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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Sep 16. 2018

꿈이 일정표가 되어버린 후에도

매일을 애쓰기 위해서 


 친구가 연출한 드라마가 첫 방송을 탔다. 그는 인스타그램에 한 장면을 캡쳐해 올렸다. ‘연출 땡땡땡’이라는 크레딧이 붙은 장면이었다. 여러 스터디를 함께하며 취업 준비 시절을 보냈던 동지였다. 오죽하면 생리주기가 비슷해질 정도였을까 (붙어다니는 여자친구끼리는 생리주기가 비슷해진다는 속설). 한량이었던 그 시절은 머릿 속에서 몇 번을 재생해도 좋다. 사회에서 불러줄 아무 이름도 없었고, 소속도 없었지만, 백수한량으로서 충만했다. 참 좋았다. 그리고 3년이 지났다. 그 때 우리는 왜 사회에서 우리 이름을 불러주지 않나, 불안해 했으나 이제는 사회로 나와 얻은 이름표에 기가 빨린다. 친구는 드라마를 만드는 직장인이 되었고 나는 미디어 스타트업에서 일한다. 


 이야기의 세계를 동경해왔다. 동화부터 시나리오까지. 연설문도 좋았고, 고전시가도 좋았다. 현대시를 배울 때는 혼자서 이상한 짓을 했다. 시를 행마다 쪼개 놓고 다른 순서로 배열해 몇 가지 나만의 버전을 만들었다. 오지선다 문제지와 상관 없이 그냥 이야기를 해부하는 일이 좋았다. 뉴스도 좋다. 남의 일기도 좋다. 내 취미라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현대인의 취미’이긴 한데, 넷플릭스와 왓챠플레이를 섭렵 중이다. 요즘은 예전과는 한 가지, 좀 달라진 것이 있다. 이젠 이야기 뿐만 아니라 이야기 속 크레딧을 이야기만큼 경건한 맘으로 읽는다. 이 이야기의 세계가 사람의 노동으로 만든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드라마 업계의 노동 문제가 기사화 될 때마다 친구를 떠올린다. 


  꿈은 이제 우리에게 일정표가 되었다. 이야기에 대한 동경. 그 동경을 재생산하려면 이야기를 위해 세 끼 밥 곱하기 노동자 수 곱하기 작업 일 수만큼의 돈이 있어야함을 알게 되었다. 돈은 돈과의 협상에서 나오고. 원한 적 없는 사회생활의 과제들이 자꾸 우리 이름을 부른다. 내가 원하는 일이 성사되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필요한 경우가 더 많더라는 것. 이십대의 막바지, ‘이딴 게 사회생활이냐!’ 반문하고 화도 내보지만 우리는 아직 ‘사회생활’의 기본값을 바꿔놓지는 못한 중간자들일 뿐이다. 게다가 이쯤 되니 뭐가 뭔지 모르겠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어쨌건 나도 내가 욕하는 그 구조의 일부분이니. 그래도 분명히 동의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고, 그런 ‘지금 사회의 기본값’에, 내가 너무 적응해버리지 않도록 매일을 애쓴다. 


 매일 애쓰는 방법 뿐이다. 친구와 언젠가 ‘천미리송’을 작곡하자고 이야기한 적 있다. 맥주는 하루에 천미리 정도 마셔줘야 한다는 맥주 예찬송. 여기서 맥주는 일종의 연료 같은 것이다. 원피스의 콜라맨이 ‘자기다움’을 발산하기 위해 콜라를 채우는 것처럼. 사실 무엇이든 좋다. 시를 몇 장 읽거나, 스스로를 위한 종이달력을 사거나, 아침마다 고양이 사료를 채우고 똥을 치우거나, 맥주를 천 미리 마시거나. 일종의 수련처럼 매일 스스로 ‘나다울 수 있는 시간’을 끼워넣는다. 내가 나를 호명하는 시간. 매일 애쓸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인생을 ‘액자식 구성’의 이야기라고 상상하면 나답게 살려고 노력할 때, 조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나는 가끔 할머니가 된 나를 상상한다. 진한 인상이지만 금방 헬렐레 표정이 풀어지는 할머니이고 싶다. 할머니가 된 나의 시점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점을 추억한다. 아둥바둥 애쓰는, 그래도 매일 비겁하지 않게 사는 스스로를 그 안에서 본다. 맥주로든 사랑으로든 매일 자기를 돌보고, 아껴준 나를 아마 할머니인 나는 엄청 칭찬해줄 것이다. 


*코스모폴리탄에 기고한 글입니다

*커버이미지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드라마 빨간머리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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