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아
모스크바 최대의 문화, 휴식 공간 고리키 공원 (Gorky Central Park)
고리키 공원은 모스크바는 물론 전 세계에도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하는 대규모 공원입니다. 1928년 개원했으니 어언 백여 년이 되어 가는 이 공원은 구소련 유명 작가 막심 고리키의 이름을 땄다고 하네요. 서울의 한 '구' 정도는 될 듯한 거대한 면적은 숲으로 둘러 싸여 있어 사계절 시민들의 휴식처와 산책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고 최근 보수 공사를 통해 놀이공원, 미니 열차, 자전거 공원 등 편의 시설까지 갖춰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종합 놀이, 문화 공간이 되었습니다. 겨울철에는 대규모 스케이트 시설로도 유명하다고 하네요. 모스크바 강과 맞닿아 있어 봄, 여름에는 일광욕을 즐기는 모스크비치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물론 제가 방문한 한겨울엔 그런 광경 따위 기대할 수 없겠죠.
모스크바 남쪽에 위치한 고리키 공원은 모스크바 강과 인접해 있고, 지도의 거대한 녹색 면적을 통해 알 수 있듯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기에 시내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은 옥트야브르스카야(Октябрьская) 역입니다. 강 건너 Park Kultury에서 내려 모스크바 강 다리를 건너며 모스크비치의 낭만을 즐기는 방법도 추천합니다. 단, 한겨울이 아니라면 말이죠. 저는 비교적 가까운 스몰렌스카야에 호텔이 있어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지도를 보니 붉은 광장부터 아르바트, 고리키 공원까지, 생각보다 모스크바 참 좁죠? :)
아직도 이 고리키 공원을 방문했던 것이 좋은 선택이었냐는 스스로의 질문에 확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 날 고리키 공원에서의 시간들은 많은 불운이 겹쳤습니다. 제가 이 곳을 찾은 1월 12일은 새해부터 크리스마스를 포함한 약 2주간의 긴 러시아의 홀리데이 시즌이 끝난 다음 날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미 '놀 만큼 논' 모스크비치들이 이 공원을 찾을 리 만무한 것이죠.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하루 종일 하늘 가득 구름이 낀 우중충한 날씨라 걷기만 해도 기운이 빠지는 날이었습니다. 아마 다시 이 날로 돌아간다면 고리키 공원 방문을 다른 날로 미루고 실내 전시나 쇼핑을 갔을 텐데 하고 중얼거려봅니다.
철저히, 나만을 위해 열린 고리키 공원
확실히 그랬습니다, 제 기분에는 요. 제 기대대로 이 넓은 공원이 낭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우중충한 날씨와 쌓인 눈, 그리고 긴 겨울 축제를 끝내고 휴식에 들어간 스케이트 장과 각종 편의시설 등 때문에 마치 들어오지 말아야 할 곳에 들어온 느낌을 산책 내내 받았는데요, 입구에 설치된 저 구조물이 특히 그랬습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저 조명들이 모두 불을 밝히며 사람들을 환영하는 꽃길을 만들어 주었겠지만, 이 날 이 길을 걷는 걸음은 어쩐지 민망했었죠.
-가뜩이나 반대편에서 마주 걸어오는 아리따운 모스크비치 여인 둘 때문에 더더욱-
그래서 고리키 공원에서의 시간은 이 곳에서 열렸던 -그랬을 거라고 추측하는- 겨울 축제의 흔적들을 뒤늦게 밟으며 상상하는 것으로 채웠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매력적인 구조물은 겨울이면 모스크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는 스케이트장의 모습입니다. 고리키 공원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스케이트장을 자랑하는데요, 이 공원 내에 흐르는 개울을 모두 스케이트장으로 조성해, 우리가 흔히 놀이공원에서 즐기는 제자리 돌기의 스케이트 광장이 아닌, 어엿한 트랙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성인들의 내기 스케이트 경주를 해도 무리 없을 만큼의 엄청난 코스 규모 역시 이 공원의 '클라스'를 보여주죠?
모스크바의 겨울 날씨라면 별다른 노력 없이 그저 '물만 뿌려놓는 것 만으로' 간단하게 스케이트장이 완성될 것 같지만, 그렇다 해도 이 엄청난 길이의 트랙은 한국에선 만나기 불가능한지라 한 번 경험해보고 싶었습니다만, 이 날은 그냥 '모두 다 쉬는 날'이더군요. 마침 아침까지 내린 눈이 쌓여 얼음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트랙을 힘겹게 돌며 휴지통과 시설물들을 정리하는 직원의 모습에서 불과 어제까지 이 스케이트장이 얼마나 뜨거웠을지 조금은 느낄 수 있습니다.
정확한 안내를 받을 수 없었지만 -안내직원조차 볼 수가 없으니- 거의 모든 시설이 문을 닫거나 정비 중이었고, 공원 곳곳에서 환경 미화와 보수 공사 등이 이뤄지는 것을 봐선 확실히 이 날은 고리키 공원의 휴일이 아니었을까 하고 유추해봅니다. 이 공원에 관광객이라곤 저 혼자뿐인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덕분에 이 공원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원래 상태 그대로 볼 수 있었지만, 날씨와 인파 탓에 어딘가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이 공원 풍경들을 소개한다면, 그리고 모스크바 여행을 계획하시는 분이 고리키 공원을 일정에서 삭제하실까 봐 걱정입니다. 제가 방문한 이 날이 일 년 중 고리키 공원이 가장 적막하고 황망하며 음울한 날이었을 거라고 말씀드릴 수밖에요.
사진 찍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이 공원을 돌기를 한 시간쯤 되었을까요, 공원 끝 부분에 있는 작은 연못에서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달려갑니다. 한겨울 고리키 공원에서 그렇게 보기 힘들다는 사람, 게다가 아이들입니다! 한겨울 추위에도 가족 단위로 공원에 나온 이들은 물 위의 생명체를 보고 몹시 반가워했습니다 -마치 아이들을 반가워했던 저와 같군요- 추위에 양 볼이 빨갛게 얼었는데도 깔깔 웃으며 오리들을 쫓는 걸 보니, 역시 러시아 아이들은 떡잎부터 다르다 싶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과 비슷한 풍경을 발견했던 것은, 억지로 끌려나온 듯한 아버지의 무료한 표정이었습니다.
고리키 공원 내에 위치한 큰 연못입니다. 이 곳을 찾기 전 검색한 결과에 따르면 봄과 여름에는 이 연못 주위에서 일광욕을 즐기거나 낮잠을 자는 모스크비치들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하네요. 휴식 공간 고리키 공원 내에서도 가장 '명당 자리'가 되겠죠? 물론 이 날은 이렇게 땅인지 물인지 알 수 없는 설원이었습니다. 이 날 날씨처럼 하얀 표지판이 '아마 여기가 거기일걸?!' 하며 저를 놀리는 것 같습니다.
그럼 뭐해 다 얼었는데
모스크바 강과 맞닿아 있는 고리키 공원은 시민들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공원과 강이 맞닿는 곳엔 강을 보며 걸을 수 있는 곧고 넓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중간중간 이 곳이 러시아의 땅이라는 것을 상징이라도 하듯 새빨간 벤치들이 있어 봄, 여름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눈부신 봄날에 저 벤치에 앉아, 혹은 연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파란 강과 녹색의 공원을 번갈아 보면 정말 행복해질 것 같군요. -왜 난 겨울에 이곳에-
모스크바 강 주변에는 러시아 전통 양식을 채용한 멋들어진 건물들이 밀집해 있습니다. 이 고리키 공원 인근도 예외가 아니라서 강 건너로 멋진 모스크바 강 다리와 건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대형 호텔이네요. 크리스마스를 맞아 입구 앞에 설치된 대형 트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규모 자체로만 보면 붉은 광장의 굼 백화점 앞에 설치된 트리보다도 더 커 보이는군요. 그리고 그 앞을 유유히 지나는 모스크바 유람선의 모습은 이 날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게 여유로워 보입니다. 다만 날씨가 좋지 않아서인지 아름답지는 않군요.
제대로 본 것이 이 것 밖에 없으니 저에겐 이 각양각색 재미있게 생긴 노점들의 모습이 고리키 공원 최고의 볼거리로 남았습니다. -누가 뭐래도 저한테는 그렇습니다, 아 삐친 건 아니고요- 동화 속에서 본 '과자로 만든 집'처럼 생긴 매점 건물과 장난감 자동차 같은 길거리 카페, 그리고 청소 자동차까지도 이 곳은 유머 넘치는 외형으로 보는 저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아마 이 풍경마저 없었다면 이 공원에 다시 오고 싶지 않아질 정도로 이 날 날씨와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이 몇몇 풍경을 보며 이 공원의 봄과 여름을 상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이 곳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하겠죠. 아마 저에겐 평생 쌀쌀맞은 공원으로 남을 지도 모르겠지만요, 하하.
그렇게 고리키 공원을 나오는
후회 같지 않은 후회의 걸음
궂은 날씨와 크리스마스 시즌 직후의 '절묘한 타이밍' 등 이 날 고리키 공원 방문은 결코 성공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누구도 보기 쉽지 않은 '고리키 공원이 가장 아름답지 않은 날'을 본 몇 안 되는 지구인이라는 생각을 하며 저를 위로해 봅니다. 두 시간이 넘는 산책에도 한 바퀴를 다 돌 수 없을 만큼 고리키 공원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고, 비록 겨울 날씨로 인해 모두 즐길 수 없었지만 봄이 기대되는 넓은 녹지, 그리고 잠시 겨울잠에 든 다양한 편의 시설과 휴식 공간 등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 보시는 분들께 이 고리키 공원은 '언제 찾으시더라도 최소한 이 사진보다는 훨씬 아름답고 볼거리, 할 거리 많은 공원'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아쉬움을 달래며 고리키 공원을 나온 저의 발걸음과 마음을 위로해 준 것은 고리키 공원 출구에 펼쳐진 새하얀 눈밭과 모스크바 강 주변의 풍경들이었습니다. '내 비록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 내 아름다움을 다 보여주지 못했지만, 다음번에 다시 찾아온다면 그땐 기꺼이 모스크바 최고의 미모를 경험하게 해 주지'라는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쌀쌀한 날씨와 그만큼이나 무뚝뚝한 사람들의 표정, 그리고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마치 앙칼진 악녀처럼 느껴지는 이 곳 모스크바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던 곳이 바로 이 고리키 공원입니다. 그래서 저는 꼭 다시 따뜻한 날에 이 곳을 찾아 고리키 공원의 매력을 만끽할 것입니다.
아쉽게도 오늘 여행은 다른 날처럼 아름답지 않았지만, 이런 날도 있는 것이 여행이겠죠?
어떻게 매일 아름다울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