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좋은 반응은 반응하지 않는 것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반응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면

by Daniel Josh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어떤 반응을 해야 하나 고민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지 않고 말을 주고받는 카톡의 경우도 그러하다.

의식하는 상대에게 온 카톡을 일정 시간 동안 안읽씹 하고 있는 것은,

충분한 반응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기 위한 나의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 아닐까?


돌아서서 생각해보면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 싶다.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그 이야기에 얼마나 많은 웃음과 눈물로 화답을 해야 그 이야기가 가치를 지닌 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자주 착각을 한다. 발화자의 이야기는 오롯이 발화자의 의식과 그 앞, 뒤, 옆을 메꾸는 맥락에 의해서 가치가 매겨진다.

발화자를 둘러싼 반응자들에 의해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 아니다. 전혀 아니라곤 할 수 없지만.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자기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많은 반응들을 일으키면 나름의 착각을 할 것이고,

생각보다 적은 반응들을 일으키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의 착각을 하게 될 것이다.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이야기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경우,

듣는 이의 반응으로 그 이야기에 어떤 손상을 입히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이야기라는 것은 본연 그것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공감하는 인간이며, 서로의 이야기에 각자의 온도로 반응하는 것으로 소통한다고 믿는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 말과는 별개로 각자가 하는 고민과 그곳에서 터져 나오는 이야기는 너무도 복잡한 변수들과

개념화될 수도 없는 복잡한 수식 관계를 통해 엉켜있다.

그중에 어떤 이야길 집어내도 얇은 층으로 정교하게 기대어 쌓여 있는 구조물은 힘없이 주저앉아 버리고 말 것이다.

그대로 두어야 한다. 본연의 그것으로 존재하도록.


실은 우리가 하고 듣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이런 것들이다.

그것이 친밀하기 위한, 관계의 윤활을 위한 대화가 아니라, 내 안에서 고름이 터져 나오는 이야기라면.

상대방이 깊은 고민에 잠겨 좌초되어있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입술을 열어 나오는 이야기라면.

섣불리 이야기에 반응을 보이려고 어떤 포인트를 집어냈다가는

영 가렵지 않은 부분을 긁어 피부가 붉게 덧나기만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제일 좋은 것은 섣불리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섣부름이 모든 것을 망친다.

이야길 듣고 묵묵히 말을 아낀다고 해서 말을 듣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경청은 충분히 그것을 음미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고 시간이 충분히 지났음에도

아무런 이야기가 새로 파생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이야기가 낙엽처럼 바닥에 떨어져 쓸려나간 것은 아니다.

아무런 사족을 붙이지 않는 것은. 아무런 알량한 주석을 달지 않는 것은.

그 이야기가 온전히 박제되어 들어오기 위함을 의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자들이 하는 이야기에 남자들이 반응해야 하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오래된 연애지침이 있었다.

무턱대고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하지 말고 그저 들어주라는 것. 좋은 팁은 그냥 여자의 끝나는 말을 반복하라는 것이다.

듣는 시늉을 하라는 것이다. 그랬다니까? 하면 그랬구나 하고. 너무 짜증 났어! 하면 짜증 났겠네 하라는 것이다.

지혜로운 해결책이다. 언뜻 보면 이런 기계적인 반응을 여자들이 반길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우스갯소리가 섞여있지만.

그 이야길 정말로 진지하게 듣고 있다고 해도 동일한 반응을 하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랬구나. 짜증 났겠네. 하는 것.


그런 반응들 하나하나에 초연해져야 할 필요를 느낀다.

내가 하는 반응들과 남들이 보이는 반응들에도. 어쩌면 그런 것들은 퍼포먼스에 불과한 것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누군가 이야기했다.

자기가 스스로 뜻을 결정해서 하는 일은 각자의 의미를 지닌 것이고 그것은 그 자체로 숭고함을 지닌다고.

그래서 반문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뜻을 결정해서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로 살기도 한다고.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 너무 좋은 말인데. 전제조건 하나, 자기 뜻으로 결정해 직업을 갖는 것일 것.

그것에 해당이 되지 않을뿐더러. 현재 본인의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가령 예를 들어보자. 매일 새벽같이 청소부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에게 물어본다.

“왜 청소부일을 하시죠?”

그가 기대하는 대답은 이런 것일까.

“저는 정말 이 일을 사랑합니다. 남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마는, 간단한 행위일지라도

이 일들로 세상은 확실히 나아진다는 가능성을 아주 작게나마 발견하거든요.”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이런 것이라면.

“사실 별로 계획에 없었는데 공무원이라는 점, 보수가 납득이 된다는 점에 이끌려서 결정하게 되었어요.

근데 하는 일도 지겹고 매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만 합니다.”

본인이 본인의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만족스럽게 결정한 선택도 아니라고 하는데, 거기에 더 어떤 이야기를 덧붙일까.


우리의 아름다운 삶의 철학은 세상과 사람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이해할 수 있는 틀밖의 이야기들이 다반사를 이룬다.

우리는 각자의 철학을 마련해 삶과 사람에 대비하고 함께 공유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런 간단한 경우들에 대해서도

도무지 그건 어떻게 욱여넣으려고 해도 답을 맞혀 넣기 역부족이다.


결국 답은 [아무 답도 해줄 수 없다]이다. 그냥 ‘그렇구나’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아무런 왜곡이 가미되지 않은 이야기 본연의 정보와 감성과 맥락 그대로가 청자에게 들어오게 되어있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 하는 어떤 말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해야 내가 잘 듣고 있다는 것을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던 것 같다.

어렵지만 그것이 꽤나 소모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동시에 이야기를 할 때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