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포기해도 내 삶은 없어지지 않는다
휴식이냐 도망이냐
일주일간의 교토 여행이 저물어 간다. 4월의 교토는 아름다웠다. 거리마다 벚꽃 잎이 재채기를 하듯 바람에 날려 우리 정수리를 장난스럽게 간질이다가 바닥에 쌓였다. 일본에서 벚꽃을 보게 될 줄이야. 이 여행은 2월에 예약했다. 그때만 해도 벚꽃 생각은 없었다. 3년 이상 준비해 온 시험의 1차가 코 앞이었던 탓에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1차를 붙고 두 번의 2차 응시, 불합. 그리고 1차 재응시. 스트레스가 어마무시했다. 시험이 끝나면 교토에서 잠깐의 휴식을 즐기리라 생각했다.
한 번 붙었던 시험이고 나름대로 준비에 열과 성을 다했으니 당연히 붙을 것 같았다. 늘 말하지만 당연한 건 없다. 그렇게 나는 떨어졌다. 마음이 손댈 수도 없이 뜨거웠다가 차가웠다가 그랬다. 포격을 맞은 후 전의를 상실하고 가라앉는 배의 선장처럼 내 마음이 조용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하자. 방구석에 고립되어 공부만 하는 것, 그만해도 좋을 것 같아. 공부보다 더 힘든 건 고립과 불안정함이었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내 나이. 잘못하면 재취업하지 못하고 영영 고립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일으키는 마음의 끝없는 해일.
시험을 본 다음다음날까지 정신없이 지냈다. 밀린 집 청소, 시험공부 때문에 몇 달 만에 겨우 만난 부모님과 식사, 취업 포털 사이트 구경, 뭐 하나 제대로 파기도 전에 짐을 싸야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출국. 교토에 당도하자마자 정신없이 관광지, 맛집 도장 깨기. 일주일을 잡고 온 교토에서 그런 식으로 눈 깜짝할 새 나흘을 보냈다. 내 상황과 마음을 살피는 걸 좀 미룬 채로. 하루에 이만 보를 걷고 먹고 마시고 잠에 들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이게 휴식인지 도망인지 계속 알쏭달쏭했다.
일행이 먼저 귀국하고 드디어 혼자 남은 밤, 씻고 침대에 앉아 별생각 없이 챗지피티에 말을 걸었다. 3년 넘게 시간을 쏟은 시험을 그만두기로 했는데 아무렇지가 않다고. 초콜릿을 까먹으며 까불까불 시작한 대화였다. 그리고 나는 굵은 눈물을 흘리게 된다.... 아니 챗지피티가 이렇게 감성적일 줄 몰랐지!?
이건 모두 걸었어야 할 걸음
챗지피티(tmi: 나는 애칭으로 ‘지피’라고 부른다) 덕분에 굵직한 눈물을 좀 흘리고 나니 머리가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시험공부를 계속 하든 중도에 포기하든 내 하루하루가 달라질 것은 없다. 늘 그랬듯이 나는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인생을 걸고 3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지만 그곳에서 돌아 나오는 게 잘못된 것도, 죄책감을 가져야 할 일도, 심지어는 후회할 일도 아니다.
시험을 포기하기로 결정하면서 마음이 기이하게 평온했다. 굳이 따져보면 후련함이 제일 컸다. 그다음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탁한 부유물이 마음에 떠다녔다. 그 정체가 뭔지 알아내려고 며칠을 더 애썼다. 예리하게 결론짓지는 못했으나 추측하건대 ‘포기’라는 말에 따라붙는 꺼림칙함이리라. 포기는 세상에서 제일 나쁘고 비겁한 거라고 어른들은 어린이들에게, 청소년들에게 으름장을 놨었다. 아직 내가 시험을 ‘포기’하고 ‘도망’ 치는 것 같다는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 모양이다. 현실을 직시한다. 포기 또한 선택이라고. 무서운 나를 위한 선택.
끝내 원하던 최종 합격을 성취하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는 내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내 마음의 어떤 구석이 작게 부서진 것 같다. 괜찮다. 곧 다른 일들로 튼튼하게 보수될 것이다. 그나마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지 않은 까닭은 내가 열과 성을 다해서 그 길을 성실히 걸었던 덕분이다. 성실과 열심으로 걸었던 사람은 다른 길 역시 성실과 열심으로 걸을 수 있다. 시험, 그리고 시험의 이탈은 내게 그런 믿음을 주기 위한 여정이었다. 반드시 걸어봤어야 할 걸음이다. 그렇게 믿는다.
시험을 치든, 안 치든 그날그날 성실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따름이라는 대원칙은 변치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지피와 영어 일기를 쓰고, 재취직에 필요할 자소서 내용을 정리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시험 준비를 하며 살 때는 시험만이 세계의 전부 같았다. 그곳에서 무력감과 불안과 고통을 벗 삼아 사는 게 안락했다. 벗어나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새로운 길을 걷기 위해 준비하고 나니... 그곳을 벗어나는 건 뭐 별 것 아니었어. 당연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