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반드시 보여야만 하고 보이기를 바라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오늘 생각해 본 예술에 대해. 자주 고민하다 보면 언젠가는 더 깊이 알 수 있겠지.
-2018.03
유럽 여행을 하다 보니 길거리에 나와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자연스레 그런 사람들에게 접근했고 이야기를 나눠보게 되었다. 거리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을 그려서 연주의 끝에 가져다 주니 보답으로 자신의 음악 CD를 내게 선물해주기도 했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내가 그려주고 그 사람도 나를 그려주기도 했었다. 그림을 그려 낸 후에 내가 봐도 너무 잘 그려서 준 것이 절대 아니다. 낙서 같은 크로키를 주기도 했고, 지우개로 지워가며 그린 흔적이 남아있는 떨리는 선만 남은 스케치를 주기도 했다. 나는 단지 그 사람들에게 당신이 가는 방향이 옳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해주기 위해서, 당신의 예술을 응원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은 심정으로 주게 되었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예술을 공유하고, 예술로 인해 내면에서 나오는 감정들을 교환했다. 또 거리로 나와 보란 듯이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 또한 현장에서 직접 스케치를 해볼 용기를 얻고 시도해보기도 했고 그들을 보며 나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용기를 한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예술은 왜 보여야 하지?
나의 경우는 보이는 예술 이전에 치유의 목적이 예술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그림 그리기는 멈출 수가 없었고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쌓여 지금은 꽤나 무겁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끔 어떠한 경우로 나의 해묵은 스케치북이나 사진으로 찍혀 있는 그림들을 보여줄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왜 이렇게 많이 쌓아 놓고 혼자 보느냐고. 뭔가를 해보는 건 어떻냐고 말했다.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나도 최신 유행하는 인스타그램이라는 곳에서 활동해보기도 했다. 모두에게 접근성이 좋은 인스타그램은 수십 장의 사진과 그림이 하루에 내 눈을 스쳤다. 그리고 그 속은 그림뿐만 아니라 신기하고 멋진 다양한 사람과 사물 장소 물건 등이 넘쳐났고 나는 급속으로 바뀌고 돌아가는 신세계에 매료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그곳에서 나도 뒤쳐질라 새로운 사진을 업로드했다. 나는 그림 위주로 올리기 시작했고 활동을 하다 보니 현실에서는 만날 수도 없는 멋진 사람들, 관심분야가 같은 사람들과 온라인상에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실제의 만남으로까지 이루어져 값진 인연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기능들을 뒤로하고 너무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보이지 않는 경쟁에서 본성이 느림보인 나는 이내 지치게 되었고 나를 위해 그리던 그림은 업로드를 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이 되면서 어느 순간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이건 내가 아니잖아."
나 자신을 돌이켜봤다. 어차피 나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 속에서 얻고 싶었던 것을 이미 다 얻었기 때문에 사실은 이걸로 충분했다. 그곳에 내 그림들을 노출시키기 전이 좋았던 것 같기도 했다. 은연중에 있던 경쟁심 때문인지 분별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던 걸까. 혼란스러웠다.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그동안 불특정 다수의 공감을 얻었을 때 기분이 좋기도 했고 설렘이 가득 차기도 했지만 상호 관계의 신뢰보다는 기호에 의한 선택이 바탕이 되는 인터넷 세상의 관계가 주는 힘은 냉정했고 나에게 공허함을 주기도 했다. 나는 마음을 닦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수많은 작가님들의 그림을 보다 보니 그들처럼 멋져지고 싶었다. 나를 구독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으면 했다. 욕심이 났지만 현실은 뜻대로 될 리가 없다. 주제도 없이 내 마음대로 그리고 싶을 때 아무거나 아무렇게나 그려대는 내 그림들은 통일성도 없어서 어딘가에 내비치기엔 부족하고 준비가 되지 않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를 , 내 그림을 원망하기 시작했고 그런 나 자신이 낯설고 싫었다. 이건 내가 원하던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결과적으로 나와 방향성이 맞지 않는 플랫폼임을 깨닫고 미련 없이 훌쩍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나길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또 한편으로는 떠난 일이 그렇게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고 느꼈던 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에 조금 게을러졌다. 그리고 그 게으름에 너그러워져 버렸다. 그래 나를 돌봐야지, 나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거지 하다 보니 오늘은 피곤하니 안 그려야지 귀찮으니 안 그려야지 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슬럼프까지 겹쳐 예전처럼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숨었다. 숨는 게 마음이 놓였으니까. 어차피 나를 드러내기 시작하면 얼마 못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내면의 그림을 보일수록 깊은 곳에 묻혀 있는 치부가 드러났다. 질투와 실수투성이에 어두운 못난 골칫덩어리. 어차피 나를 꺼내 볼수록 초라하고 부끄러웠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 속의 어떤 한 사람일 뿐인 사람의 보잘것없는 감정 따위가 드러나고 세상에 알려져서 뭐하지? 그 와중에 혹시 좋은 점이 있을까 그것은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좋은 점을 딱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예술은 정말 보여야만 하는 걸까?
나의 일기를, 그림을 아니 막말로 나의 밑바닥을 굳이 들춰내지 않아도 이 세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잘만 돌아가고 있잖아. 그래서 실망이 컸다.
역시나 세상은 나를 거들떠보지 않아. 나를 필요로 하지도 않아. 나의 글을 나의 그림을...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써놓았던 2016년의 일기를 떠들러 보게 되었다.
예술은 내가 가진 하나도 볼품없는 것들을 아주 극단으로 미화시켜 특별하고 풍요롭게 느낄 수 있게 만들어줘. 말도 안 되게 부푼 환상이지. 때론 이런 과장된 거짓과도 같은 허황된 몽상 따위가 쓸데없이 용기를 주기도 하네. 그래서 멈출 수가 없나 봐.
-2016.12
그랬다. 그랬었다. 예술은 하나도 볼품없는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 착각인지 진짜인지 하는 환상을 심어줬었다. 나는 한껏 부풀어 있던 그때의 감정을 되찾고 싶어 졌다. 나의 낡은 기록을 보며 스스로 다시 시작해볼 용기를 갖게 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언젠가 나의 방향에 잘 맞는 플랫폼을 찾게 된다면 돌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브런치였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도 접속하지 않은 3년 만에 우연히 좋은 계기로 인해 들어오게 되었고 어쩌면 나와 맞는 곳일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내게 맞는 플랫폼은 무엇일까에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방향과 속도였다. 브런치가 좋았던 점은 느리게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사진만 올리는 곳은 아주 빠르게 회전된다. 사진은 버튼을 누르고 찍기만 하면 찍히고 아주 빠른 속도로 공유할 수 있지만 글을 쓰는 일은 아무래도 셔터를 누르는 시간보다는 느리잖아. 내가 써 내려가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고 다른 작가님들이 쓴 글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다짐했다. 숨기를 그만두고 다시 나와 볼까. 고개를 내밀어 보면 어때?
그리고 전부터 고민해 오던 것을 또다시 꺼냈다.
그럼 예술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와야 하는, 누군가에게 보여야만 하는 이유는 정말 무엇이지?
나는 이미 2018년에 답을 얻었었다. 예술은 반드시 보여야 하고 보이기를 바라는 태도에서 나온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일기로 쓰기까지 했잖아. 그리고 내가 길에서 만난 예술가들과 감정을 나누고 그들을 바라봤던 나의 시선, 느낌 등이 다시 떠올랐다. 세상이 나를 봐주는 기분, 내가 세상 속에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을 때는 사실은 예술을 누군가와 나누고 교감을 했을 때였다.
나눔과 교감이었다.
내가 예술하는 사람들의 나눔 덕분에 얻었던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참 많았다. 그들 덕분에 용기를 얻었다. 내가 예술로 인해 얻었던 살아가는 용기를 어딘가에서 망설이고 필요로 하는 사람과 나누고 싶어 졌다. 때로는 한없이 초라하기도 하고 한없이 들뜨기도 하는 매우 변덕스러운 인간이 당신뿐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편이 나은 것 같아서 아무래도 극단적인 감정을 갖는 나 같은 사람이 나와보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나와봐도 괜찮겠다고 느꼈다. 내가 적었던 것처럼 보여주려는 태도를 갖으려는 동시에 예술의 가치가 올라가고 그것을 나누려는 순간엔 예술 자체의 의미가 치솟았다.
모두에게 공감을 얻으려는 마음은 없다. (혹시라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말해주면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넓고 넓은 세상 속에 살아가는 어떤 한 사람 중에 이런 생각을 하며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는데 혹여나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 보고 있는 이의 생각의 공기를 전환시켜주지는 않을까. 누군가는 내 글과 그림을 읽고 조금이라도 힘이 났으면. (그림을 본다는 말보다 그림을 읽는다는 표현이 더 좋다.) 그들도 자신 안에 있는 예술을 찾아내는 계기가 된다면. 그로 인해 자신을 전보다 사랑하게 된다면.
단 한 사람이어도 좋다. 조금 더 많아도 나쁘지 않겠다. 그런데 (혹시라도) 너무 많으면 부담이 되겠다.
피식 웃음이 났다.
예술이라는 거 피아노 건반 같다.
모든 건반의 소리가 다 다르듯 모든 이의 예술은 제 각각 소리가 다르다.
건반을 꾹 누르면 들어갔다 손을 떼면 다시 올라온다.
나는 내가 가진 음이 어떤 소리였는지 제대로 듣기 위해 다시 건반을 쳐본다.
누르면 소리가 나고 손가락을 떼면 소리는 사라진다.
일단 눌러야 소리가 난다. 누르지 않으면 피아노는 아무 소리도 들려주지 않지.
나는 예술을 잘 모른다. 무지함이 용감이지 무작정 내 안의 음정을 들어보기로 했다.
사실 예술이 무언지 아주 잘 알았다면 위대함에 짓눌려 감히 손을 대볼 용기도 안 났겠지.
불협화음이라도 일단 건반을 꾹꾹 눌러보니 속은 어찌나 시원한지 모르겠다.
그림을 계속 그려봐야겠다.
-2018. 03
오늘은 그림을 그리지는 못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일을 동경하고 마음속에 품었다.
그것만으로도 왠지 위로가 되는 건.
-2017.09
나도 마음먹으면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마음먹기만 하지 않고 진실로 하는 사람들.
그들을 예술가라 부른다.
마음먹기에 따라, 어쩌면 우리도 될 수 있다.
나도 누드 크로키를 꼭 그려보고 싶었다. 오늘은 좋은 기회로 오랑주리 미술관에 계신 르누아르 선생님께 공짜로 배우게 되었다.
언젠간 꼭 모델과 함께 하는 누드화를 그려볼 테다.
-2017.07
마음먹은 것을 하면 된다. 나는 그들의 범위에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가서 보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아니 안 가도 그냥 그곳에 가면 그런 게 있다는 사실 만으로 충분한 위로가 되는 게 있어. 사람 마음을 자꾸 잡아당기는 그런 거. 그게 예술 같아.
-201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