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몸에 곧 숨이 넘어갈 듯한 찰리를 보고 조금 당황했다. 테이블 위에는 그가 보고 있던 포르노 화면이 계속 재생된다. 그는 숨을 헐떡이다 곧 죽을 것 같다며 심장을 부여잡고 갑자기 에세이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첫 장면부터 <더 웨일>은 불편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불편함은 곧 낯설음이기도 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 몸으로는 쉽게 이입하기 힘든 찰리의 몸에 대한 거리감이었고, 죽어가는 이를 지켜봐야 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동요시키는 감정의 많은 부분은 찰리의 몸과 고립된 삶의 양식에서 온다. 그는 대학에서 온라인으로 에세이 강의를 하지만 자신의 몸을 보는 시선을 의식해 카메라가 고장 났다는 핑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검은 화면이고, 피자 배달부에게는 문 너머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사람이다. 이렇듯 고립된 채로 죽어가는, 연민하지 않을 수 없는 찰리가 알고 보니 가정을 버리고 동성 제자와 바람이 났던 나쁜 아빠라는 걸 알게 됐을 때, 그런데 그 애인이 세상을 떠난 후 찰리도 거대하게 ‘변신’했다는 걸 알게 됐을 때는 도대체 찰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진다.
찰리를 지켜보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찰리의 움직임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의 두 발로 일어설 수 없는 건 물론이고 보조 기구에 의지해 걸음을 떼고, 동선에 맞게 달아둔 줄을 잡은 후에야 겨우 침대에 몸을 누인다. 타인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상생활이 찰리에게는 온통 넘어야 할 벽이다. 리모컨이라도 집으려고 하면 긴 막대를 이용해야 하고 떨어진 열쇠를 주울 수도 없다. 씹는 것도, 웃는 것도 자칫하면 찰리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기에 계속해서 보는 이를 아슬아슬하게 만든다. 찰리의 힘겨운 한 걸음 한 걸음은 화면 너머로 불안감을 내뿜는다.
무엇보다 찰리가 폭식할 때마다 깔리는 불길한 배경 음악은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그는 울혈성 심부전을 검색하고는 체념한 듯 초코바를 쌓아둔 채 먹고, 감정이 격앙될 때는 피자를 파괴적으로 먹어 치운다. 그러나 병원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방치하는 듯 보이는 찰리를 함부로 연민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친구이자 간호사이기도 한 리즈는 찰리를 걱정하면서도 그에게 치킨 상자를 안겨준다. 이는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왔고, 떠나보냈던 찰리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리즈만이 할 수 있는 모순적인 돌봄이다. 음식만이 그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리즈에게 찰리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고마워가 아닌 “미안해”이다. 찰리의 심리적 허기와 그에 얽힌 몸의 서사는 섣부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을 목전에 둔 찰리는 마냥 무력하기만 한 존재인가. 그는 매일 창가에 새 먹이를 놓아둠으로써 새를 돌본다. 그것은 찰리가 내뿜는 희미한 생명력이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을 쥐어 짜내어 그리웠던 딸 엘리에게 쏟아 내기로 한다. 꼭 죽어가는 화분을 살려내듯 자신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친 엘리에게 용서를 구하고 엘리가 멋진 존재라고 끊임없이 말한다. 찰리는 ‘사람은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므로.
어쩌면 내가 쉽게 상상할 수 없었던 삶에서 보편성을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웨일>은 우리가 한 번쯤 마주쳐야 하는 낯설음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을 살게 될 것이다. 부풀기도 쪼그라들기도 하며 변신할 것이다. 나 자신이 쓸모없게 느껴질 때면 끝내 사라지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무력한 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한때 내가 망가뜨린 화분을 다시 들여다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