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뉴욕꼬질이들 Feb 27. 2019

망할 패션 (ft. 분노주의)

Fashion is bunch of bullcrap. 소똥만도 못한 것


나는 세계 패션의 중심지들 중 하나라고 불리는 뉴욕 맨해튼에 살고 있다.


패션에 대한 꿈은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새내기 시절부터 장장 10년을 키워왔다.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며 끊임없이 준비를 했고, 동경하는 패션 세계에 대한 열정은 커져만 갔다.

결국 온갖 모진 시련과 고초를 겪고(?) 17년도에 2018년 기준으로 세계 4위 랭킹의 패션스쿨을 졸업했고, 학교를 다니면서 뉴욕에서 꽤 유명한 럭셔리 부티크 브랜드부터 중고가 리테일 브랜드까지 뉴욕에서 꽤 유명한 디자이너들 가까이에서 일했으며, 졸업을 하고 나서는 미국 전역의 저가 도매시장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도매 기업에서도 일했다.


학교를 다니고 졸업을 하고 직장을 구하고 일을 하면서 나의 패션에 대한 시각은 점차 회의적으로 변했다.

처음엔 너무나 좋았다. 10년간 그려온 학교를 다닌다는 것이 꿈만 같이 느껴졌다. 하루하루가 행복했고 열정이 넘쳤다. 과제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했고, 교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눈에 들어오고 거슬리는 것들이 쌓여갔다. 학교의 교수들은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 일을 계속하는 것처럼 보였다. 패션의 최전방에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줘야 할 메인 교수들은 패션계에서 은퇴한 지 족히 반백년은 지났다. 과에 40대의 젊은 교수가 딱 한 명 있었는데, 우리 학교를 나온 후 파리에서 대학원을 나오고 파리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하다 고단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학교에서 백 살 정도로 보이는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 조교수가 된 케이스다. 백세 교수님의 제자였고 후계자로 지목된 것이다.

학교의 패션 교육은 약간 과장하자면 2차 세계대전에 머물러있고, 일부 교수들은 누구보다 자유롭고 창조적이어야 하는 패션에 자기만의 잣대를 들이댄다. 난 패션학교는 자유로운 미친놈들의 천국인 줄 알았다.

미국에 오면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미친놈이 되고 싶었던 나는 학교에서 풀지 못하는 한을 내 머리카락에다 풀었다. 노랑 파랑 초록 보라 분홍 색색깔의 무지개색으로 물들여봤지만 풀리지 않는 답답함을 어쩔 수 없었다. 돈을 이렇게 학교에다 퍼부어 바치고 있는데 일을 학교에서 배우지 못하고 회사에 들어가서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 통탄스러웠다.

내가 10년 동안 꿈을 키우며 일 끝나고 꾸준하게 패션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아예 패션의 패자도 모르고 본투비(born to be) 자유로운 미친놈 스타일이었다면 이 실망감은 훨씬 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패션학교는 인더스트리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감히 든다.


학교의 거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패션위크 봉사 프로그램과 인턴십 클래스를 이용해 보그 컬렉션에서 들어봤을 법한 브랜드에서 뉴욕 패션위크 발런티어나 인턴도 꽤 많이 해봤다.


매년 디자이너는 차고 넘치게 졸업을 하고 그에 비해 등단할 그라운드는 너무 좁다. 디자이너 과잉 공급 현상으로 엉뚱하고 당연하게도 학력이 중요해졌다. 웬만한 곳에 들어가려면 디자인과 4년제 학사(bachelor’s degree)는 필수이고, 회사에 오래 머물며 높은 직책으로 가고 싶으면 대학원도 필수이며, 하물며 그 대학원은 유럽에서 나와야 경쟁력이 있다.


돈지랄


이게 내가 생각하는 현재의 패션 세계다.


돈지랄을 하지 않거나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 노동자의 신분이라면 열정페이의 희생자 사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학사학위가 있고 아는 사람의 추천을 받아 운 좋게 월급을 받아도 절반은 집세로 나가고 여태껏 나간 학비를 메꿀 생각은 당분간 꿈에도 못 꾼다. 몸 바쳐 일해도 비자 서포트 따윈 신경 안 써주는 경우도 많다.

물론 운이 좋거나 악바리 같은 케이스도 있다. 열심히 일해서 회사에서 인정받아 비자 서포트를 받고 잘 정착한 사람들도 있다. 정말 날고 기는 케이스다. 이런 사람들 밑에서도 일해봤지만,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풍기는 분위기가 나의 색깔과는 맞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보스한테 풍기는 분위기고 나발이고 알아서 기어야 할 판에 이런 판단이나 하고 있으니 기회가 올리 만무하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런 색깔의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들만의 세상


테크놀로지는 인류의 진화를 보여주고 우리가 보다 편리한 생활을 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패션은 우리에게 필요도 없는 것들을 자꾸 소비하게 만든다. 딱히 인류 진화의 표본 역할을 하지 않으며, 편리함을 가져다주지도 않는다. 하물며 테크놀로지도 과잉공급으로 인류를 무력하게 만든다고 비난받는 판에 패션은 말할 것도 없다.

흔히 말하는 패션피플들은 브랜드에 무지한 사람들이나 대부분의 남자들이 보면 저게 왜 예쁜가 싶은 옷들을 걸쳐 입고 세상 시크한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선다.

그들은 카사디안 패밀리의 여파로 독침을 맞은 것같이 부은 입술을 쭉 내밀고 엉덩이도 쭉 빼고 뽕 맞은 여자처럼 게슴츠레 눈을 뜬다. 연체동물 같은 괴상한 포즈와 이 날만을 위해 그동안 혹독하게 몰아붙인 다이어트로 현실감 떨어지는 몸매를 자랑스럽게 선보인다.


처음 뉴욕으로 나를 데려온 것도 망할 놈의 보그다.


그들이 그들끼리 그러고 있는 동안 지구 반대편에서는 패스트패션의 피해자인 학교를 가야 할 나이의 아이들을 포함한 제3국 노동자들이 역한 화학약품 냄새가 풀풀 풍기는 염색공장에서 죽어간다.


인류가 반드시 필요로 한 의식주는 그들이 외부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건강한 생활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금의 소비문화는 소비자에게 패션뿐 아니라 종류를 불문하고 필요 이상의 가치에 독이 오르게 만든다. 어디를 가든 눈만 뜨면 시야에 들어오는 각종 광고들은 유비쿼터스(Ubiquitous, 언제 어디서나 널리 존재하는) 소비문화의 홀로코스트이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소비자에게 꼭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필요도 없는 각종 물건들을 보여주며 이것들을 가지면 기분이 좋아질 거라고 유혹한다. 그 기술은 나날이 발전해 인공지능 로봇까지 발 벗고 나서 검색 목록을 바탕으로 관련성을 따져 그들이 더 쉽게 유혹될만한 것들을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그 손길에 현혹된 소비자들은 결국 구매 버튼을 누르고 한 숨결같은 희망찬 기쁨과 환희의 순간을 누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더욱 새롭고 더욱 좋아 보이는 것들로 그들은 또 다른 유혹에 빠지고, 또 다른 물건이 쌓이고, 또 다른 물건이 쌓인다. 인터넷 상의 셀 수 도 없이 무작위로 올라오는 포르노들 같다.


나는 패션도 그 대열에 크게 기여하는 거대한 쓰레기 생산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패션위크는 입지도 못할 옷들이 난무하고 그걸 예술이라 부른다. 물론 쇼피스와 매장에 있는 옷들은 스타일이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 많이 팔리는 옷들은 쇼에 오른 옷들처럼 드라마틱하지 않다. 쇼에 오르는 옷들은 셀레브리티를 위한 피스이거나 홍보용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은 셀럽을 통해 브랜드 밸류를 높이고 소비자들에게 제품보다는 브랜드를 사게 하는 전략인 듯 하다. 그래도 실제로 대중들에게 팔 수 있는 옷에 좀 더 가치를 두는 게 맞는 것 아닌가? 그것이 팔리는 옷을 싼 값에 더 많이 팔아제끼는 패스트 패션의 기조이고, 이것은 소비의 유비쿼터스 홀로코스트와 온갖 패션 브랜드를 이끄는 수장들, 그리고 자신만의 가치를 세우지 못하고 그들에게 끌려다니는 대중들이 다 같이 힘을 합쳐 널찍한 덫을 놓은 합작이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비용을 들여 사치재를 사고 카드 할부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차라리 그 돈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거나,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 자신의 가치관이 더 이상 외부 자극에 쉽게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장기적인 개인의 행복에는 훨씬 도움이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난 아직도 패션이 좋다. 내가 이렇게까지 분노하는 이유도 그만큼 패션에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도 자라에 들어가면 눈이 뒤집어지고, 온갖 고급 브랜드들이 돈을 얼마를 쳐들였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자신들의 옷에 풀어놓은 것을 보면 세상 최고의 희열을 느낀다. 난 죽을 때까지 패션과 교육에 몸을 담을 것이다. 하지만 패션의 필로소피는 바뀌어야 한다고 단연코 말하고 싶다. 이 큰 소비시장을 어디부터 어떻게 바꿔야 할지는 꾸준히 연구하고 공부해야 할 과제이지만, 내가 지향하고 추구할 패션을 생각해보았다.


1. 친환경적; 인체와, 그리고 인류가 사는 환경과 친해야 한다.

아무리 브랜드가 유명하고 디자인이 예뻐도 억지로 몸을 욱여넣고, 숨도 못 쉬면서 몸매 보정 속옷을 입고, 온갖 화학약품처리가 된 옷을 입고 팔뚝이나 등이나 허벅지를 벅벅 긁어야해서는 안 된다.

거대한 쓰레기장에 합류하는 데 지금처럼 크게 기여를 해서도 안 된다. 요즘 뉴욕의 패션시장은 불황이다. 일주일마다 시즌이 바뀌는 패스트패션 매장조차 문을 닫고 있다. 각종 브랜드에서 친환경적으로 자란 코튼을 이용하거나 하는 등의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더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2. 기능성; 편해야 한다.

지금까지  옷장에 있던 많은 옷을 갖다 팔았다. 궁극적으로 내가 추구하는 옷장은 스티븐 잡스나 마크 주커버크의 옷장이다. 나에게 제일 편하고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옷을 찾아 단벌로 여러  갖추는 것이다. 패션에 환장하는 내게 쉬운 목표는 아니지만, 추구하는 방향성을 그렇게 잡겠다는 것이다. 보통 내가 오래 입는 옷들은 소재가 좋고, 입었을  편한 옷이다. 옷장에 오래 있어도 질리지 않고, 편한 들이 위주가 된다면 좋겠다.


3. 창조성; 독특한 아이디어

내가 추구하는 가치 중에 제일 재밌지만 제일 어렵다. 편하고 소재가 좋은 옷은 많지만 개성 있고 독특한 스타일을 녹여내는 데는 엄청난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다양한 브랜드들이 꾸준히 추구하고 있고, 못 입는 옷이라고 비난하긴 했지만 디자인에 집중하는 것 자체는 필수요소라고 생각한다.


4. 힐링; 치유의 역할

앞서 의식주의 본래 의미를 언급했다. 호랑이 가죽으로 중요부위를 가리고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는 시대가 지났는다는 건 나도 잘 안다. 현대 디자이너들은 옷을 디자인할 때 보호나 보온의 목적보다는 보여지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것의 과잉이 문제가 되고 있다. 좋은 옷은 필요하지만, 그게 누구에게 좋은 옷인지는 반드시 스스로에게 여러 번 되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비자들이 자신의 옷을 통해 일시적인 기쁨이 아닌 보다 장기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옷을 통한 힐링의 철학을 꾸준히 공부하고 추구해야 한다.


예쁜 옷을 입더라도, 거대한 쓰레기섬이 사람들의 마음속에까지 떠 다닐 필요는 없어지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젠(Jenn)

만들고 경험하고 사랑하고 소통하는데 재미를 느끼는 디자이너

매거진의 이전글 뉴욕 및 미국에서 중고품 팔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