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적 세계를 조용히 비집고 나아가는 여성창작자의 힘
<베르히만 아일랜드>
영화감독인 크리스에게 창작은 엄청난 고통이다.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아름다운 포뢰섬에 왔지만 완벽한 풍경 앞에서 좋은 작품을 써내지 못할까 봐 두렵기만 하다. 반면 크리스의 남편 토니는 시나리오 작업이 꽤 잘 풀리는 중이다. 영화감독 커플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포뢰섬은 거장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영화를 찍고 말년을 보낸 곳으로 영화인들의 성지이다. 그러나 크리스는 존경하던 거장 감독의 자취를 좇을수록 그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베르히만에게 6명의 부인과 9명의 자식이 있었지만 자식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는 점, 그가 50여 편의 작품을 남기고 거장이 될 수 있었던 건 가정에 소홀했기 때문이라는 점에 크리스는 실망한다.
크리스는 남편 토니와의 관계에서도 소외감을 느낀다. 크리스는 시나리오에 대한 고민을 토니에게 털어놓지만, 토니는 자신의 작업을 크리스에게 절대 공유하지 않는다. 토니가 시나리오에 집중하는 동안 크리스는 토니의 세계에 초대받지 못하고 주위를 겉돌기만 한다. 관계의 불균형은 이들의 사회적 위치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토니는 크리스 보다 나이가 많아 이미 업계에서 자리를 잡았고, 자신의 영화 상영회에 많은 팬들이 모일만큼 영향력 있는 영화감독이다. 반면 크리스는 아직 성장하고 있는 젊은 여성 감독이며 그의 전작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크리스에게는 토니의 조언이 필요하지만 토니에게는 크리스의 조언이 필요 없다.
영화는 거장 잉그마르 베르히만과 크리스의 남편 토니로 대표되는 ‘백인 남성 지식인’의 가부장적 면모를 곳곳에서 드러낸다. 시종일관 차분하고 품위있어 보이는 예술가 토니의 작업 노트에는 외설적인 낙서가 잔뜩 그려져 있다. 토니와 크리스가 다투는 장면에서는 은연중에 토니의 본심이 드러난다. 창작이 고문이라는 크리스의 말에 토니는 “다른 일을 해보는 건 어떠냐”라고, “주부도 좋은 직업”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정말로 주부를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해서 건넨 악의 없는 조언일까. 고통스러운 창작의 대안으로 가사 노동을 제안하는 것은 가사 노동에 대한 저평가가 함의되어 있다. 가사 노동은 중노동임에도 불구하고 토니에게 주부란 ‘쉽고, 편한’ 길이다. 또한 토니는 크리스를 동등한 동료로 여기지 않는 듯하다. 창작은 원래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법이기 때문이다. 토니가 크리스의 창작을 진지하게 여겼다면 결코 그런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토니와의 대화는 크리스를 ‘일과 가정의 양립’의 문제로 끌고 간다. 토니에게도, 베르히만에게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과 가정의 양립’은 여성 창작자인 크리스에게는 커다란 쟁점이 된다.
토니는 꽤나 너그럽고, 양육에도 참여하는 괜찮은 남편처럼 보이지만, 내심 내조해 줄 아내를 바라는 보통의 가부장적 남성의 한계를 드러낸다. 크리스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의문과 불편함 속에서 방황한다. 결국 크리스가 남성 거장과 남성 동료의 세계에서 느끼는 소외감을 비집고 나아가는 방식은 창작이다. 그가 싸우는 방식은 ‘여성 감독’이 되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미아 한센 러브의 전작 <다가오는 것들>의 나탈리가 삶에 들이닥친 상실의 고통을 철학의 힘으로 마주했다면, <베르히만 아일랜드>의 크리스는 가부장적 세계에서 느끼는 불균형을 동력 삼아 자신의 영화를 완성해 나간다. 두 여성 모두 자신과 불화하는 세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용히 싸운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두 여성은 시무룩한 얼굴로 일상을 부지런히 걸어 다니고, 책상 앞에 앉아 읽고 쓴다. 그리고 어느새 크리스가 감독으로서 자신의 촬영 현장에 놓이는 장면은 쾌감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결국 내게는 이런 물음이 남는다. 나와 불화하는 이 세계 속에서 나는 무엇으로 싸울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