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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자아의 대화_경험자아, 배경자아, 기억자아

회복의 계절을 기다리며

by 미리나



고통의 조각 위에 말을 덧입히는 일


의사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언제나 달큰하다.

익숙한 말도 새롭고 무심한 농담 같은데도 마음에 오래 남는다. 가끔은 웃기고, 가끔은 멈칫하게 하고, 어떤 날은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마도 고통과 즐거움이 따로따로가 아니라 그 말 안에 함께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분의 말에는 삶을 견디고 살아낸 이들만이 나눌 수 있는 묘한 전우애 같은 것이 보인다.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편안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당신을 배려했기 때문이다. 이건 인간관계뿐 아니라 모든 시스템과 상황에도 마찬가지다.

편안한 공간, 안정된 사회, 잘 굴러가는 조직도 사실은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수고와 설계,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편안함은 배려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그렇기에 지금의 편안함은 누군가의 노고 위에 있는 것이다.



고통은 대체로 파편처럼 찾아온다.

제멋대로 부서지고, 흩어지고, 방향도 모른 채 툭툭 떨어진다. 하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내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 조각들이 하나씩 이어진다.

붙잡고 있으면 뜨겁기만 했던 조각이 어느 순간 하나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통해 나는 내 고통을 다시 본다.

더는 두렵지 않게, 더는 흩어진 채로 남지 않게.

어쩌면 글을 쓴다는 것도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

고통의 조각들을 주워 하나씩 이어 붙이는 일.

애써 의미를 찾기보다 그냥 써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의미가 생기는 일.


고통을 앓는 데서 멈추지 않고, 바라보고, 말하고, 함께 웃을 수 있게 되는 것.

그리고 그렇게 다시 살아내는 것.



상태가 썩 좋지 않을 때도, 원장님은 내 안의 괜찮은 부분을 꼭 집어내 보여주신다.

내가 놓치고 있던 장점들을 마치 오랜만에 꺼내 입는 옷처럼 조심스레 꺼내어 그 위에 살포시 입혀주신다.


너는 지금 이런 상태지만, 여전히 이런 점이 있지 않느냐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나를 나답게 만드는 조각을 찾아내신다. 연약한 불씨처럼 정성스레 지켜내셨고 끝내 내 앞에 살포시 놓아주셨다.


그분의 이야기는 낡은 조각천을 꿰매어 따뜻한 옷을 만들어주는 일처럼 느껴진다. 너덜너덜해진 마음 위에 기억하지 못한 나의 힘과 온기를 덧입혀준다.


고통을 꿰매는 일이 이렇게 조심스럽고도 단단한 일이구나 싶다.

이렇게 정성이 느껴질 때면 나는 다시 나를 돌아보게 되고 주저앉아 있던 마음이 조금씩 일어난다.

그렇게 내 고통의 조각 위에 입혀준 말은 나를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

만약 그것이 철학이라면 그것은 삶에서 직접 길어 올린 가장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철학일 것이다.



의사는 내가 놓치고 있는 장점들을 캐치해서 오랜만에 입는 옷처럼 조심스레 꺼내줍니다.
한동안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그 옷은 처음엔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몸에 닿는 촉감은 어딘가 맨송맨송하고 나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흐릿했습니다.
천천히 어깨에 걸치고 거울 앞에 서보니 그게 분명히 나였다는 걸, 나도 잊고 있었던 나였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의사는 말합니다. "이건 원래 당신이 갖고 있던 거예요."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덜컥, 나는 내가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무언가를 다시 입어보는 중입니다.


나도 잘 모르는 장점들을 내 마음 위에 살짝 얹혔을 때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나를 믿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제 제법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부정적인 언어는 부속품처럼 언제 어디서든 나를 따라붙는다는 것을.

고통의 물결을 더 키울 뿐,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잔잔하던 물이 일렁이듯, 부정의 말은 고통을 되새기고 되살려낸다.

그래서 “왜 이렇게 아프지?”가 아닌, “어떤 감정이 함께 올라왔지?”를 먼저 떠올린다.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해?”라는 억울함에 휘청였던 내가, 이제는 조금 다르게 묻는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뭘 배울 수 있을까?”

통증에 감정이 실려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고통은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낯설고 두렵긴 해도 중심을 제법 잡을 수 있다.


“괜찮아. 또 왔구나. 이번엔 어떤 이야기니?”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이 올라올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솔직히, 말로 꺼내 놓으면 그 자체로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몸이 아픈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내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언어 하나, 시선 하나, 마음가짐 하나가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몸으로 체험했기에 이 모든 발전이 내게는 작지 않다. 완벽하게 낫는 것을 바라는 대신, 오늘도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내 감정을 존중하며, 내 몸이 보내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다. 흔들리고 지치지만 나는 여전히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나는 요즘 참 많이 따뜻하고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감정을 느끼되 그것을 통찰로 전환하는 능력을.

그것을 삶의 이해로 녹여내는 감각을.

그로부터 배움을 추출하는 힘을.

그것을 지혜로 승화시키는 태도를.

그것을 내면의 언어로 통합하는 역량을.




원장님은 나로 하여금 감정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것을 의미 있는 통찰로 정제해 내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 처음에는 능숙하지 않았지만, 나는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면 꽤 잘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시작이다.

지난 3개월 치료는 연습에 불과했지만 앞으로 나는 그만큼 성장의 기회가 있었다.


학교라고 생각하며 몸과 마음을 배우며 열심히 나아가야겠다.

병원은 나에게 더 이상 치료만 받는 곳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배우는 학교다. 그렇게 흩어진 마음의 조각을 붙이니 긍정의 기운이 샘솟아 병원에 가는 것이 더 가벼웠다. 주사 맞는 건 빼고...(웃음)


일상 속에서 우리는 몸의 신호를 무시하거나 간과할 때가 많지만 건강을 다루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며

체계적으로 몸을 관찰하는 것은 소중한 기회다.

몸은 우리가 평소에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고 그만큼 세밀하게 들여다볼 기회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학회 강의는 진료실에서는 듣지 못했던 내용이었고 앞으로도 듣기 어려울 이야기였다.




그동안 책이나 유튭에서 보았어도 나에게 놀러 온 통증 녀석들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디서 이런 배움을 얻을 수 있었을까.


통증을 이해하는 세 자아의 시선


통증과 고통을 온몸으로 겪던 경험자아는 너무 아파서 감정에 그대로 끌려갔다.


한발 떨어져서 바라보던 배경 자아는 큰일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함께 휘말려 들었다.


모든 기억을 담담히 기록하던 기억 자아는 내 안에 콕 박혀있었다.


경험 자아는 아프다며 흔들렸다. 배경 자아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중심을 잡으려 했다.
기억 자아는 그 모든 내면의 대화를 간직했다. 세 자아는 그렇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감정적인 영향이 크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마음이 거짓말처럼 편안해졌다는 것을.

감정적이라는 건 결코 큰 병이 아니었다. 감정적인 나이기에,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감정을 꿰매는 손길, 마음을 덧입히는 치료


인스타에 치료 기록을 올리자, 친구 A가 밥 먹다 물었다.

“원장님이 ‘감정에 끌려가지 말라’고 하셨을 때 상처받지는 않았어?”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물론 오랜 시간 신뢰를 쌓아온 분이라는 점도 있지만 그 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그 말속에 담긴 진심을 내가 뼛속까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결코 차가운 충고가 아니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말이 아니라

내 회복력을 믿고 존중하는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깊은 신뢰의 표현이었다.


며칠 뒤,

서로 농담하며 먹을 것도 나눠 먹는 사이가 된 간호 선생님들 중 한 분이 말했다.


“원장님 맨날 **님한테 똑같은 말씀 하시는데 좀 들어드려요ㅎㅎ”


“제가 끌려가고 싶어서 끌려가는 게 아니에요. 내 몸이 이렇게 된 걸 어쩔 수 없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대신 이렇게 말했다. “제가 누군데요, 저 꼭 나을 겁니다!” “행보칸 환자로 거듭나겠어요.”

“***님, 아픈데도 어떻게 이렇게 밝으세요.” 그렇게 말하며 도리어 고맙다고 하며 나를 보고 울었다.

참 이상한 선생님이다. 정정한다. 사실은 너무 따뜻한 선생님이다.


의료 현장에서 '감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일은 자칫 환자의 반감을 살 수 있는 말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의사 선생님의 그 말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동안 겉으로 드러나는 큰 호전이 없다고만 여겼던 치료가 변화되고 있었음을 그 말이 보여준 듯했다.


"감정에 끌려가지 말라"는 그 한마디는 어쩌면 내가 감정의 기복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위중한 단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내가 정말로 통제 불가능한 중증 상태였다면 아마도 그런 말을 반복하지 않았겠지.


실제로 당장 생명이 위급한 환자에게는 감정 조절을 요구하기보다는 ‘보호’와 ‘안정’을 우선으로 두지 않겠는가. 그것은 내 상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본 끝에 내린 의학적 판단이었고 그 판단은 내게 ‘희망’이자 ‘안도감’이 되었다. 당시에는 잔소리처럼 들렸던 말, 나를 몰라서 하는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던 말, 말은 들리지만 가슴으로는 도저히 닿지 않던 그 말들. 그분은 내 몸만이 아니라 마음과 내면, 삶 전체를 보려 하셨다.


수많은 시간과 기억이 응축되어 굳어진 통증은 마치 결정처럼 복잡하고 정교하다는 것을 해독해 주었다.

그 복잡한 결정을 풀어가는 시간이, 곧 나를 다시 이해해 가는 시간이 되었다.


그분의 손길은 의학이었지만 그 시선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면 더 깊은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내면을 툭! 건드렸을 뿐인데 무릎을 탁탁! 그게 몇 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구름의 조언은 더 이상 내게 잔소리가 아니었다.

아픈 몸, 혼란스러운 마음, 지친 환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진심.

환자가 스스로를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강력하고도 온정 어린 응원의 말이었다.


그 말들은 날 살리려는 다정한 구조의 손길이었다. 고통을 감정이 아닌 진실, 사랑, 동행으로 바라보는 전환점이 되어준 그분의 말 앞에 ‘잔소리’라는 단어는 이제 감히 올려놓을 수 없다.




행보칸 환자라는 자격


나중에서야 들은 이야기였다.
원장님께서 어떤 환자 한 분을 위해 감정 공부를 3년이나 하셨다는 것이다.


지금도 공부는 여전하신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 멍해졌다. 환자를 위해 그렇게 오랜 시간을, 그 깊고 복잡한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고, 기록하셨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나는 그분의 고통 덕분에 덕을 본 셈이다. 누군가의 깊고 지난한 아픔이, 누군가의 진심 어린 공부가, 지금의 나에게는 배움이 되어 주고 있었다.


장시간의 통증이 얼마나 버겁고 고된지, 삶을 어떻게 갉아먹는지 나도 경험해 봤기에, 일면식도 없는 그분께 어쩐지 마음이 아리다. 그럴 일은 아마 희박하겠지만 혹시라도 언젠가 그분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나도 이렇게 살아내고 있다고, 그러니 당신도 분명 해낼 수 있다고 작은 용기를 건네고 싶다.


고통그렇게 타인을 향한 이해연민의 창이 되어준다.
나만의 아픔이었던 것 같았던 통증이, 누군가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그 안에서 우리는 더 깊이 연결된다.


내가 조금 더 나아지는 만큼 그 아픔도 함께 나누고 싶다.
그리고 바란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아픔을 견디고 있는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기를.


더 이상 아픈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병원과 경찰서가 망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던 의사 선생님의 뜻에 어느샌가 나도 물들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제야... 진정한 회복이란!! 병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아픔을 함께 껴안고 서로를 다정히 보듬어주는 그런 세상에서 일어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런 지혜는 누군가의 삶에도 흘러가야 한다고 믿기에 물처럼, 숨결처럼, 연결된 삶 안에서 자연스레 퍼져나가면 좋겠다.


누군가의 고통이 내 고통과 닿아 있고 또 나의 회복이 누군가의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고통도 의미 있는 인연이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언젠가, 어느 날 회복했다고 환하게 자랑해 주었으면 좋겠다.


당신의 회복은 누군가의 희망이 될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비추며 살아가니까.


우리는 때로 누군가의 '배경'이 되고 어떤 순간엔 함께한 '경험'이 되며

오래도록 남는 '기억'이 된다.

이름 없이 스쳐간 듯 보여도 우리는 서로의 삶에 새겨져 있다.


모든 날들의 울음과 기다림,

그럼에도 끝내 피어난 한 송이 웃음이

당신의 내일을 더욱 환히 비추어주기를.

아프더라도 작은 낭만을 느끼기를.

행복이 당신 곁에 머물기를.


원장님께 참 많이 들었던 말,

“모든 감정은 지나갑니다.” “감정은 흘러가는 구름 같은 거예요.” “자연스럽게 흘려보내세요.”


그럴 때면 속으로 되묻고 싶은 적도 있었어요. 구름이 되기엔 이 감정이 너무 무겁고
흘려보내기엔 이 마음이 너무 꽉 차 있다고. 근데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요.


끌려다녀도 나에게 뭔가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모르니 천천히 들여다보라고,
그 안에 뭔가 중요한 것이 숨겨져 있다고. 감정은 흘러가지만 그걸 붙잡고 있던 나의 손은
무엇을 놓지 못해 그렇게 꽉 쥐고 있었을까요.


그걸 들여다보는 시간은 꼭 필요한 시간이었고 앞으로도 필요해요. 그래서 이젠 흘려보내기도 하고 가끔은 살며시 안아보기도 해요. 어느 쪽이든 괜찮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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