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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둥 May 07. 2019

워라밸 시대의 야근러로 산다는 것

웃고, 웃고, 모두 오기로라도 웃었다.

주 52시간 근무제, 일과 삶의 균형, 직장인들의 문센(문화센터) 등록 열풍..


매일같이 tv와 인터넷에서 쏟아져 나와 이제는 우리의 눈과 귀에 익숙해진 단어들이다. 여러 부작용을 내세우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최소 내 주변에서는 워라밸 열풍을 반기는 추세다. 특히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은 눈에 띄게 근무환경이 달라졌다고 한다. 단순히 근무시간 단축을 떠나 사내 문화가 청정해졌다. 회식 강요와 상명하복 문화가 사라지고 소통 중심의 수평적인 형태로 조금이나마 꿈틀대고 있다고. 좋은 현상이다.

광고 회사, 해야할 일은 매일 있어

그러나 나는 워라밸 마을과 좀 동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 광고 회사에 다니기 때문이다.

요즘 평균 퇴근 시간은 오후 10시. 새로운 거래처의 일을 맡아 일복이 넘치는 상태다. 발바닥에 땀나게 뛰다 보면 금세 시곗바늘이 6시를 지나고 있다. 업계 특성상 어쩔 수 없다고 다독이지만 때때로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퇴근 후 침대에 풀썩- 쓰러지면 ‘몸이 부서질 것 같다.’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눈을 감았다 뜨면 순식간에 출근시간. 말 그대로 시간이 순삭되고 만다.

가끔은 신기하기도 하다. 휴일에도 하루 놀면면 하루 쉬어줘야 하는 저질 체력의 내가, 회사에는 9시~10시까지 일하면서도 쌩쌩하다는 사실이. 그러다 집에 오면 만취한 사람처럼 침대 위로 고꾸라진다. 예전에는 이 시간까지 매일 일한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섭다. ‘이래선 안 돼.’라는 말도, 불가피한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다 보면 ‘어쩔 수 없지.’라며 누그러진다. 상황에 나를 맞추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연약한 모습의 나는 사라지고, 강철 체력인 척하는 페르소나를 쓴 내가 스스로를 쥐어짜며 버티고 있다. 먹고사니즘의 슬픔이란.


어쨌거나 요즘 굉장히 심해진 야근에 상당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중이다. 인간이란 극한의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그 고통을 누그러뜨리려 방법을 찾아낸다고 했던가.

내게도 이 힘겨운 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두 가지가 있다. 직장 동료들과 간식 서랍이다.


나의 왼쪽에는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해 온 후배 직원이 앉아있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새 거래처에 시달리는 중이다. 이어지는 야근에 미안하기도 하지만 덕분에 든든하다. 만약 이 일을 혼자서 떠맡아야 했다면? 뇌 과부하로 파사삭- 그대로 증발했을 것이다. 동기들의 응원도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큰 힘이 된다. 어깨가 축 처져 있다며 커피 한 잔을 갖다 주던 동료,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동료까지. 말만으로도 고마운 이들의 동료애에 조금이나마 힘이 난다. (물론 가끔은 화를 돋우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나마 일이 일찍 마치는 날이면 함께 모여 맥주 한 잔 하고 볼링도 치러 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들 지칠만도 한데 항상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다니는 게 신기하다. 그들의 무한긍정 에너지를 보고 있자면 축 쳐진 내가 한심하게 느껴져, 다시 한 번 웃어보자며 양쪽 입꼬리를 애써 잡아당기곤 한다.


한편 우리 회사에는 자랑할 만한 복지가 하나 있다. 바로 야근이 이어지면 간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신규 사업을 따내기 위한 제안에 들어가는 시즌이면 매일매일 간식이 바뀐다. 덕분에 편의점 신상 제품들을 마음껏 먹어볼 수 있다. 얼굴이 익은 주인아저씨는 우리가 갈 때마다 캔커피 하나라도 더 쥐어주신다. 야근이 한창 이어지는 날들이면 사람들의 얼굴이 동그랗게 변해간다. 간식 무한제공의 부작용이다. 모두가 365일 다이어트를 외치지만 성공하는 인물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가끔 동기들이 휴가를 다녀오거나 하면 진귀한 간식거리들이 입고(?)된다. 한국에서 맛보지 못하는 신문물들을 한 줌씩 가져다주는데, 이는 차곡차곡 나의 간식 서랍에 쌓인다. 커피, 초콜릿, 스낵 등으로 가득 찬 간식 서랍을 열어보면 업무 중에도 미소가 지어진다. 먹지 않아도 든든하니 미스터리하다. 이 간식 서랍은 주로 여직원들의 자리에서 발견되는데, 취향에 따라 매우 다채롭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는데 아, 아무튼. 이 두 가지가 무시무시한 야근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우리 회사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남들은 워라밸을 외치는데, 우리는 ‘워워밸(work and work balance)’이라고. 일 끝나고 맥주 한 잔 하고 싶은데 그럴 여유조차 나지 않을 때는 가끔 슬프다며 한탄한다. 그럴 때면 나도 쓴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도 많아 좋아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예전보다 야근 비중이 많이 줄고, 혹여 공휴일이나 주말 출근이라도 하게 되면 하루의 휴일을 더 주기 위해 노력한다. 전날 늦게까지 일한 날에는 다음날 다소 지각을 해도 아무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조금씩 이 업계도 변해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방송, 통신, 광고, 홍보, 운송, IT 등.. 오늘도 바쁘게 뛰어다니는 업종에 종사하는 분들의 삶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기를 바란다.


칼퇴라는 단어보다 ‘정시 퇴근’이라는 단어에 더 익숙해지기를.

‘정시퇴근의 날’ 따위를 정하지 않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일보다 사람을 앞에 놓는 날이 얼른 오기를 바라본다.



<오늘의 명카피>

철야를 했다. 동료와 마셨다. 추억으로 웃었다.

웃고, 웃고, 모두 오기로라도 웃었다.

- 가라오케 스낵바 사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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