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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un Leymet Nov 11. 2023

세련된 소녀

이혼 가족

한동안 본의 아니게 버스를 타고 다녔다. 버스 안에서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소녀를 자주 보았다. 아직은 멋을 부릴 줄 모르는 풋풋함이 느껴졌다. 정직하게 타진 가르마도, 목 뒷덜미에 얌전히 묶인 머리채도 모두 조용하고 차분했다. 허리 깊게 내려온 밝고 긴 다갈색 머리가 햇볕을 받으면 조금 더 밝아보였다. 빛을 받음과 동시에 빛을 잃은 듯한 색깔의 머리칼이었지만 무엇을 잃은 것이 아니라, 무엇을 품고 있는 듯한 색이었고 매무새였다. 바로 사춘기 나이 아이의 머리칼이었다. 하얀 손으로 잠시 핸드폰을 만지작 거린다. 잠시 그 안을 바라보고 시선을 뗀다. 핸드폰에 고정되어 있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소녀의 시선이 어디에 닿아있던지 소녀는 한결같이 여유롭고 평화로운 표정을 하고 있다. 웃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그란 눈가에 웃음이 맺혀 있고, 입 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다. 세상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소녀의 밝은 눈동자는 동그랗게 투명했고, 수줍었다. 입술 모양을 무심코 쳐지게 하는 세상 짐이 없어 보이는 소녀의 표정이 참으로 평화로웠다.


하굣길 버스 안에서만 마주치던 소녀가 음악원 건물 앞에 서 있다. 차 한 대가 소녀 앞에 멈췄고, 소녀는 차 문을 열고 첼로를 건네어 받는다. 체로가 소녀의 키만 하다. 어깨에 짊어진 첼로는 소녀의 키를 훌쩍 뛰어넘었다. 첼로를 싣고 왔던 차는 출발했고 소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로, 첼로 앙상블 수업에 초대받아 갈 때마다 소녀를 본다. 일 년에 몇 번 앙상블 수업에 가족들이 초대를 받는다. 첼리스트 학생들과 선생님이 큰 원 모양을 만들어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첼로를 다리 사이에 낀 첼리스트들이 만든 원보다 더 큰 원을 그리며 가족들이 드문 드문 둘러앉는다. 내 아이의 모습이 정면으로 잘 보이는 곳에 앉았더니 소녀의 뒷모습이 45도로 보이는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녀와 꼭 닮은 중년의 여인이 나의 맞은편 멀리 앉아있다. 그녀는 내 아이의 뒤편에서 그녀의 아이를 바라보고 나는 그녀의 아이 뒤편에서 그들의 삶을 엿본다. 여인의 옆에는 소녀의 동생이라고 추측되는 남자아이가 앉아있다.


여인은 소녀만큼 가지런하다. 말끔한 세미 정장의 옷매무새가 가지런하고, 표정을 만들고 있는 눈매와 입모양이 더없이 가지런하다. 가방이 의자 옆에 반듯하게 놓여있고, 양팔을 꼬아 팔짱을 끼고 앉은 모습은 거만함과 가지런함 사이를 오갔다. 고개는 살짝 치켜 올라가 있고, 어깨가 반듯하다. 소녀와 같은 색깔의 머리는 어깨까지 짧았고, 꼭 소녀처럼 목 뒷덜미에 가지런히 묶여있다. 악기 연주에 따라 여인은 눈을 지그시 감기도 했도, 선율을 느끼듯 고개를 절제하며 가볍게 젖기도 했다. 그러던 중, 옆에 앉아있던 어린 소년이 잠시 나갔고, 한 중년의 남자가 뒤늦게 문을 열고 연주실로 살금살금 들어온다. 남자는 여인의 옆에 빈 의자 두 개를 남기고 앉았다. 남자는 소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엄마만큼은 아니지만 소녀는 아빠도 많이 닮았다. 여자로부터 두 자리를 남기고 앉은 모습이 마치 말 꼬리의 '...'을 흘리는 듯했다.


소녀의 독주가 시작되기 전, 이름 모를 악기를 들고나갔던 소년이 다시 들어왔다. 남자는 무표정한 아이를 따듯하게 바라봤고 둘은 눈인사를 했다. 소년은 잠시 멈칫하는 듯했지만 아까처럼 엄마 옆자리에 앉았다. 소년과 남자 사이에는 여전히 빈자리가 하나 흘려 있었다. 소녀는 작게 그려진 음표들로 빼곡한 4장의 악보를 넘겨가며 감동적인 솔로 연주를 들려주었다. 아빠는 감동했고, 놀란듯한 표정을 하며 순간 여인을 바라봤다. 남자는 가끔 여인 쪽을 바라보았는데, 여인을 바라본 것인지, 아들을 바라본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여인은 남자를 바라보지 않았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들어온 뒤로, 여인의 목이 조금 더 뻣뻣해졌다. 표정이 미세하게 부자연스럽고, 필요이상으로 심취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오로지 딸만 바라보았다. 딸에게서 눈을 떼면 눈이 다른 곳으로 가서 닿을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었을까.


여자가 아들에게 고개를 돌린다. 그러면서 찰나에 남자를 쳐다본다. 여자의 시선이 곧바로 제자리로 돌아와 정면을 향한다. 소녀의 얼굴에 담긴 평화로운 미소는 남자에게서 온 것일까. 여자가 남자를 훔쳐본 사이 남자는 소녀와 꼭 같은 미소를 지으면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가끔 여유로운 제스처로 여자 쪽을 바라봤지만, 시선이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그들의 시선은 어긋났고, 교류하지 않았다. 여자는 불편했고, 딸과 같이 평화로운 표정을 한 남자는 딸에게 감동했다.


첫 타임이 끝나고 간식 시간이 왔다. 구석에 작은 책상에 펼쳐진 다과를 모두가 나눠 먹는다. 간식 시간이 되자 모두가 책상 주위로 모여들어 타원형 원이 그려졌다. 모두가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조용히 다과를 먹으며 담소를 나눴고, 미소와 예의를 차리지만 듣기 좋은 낮은 음성들이 오고 갔다. 남자가 온 뒤부터 무언가 불편해 보였던 여자는 타원형 안에 들어올 타이밍을 놓친 것일까. 품위와 우아함을 지키던 여자가 혼자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어색함을 그녀만의 독특한 분위기로 매우 정갈하게 지우고 있었다.


간식 시간이 끝나갈 무렵 여자가 무리 쪽으로 다가왔고, 만만해 보이는 작은 빵조각 하나를 집어서 남들처럼 먹었다. 딸은 조용하게 더 권했고, 엄마는 고개를 가볍게 절레절레 저었다. 남자와 여자는 대화가 여전히 없었다. 소녀는 엄마에게도 평화로운 미소를 지어 보여주었고, 아빠에게도 따듯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소녀는 그녀 특유의 미소 젖은 눈빛과 온화한 표정, 그리고 다정한 제스처로 비밀스럽게 모두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듯했다. 소녀에게서 넘치는 이 세련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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