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내 안의 우물을 열다

감정을 눌러두는 데 익숙했던 나의 고장 알림

by misroom
어? 이상하다 왜 충전이 안되지?
그때 알았다. 내가 고장이 났다는 걸....


#1-1. 충전되지 않는 마음, 처음 느낀 이상함

오랜 외국 생활 속, 몇 년에 한 번씩 한국에 다녀오는 게 나에게는 정기적인 충전 루틴이었다.

어릴 적 내 모습을 기억해 주는 '내 사람들'을 만나고, 편안한 언어와 익숙한 리듬 안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나면,

다시 낯선 땅에서 살아갈 힘이 생겼다.

이국땅에서 나를 아는 사람 없이 버티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기에, 그 충전은 나의 생존 전략이었다.


그런데 팬데믹으로 인해 2년 넘게 귀국하지 못했다.

물론 과거에도 사느라 바빠 2년 이상 한국에 가지 못한 적은 있었지만,

'안 간 것'과 '갈 수 없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마치 스스로 닫은 문과 밖에서 잠긴 문만큼의 차이랄까.

제한이 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은 점점 메말라 갔다.

그리고 국경이 열리자마자 백신을 맞고, 비행기 표를 끊고, 설렘과 함께 귀국했다.


그러나 이상했다.

사람들도 반가웠고, 여느 때처럼 웃고 떠들고 맛있는 걸 먹었는데,

돌아가는 길에 마음이 하나도 채워지지 않은 느낌이었다.

충전되기는커녕, 무언가 계속 새고 있다는 생각.


어? 뭐지? 왜 이러지? 이상하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 감정을 붙잡고 씨름하다가, 처음으로 인정했다.

뭔가 고장이 난 거 같다. 내가 이상하다.

그간 누르고 억눌렀던 것들이 이제는 더는 무시할 수 없게 된 거다.




#1-2. 썩은 감정이 풍기는 냄새

동시에 찾아온, 아버지의 죽음과, 원하지 않았던 이직, 그리고 이혼.

그 시절의 나는 내가 잘못된 걸 알면서도 들여다 보기를 두려워했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뚜껑을 덮은 채, 무던하게 버티는 법만 배웠다.

언젠가 괜찮아지겠지, 그냥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그런데 그런 건 없었다.

어느 심리학자는 감정을 유통기한 지난 우유팩에 비유했다.
개봉하지 않은 채 방치된 우유는 썩고, 결국 어느 날 폭발하듯 터진다고.
감정도 마찬가지다. 상한 감정은 어딘가로 흘러가지 않으면 고인다.

그리고 고인 감정은 썩는다.
그 말이 나에게 너무나 정확하게 와닿았다.
그 당시의 나는 정확히 그 상태였다.

계속해서 안 괜찮은 신호를 보내는 몸과 마음,

그런데도 멈출 수 없어 억지로 눌러두고 살았다.
단단히 봉인해 둔 내 안의 우물은 이미 오래전부터 고여 있었고,

그 물은 이미 썩어 있었다.
다만 나는 그 냄새를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냄새가 퍼질까 봐, 들킬까 봐 두려웠다.

그런데 이제는 더는 미룰 수 없었다.




#1-3. 상담실에서, 나의 우물을 열다

결국 상담을 받기로 결심했다.
2022년 5월이었다.


그전까지는 매번 '지금은 바쁘니까',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하며 미뤄왔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 시기, 내 안의 우물은 이미 넘치고 있었다.

첫 상담에서 나는 말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감정의 실타래는 너무도 엉켜 있었다.
하지만 조금씩 풀어갔다.

나는 악취 나는 나의 우물을 열었고,

그 안에는 억울함도, 외로움도, 두려움도, 후회도 있었다.
그 많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숨겨두었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저 잘 숨겨져 있었을 뿐, 여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지만, 더 이상 감정을 외면하지 않는다.
아니, 외면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무시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오히려 마주하고 흘려보내야 비로소 가볍게 걸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내 안의 우물을 다시 열기로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나를 다시 살아내기 시작했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