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58] <폭풍의 언덕>
<폭풍의 언덕>은 교수형 집행 장면으로 시작한다. 목이 졸리는 남자의 신음 소리가 들리고, 카메라가 그의 바지 아래를 비춘다. 발기한 채로 죽어가는 남자와 그 광경에 흥분해 비명을 지르는 군중, 심지어 소년들까지. 성과 죽음, 쾌락과 폭력이 뒤엉킨 이 오프닝은 에머랄드 펜넬 감독이 에밀리 브론테가 1847년 동명 소설로 남긴 고딕 세계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를 단번에 보여준다. <폭풍의 언덕>은 예의 바른 시대극이 아니고, 억눌린 욕망이 피부를 뚫고 솟아오르는, 야만의 시대를 그린 영화다.
황량한 요크셔 황야. 주정뱅이 '언쇼'(마틴 클룬즈)가 거리에서 매 맞던 소년을 데려온다. '자선' 행위라고 언급해도, 실상 '언쇼'는 아들처럼 키우겠다던 이 아이(오언 쿠퍼)를 샌드백 취급한다. '캐시'(샬롯 멜링턴)는 이 소년에게 죽은 오빠 이름 '히스클리프'를 붙여준다. '캐시'와 '히스클리프'는 황야를 뛰어다니며 자라나고, 서로가 세상의 전부가 된다. 하지만 가세가 기울자, '캐시'는 사랑과 생존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이웃한 저택의 주인 '에드거 린턴'(샤자드 라티프)은 부유하고 친절하며 안정적이다. '히스클리프'가 거친 황야라면, '에드거'는 따뜻한 벽난로였던 것. '캐시'는 하녀 '넬리'(홍 차우)에게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나까지 천해진다"라고 고백한다. '넬리'는 문밖에서 '히스클리프'가 듣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침묵한다. 그 순간 모든 걸 오해하고 '히스클리프'는 떠난다. 5년 후, 부자가 되어 돌아온 그는 이미 '에드거'의 아내가 된 '캐시'를 향해 냉혹하게 다가온다.
에머랄드 펜넬 감독은 원작의 2세대 서사를 모조리 잘라냈다. '캐시'의 오빠 '힌들리'도 사라졌다. 남은 건 '캐시'와 '히스클리프', 두 사람의 파괴적 사랑뿐이다. 이 과감한 생략이 영화를 순도 높은 로맨스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브론테가 그토록 집요하게 파고든 세대 간 트라우마와 계급의 잔혹함은 희석됐다.
'히스클리프'는 원작처럼 복수에 눈먼 괴물이 아니다. 그는 슬픈 눈빛으로 '캐시'를 바라보는, 상처받은 강아지에 가깝다. '에드거'의 피보호인 '이사벨라'(앨리슨 올리버)와의 결혼도 원작에선 냉혹한 보복이지만, 여기선 합의된 BDSM 플레이처럼 묘사된다. 목줄을 채우고 벽난로 앞에 묶인 '이사벨라'가 웃으며 순응하는 장면은, 에머랄드 펜넬 감독이 브론테 작가의 어둠을 얼마나 가볍게 다루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순간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목적은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는 게 아니다. 펜넬 감독은 처음부터 다른 걸 원했다. "관객이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 것처럼, 화면은 쉴 새 없이 자극한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달걀노른자, 밀가루 반죽을 치대는 거친 손길, 유리창을 기어가는 달팽이의 점액질. 모든 게 성적 은유다. 찰리 XCX의 전자음악도 18세기 요크셔를 뒤덮는데, 이건 시대극이 아니라 뮤직비디오에 가깝다.
시각적으로는 압도적이다. <라라랜드>(2016년)로 아카데미 촬영상을 받은 라이너스 산드그렌 촬영감독은 안개 낀 황야와 폭풍우 치는 하늘을 회화처럼 담아냈다. <콘클라베>(2024년)로 아카데미 미술상 후보에 오른 수지 데이비스는 두 저택을 극명한 대조로 설계했다. '폭풍의 언덕'은 거칠고 축축하며 브루탈리즘 양식의 벽난로가 인물들의 야성을 상징한다. 반면 '드러스크로스 그레인지'는 인형의 집이다. '캐시'의 침실 벽지는 마고 로비의 실제 피부를 3D 스캔해 만들었다고. 주근깨와 핏줄까지 재현된 그 벽 앞에서, '캐시'는 자기 자신에게 갇힌다.
재클린 듀런이 디자인한 의상은 그 자체로 캐릭터의 심리를 말한다. '캐시'의 옷은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다시 빨간색으로 변한다. 초반 검은 드레스는 달빛을 반사하는 특수 원단으로 만들어져, '캐시'가 황야에서 빛나는 환상 같은 존재임을 보여준다. 결혼식 날 입은 셀로판 드레스는 '캐시'가 '에드거'에게 바쳐진 '선물'임을 시각화한다. 46가지 헤어스타일. 38벌의 맞춤 드레스. 60회의 의상 교체. 이 영화는 마고 로비를 살아있는 패션 인형으로 만든다.
문제는 이 모든 화려함 아래 무엇이 남느냐는 것이다. 에머랄드 펜넬 감독은 원작 소설을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집어삼키는 매력이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그 매력의 핵심인 계급의 폭력성, 사랑이라는 이름의 학대, 세대를 관통하는 저주는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캐시'와 '히스클리프'의 사랑이 왜 파괴적인지, 왜 그들이 서로를 놓아주지 못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는 없다. 대신 우리가 보는 건 아름다운 두 배우가 비 맞으며 키스하는 장면의 반복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매혹적이다. 왜냐면 에머랄드 펜넬 감독은 자기가 뭘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브리저튼>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도파민이 터지는 비주얼, 귀에 꽂히는 전자음악, 노골적인 성애를 보여주고 들려준다. 이건 문학 수업용 영화가 아니라, 극장에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경험을 원하는 관객을 위한 영화다.
야만의 시대는 여전히 야만적이지만, 이제 그 야만은 아름답게 조명되고, 세련되게 편집됐다. 그렇게 <폭풍의 언덕>은 마고 로비의 빨간 드레스와 제이콥 엘로디의 젖은 셔츠, 그리고 황야를 휘몰아치는 바람이 머릿속에 남을 작품이 됐다. ★★★
2026/02/03 메가박스 코엑스 돌비시네마
※ 영화 리뷰
- 제목 :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2026)
- 개봉일 : 2026. 02. 11.
- 제작국 : 미국
- 러닝타임 : 136분
- 장르 : 드라마, 멜로/로맨스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에머랄드 팬넬
- 출연 : 마고 로비, 제이콥 엘로디, 홍 차우, 앨리슨 올리버, 샤자드 라티프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