 지금의 요리 실력에 안주하는 것은 네 수준에서 너무 아쉽다는 뜻으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비행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네 수준을 고려하면 앞으로의 비행은 생각지도 않은 구간에서 네 발목을 제대로 잡을 수도 있을 거라고 그래서 걱정이 된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대화를 마치고,

집까지 걸어가겠다는 학생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나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운전 때문에 학생으로부터 페이스땡 <친구 요청>이 들어와 있었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보자마자 나는 <친구 추가>를 눌렀고 이어서 메신저 창에서 학생에게 <손 흔들기> 이모티콘을 눌러줬다. 그랬더니 아직 자고 있지 않았는지 학생도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머리를 긁적이며 이모티콘을 눌렀을 것이다. 나는 웃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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